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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23화 (23/151)

<23화>

룩소르는 안타까움에 어쩔 줄 몰라 하면서도 한발 물러나야만 했다. 그것이 허수아비 국왕이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유, 유폐는 안 되오. 아직 확인된 사실이 없는데, 너무 가혹하지 않소. 차라리 방에, 방에 가둬 두라고 하겠소.”

사실 게텔린은 키네시아 공주를 어디에 가두든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탑이든, 감옥이든, 어차피 결말이 죽음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주도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못마땅한 기색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게텔린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자 귀족들도 한숨을 내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뱀의 것처럼 감정 없이 번들거리는 눈빛들이 룩소르에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룩소르는 어쩔 수 없이 기사에게 명령했다.

“공주를. ……방에 가둬라.”

기사가 키네시아의 팔 한쪽을 잡았다.

저도 모르게 몸을 일으켰던 룩소르가 잠시 비틀거렸다.

하인이 그를 잡아 주려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그는 그 자리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아버지!”

키네시아가 소리치며 룩소르에게 달려가려 했다.

하지만 기사의 단단한 손은 그녀를 꽉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발버둥 치면 발버둥 칠수록 그녀를 더 거칠게 끌어당겼다.

게텔린이 룩소르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봤다. 그리고 기사에게 소리쳤다.

“뭐 하느냐, 명령을 이행하지 않고!”

“공주님, 따라오십시오.”

“이거 놔! 아버지, 아버지!”

키네시아는 마지막까지 저항했으나 집무실의 문은 먹이를 집어삼키는 입처럼 그녀를 집어삼켰다.

눈앞에서 거대한 문이 무거운 소리를 내며 쿵 닫혔다.

***

기사는 키네시아를 방 안으로 거칠게 밀어 넣고 문을 닫았다. 밖에서 문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적막 속에 서 있자 현실감이 해일처럼 밀려와 그녀를 덮쳤다. 키네시아는 그 압력을 이기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녀는 일어날 생각조차 못 한 채 바닥에 주저앉아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아버지는 괜찮으실까?

어머니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포넨트와 로라도.

그리고 리아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키네시아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이라네 황제가 독을 먹고 죽으면, 리아는? 리아는 어떻게 되는 거지?’

키네시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당장 동생의 상태를 확인해야 한다. 조급함에 문고리를 돌리고 문을 어깨로 밀었다. 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잠시만 리아를 보게 해 주세요! 어떤지 확인이라도, 제 동생이 괜찮은지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잠시면,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분명 밖에 사람이 있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들리지 않았다.

아무리 애원해도 절대 나갈 수 없으리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아…….’

동생을 잃을지도 모른다. 제멋대로지만 사랑스럽던 그 아이를.

“왜 이렇게 된 거지?”

이라네리아의 몸을 다른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던 그 순간, 무슨 방법을 써서든 몸을 동생에게 돌려주어야 했다.

아니. 어쩌면 그보다 훨씬 전에, 그 남자의 손을 잡은 것부터가 문제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때는 나라를 강하게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너무나도 컸다.

악마가 영혼을 내어 달라고 해도 기꺼이 내어줬을 것이다.

‘그런 주제에 알량한 도덕심을 내세워 폐하의 방식을 부정했어.’

배우려 하지 않았다. 그녀를 돕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 판단한 탓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게 어긋났다.

모든 게.

키네시아는 결국 열리지 않는 문 앞에 주저앉았다.

문에 이마를 대고 숨죽여 울던 그녀는 소매로 눈가를 닦았다.

‘여기서 나가야 해.’

아버지가 쓰러진 이상 기다려 봐도 진실이 밝혀지는 일은 없을 것이다.

게텔린 백작이라면 없는 증거도 만들어 내려고 할 것이다. 이대로 있다간 얼마 버티지 못하고 사형당할지 모른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봤다. 창문은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2층이니 마음만 먹으면 뛰어내릴 수 있다. 아래에는 병사가 있겠지만, 운이 좋으면 탈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천천히 창으로 다가갔다.

창틀에 손을 대는 순간, 탈출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발목을 붙잡았다.

‘아버지가 깨어나실 때까지만 숨어 있으면…….’

순간 무력하게 흔들리던 룩소르의 모습이 뇌리를 스쳤다.

그런다고 내가 무사할 수 있을까?

아버지께 보호받을 수 있을까?

만일 내가 없다고 포넨트와 플로레타가 표적으로 몰리면? 동생들은 무사할 수 있을까?

키네시아는 도주를 포기하고 소파에 앉아 몸을 웅크렸다.

그녀는 무력감과 두려움을 견디면서도 인기척이 들릴 때마다 문 쪽으로 뛰어갔다.

“아버지와 리아는 깨어났나요?”

“…….”

“아니면 어머니가 어떠신지만이라도 알려 주세요. 분명 많이 놀라셨을 텐데…….”

“…….”

“그것도 안 되면 포넨트와 플로레타에게 나는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

“제발. 이렇게 부탁드려요. 제발요.”

가족들에 대해 묻고 또 물었다. 간절하게 애원했지만 결국 아무도 그녀의 질문에 답해 주지 않았다.

키네시아는 방 밖의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을 순 없는데 그렇다고 무언가를 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울음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키네시아가 몸을 웅크렸다.

그때,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새벽이 되자 아르만은 조용히 제 방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은밀히 움직여 누군가의 방문을 열었다.

그 안에는 심기가 매우 불편해 보이는 게텔린이 있었다.

그는 아르만이 들어온 것도 모른 채 다리를 떨며 구시렁거리고 있었다.

“룩소르, 그 촌스러운 머저리가. 멍청해 보여서 왕 자리에 앉혀 줬더니 자기가 진짜 왕인 줄 알아? 양이나 치던 천박한 것 주제에. 핏줄 빼고는 볼 것도 없는 놈이 감히 내 말에 토를 달고 말이야.”

아르만은 저도 모르게 문을 돌아봤다.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걱정스러운 내용이었던 탓이었다.

말을 걸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아르만을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백작님.”

아르만이 소리 내어 부르자 게텔린이 몸을 돌렸다.

“아르만! 우리 1등 공신. 마침 잘 왔다.”

“시키는 건 전부 했습니다. 이제 아버지를…….”

“그럼! 풀어 주고말고. 그까짓 게 뭐라고.”

“약속대로 빚을 탕감하고 담보로 가져가신 토지도 돌려주시는 겁니까?”

오래된 친구를 맞이하듯 활짝 벌어져 있던 입이 꾹 다물렸다.

게텔린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으로 아르만을 훑으며 수염 끄트머리를 비벼 꼬았다.

“아르만, 이 사람아. 빚을 져 놓고 안 갚으려는 건 무슨 도둑놈 심보인가?”

게텔린이 비열한 목소리로 점잖은 척을 했다.

아르만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하지만 저는 백작님이 시키신 대로 공주님께 독,”

“어허! 말을 조심해야지! 아직 궁전 안인데.”

게텔린이 팔걸이를 쿵 내리쳤다. 아르만이 입을 다물자 게텔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삿대질을 했다.

잠시 생각하니 열이 뻗쳤다. 기회를 준 것만으로도 고마운 줄을 모르고!

“막말로, 증거 있나? 응? 증거가 있느냔 말이야! 아버지를 풀어 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하여간 룩소르나 이놈이나, 이래서 천박한 것들은 잘 대해주면 안 돼. 제가 뭐라도 되는 줄 안다니까!”

“……죄송합니다, 백작님.”

“그래. 제 위치를 알란 말이야! 커흠. 흠! 그래도 내가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네. 자네 아버지를 또 가두거나 하는 일은 없을 게야.”

“…….”

“감사 인사는 안 하나?”

“감사합니다.”

게텔린이 혀를 쯧쯧 차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는 곰곰이 생각했다.

사실 이번 일은 아르만의 지략이 없었다면 실패했을 것이다. 이라네리아 공주의 눈치가 워낙 빨라야 말이지.

게텔린은 가자미 눈으로 아르만을 힐끗거렸다.

곁에 두면 두고두고 쓸모가 많을 것 같은데…….

“아르만, 자네. 그러지 말고 내 밑으로 들어오는 건 어떻겠나? 이미 불어난 이자는 어쩔 수 없지만 앞으로 더는 이자를 받지 않겠네.”

아르만은 대답 없이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물었다.

게텔린은 어차피 그가 거절해도 힘으로 찍어 누를 생각이었기에 조금 더 자비를 베푸는 척했다.

“어차피 이대로 두면 이자만 더 늘어나. 이제 나한테 넘길 땅도 없지 않나. 내 밑에서 빚이나 갚아. 다 갚고 나면 내가 축하의 의미로 땅을 돌려줄지 누가 아나? 안 그런가?”

아르만은 조금 고민하는 듯하다가 허리를 푹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백작님.”

“그래!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그럼 이참에 가서 이라네리아 공주를 확실하게 죽이고 오게. 그 약을 먹고도 이렇게 질기게 살아남는 년은 처음이야.”

“예. 백작님께서는 궁전에 계속 머무실 예정입니까?”

“그래야지. 오틸리에 왕비가 틈만 보이면 키네시아 공주를 빼내려고 해서.”

또다시 열이 뻗치는지 게텔린이 팔걸이를 쾅쾅 내리쳤다.

“하여간 쥐새끼 같은 것들. 누구 덕에 좋은 옷, 좋은 음식을 누리고 사는 건데!”

아르만은 가만히 게텔린을 바라보다가 허리를 숙였다.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수고하게. 잘 마무리하고.”

“예, 백작님.”

인사를 하고 나온 아르만은 복도에 멈춰서서 차가운 벽에 몸을 기댔다.

그는 얇은 옷 너머로 번지는 한기를 그대로 맞이하며 이라네리아 공주를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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