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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22화 (22/151)

<22화>

플로레타가 키네시아의 옷자락을 꼭 붙잡고 주춤주춤 물러났다.

“키네샤…….”

울먹이는 목소리가 자꾸만 키네시아를 뒤로 잡아당겼다.

“거짓말이겠지? 누가 그 애에게 독을 먹이겠어. 그렇지, 키네샤?”

“그런 걸 거야.”

그래, 그녀가 누구인가? 폭군으로 유명한 이라네 황제가 아닌가.

게다가 그녀가 미리 눈치채고 해치운 암살자만 해도 열 명이 넘었다.

그러니 사실이 아닐 거야. 계획이 있는 거겠지. 지금 이렇게 데려가도 위험에 빠지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다 괜찮을 거야.”

키네시아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그녀는 자꾸만 주저앉으려는 심장을 진정시키고 뒷걸음질 치려는 발을 붙잡았다.

“오해가 있는 모양이에요.”

“그건 가셔서 말씀하십시오. 국왕 전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알겠어요.”

플로레타가 키네시아의 손을 꼭 잡았다.

키네시아도 제 동생을 손을 한 번 꽉 잡았다가 곧 떼어 냈다.

만약 자신이 진짜 범인으로 몰린 상황이면 플로레타와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봤자 좋을 게 없었다.

탐욕스러운 귀족들이 플로레타를 공범으로 엮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로라. 방으로 돌아가.”

“하지만, 하지만, 키네샤…….”

“어서.”

플로레타가 눈치를 보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문 쪽으로 걸어갔다.

기사가 플로레타를 막지 않고 잠시 보았다가 제 부하들에게 말했다.

“너희는 남아서 방 안을 수색해.”

“예.”

“키네시아 공주님, 가시죠.”

키네시아는 플로레타가 방에서 완전히 나간 것을 보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는 키네시아를 왕의 집무실로 안내했다.

이미 안에는 화려하게 치장한 귀족들이 모여 있었다.

룩소르는 가장 상석에 앉아 있었으나 움츠린 몸과 불안한 시선, 행색 탓에 지배자처럼 보이진 않았다.

얼굴에 깃든 절망이 그를 더 초라하게 만들었다.

키네시아는 시선을 내리깔며 긴 탁자 끝에 섰다.

룩소르와 멀리 마주하는 자리였다.

두 부녀의 눈빛이 마주쳤다. 룩소르는 침통한 얼굴로 눈을 깊게 내리감았다.

게텔린이 룩소르를 슬쩍 눈길을 주고는 은 룩소르의 오른쪽에 앉아 키네시아를 보며 수염 끝을 꼬았다.

“공주님. 여기엔 왜 불려 오셨는지는 아시겠지요.”

“……오면서 기사에게 리아가 독을 먹었다는 말을 전해 들었어요. 리아는, 괜찮은가요?”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자신이 독을 먹여 놓고, 뻔뻔하기는.”

키네시아는 떨리는 숨으로 폐를 채웠다. 가슴이 불안으로 크게 부풀었다.

그녀는 모여 있는 얼굴들을 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경멸과 혐오가 아니라 조롱과 즐거움이 어려 있었다. 다들 키네시아가 독을 먹이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눈치였다.

키네시아는 자신이 함정에 빠졌음을 확신했다.

그녀는 주먹 쥔 손을 몸에 바짝 붙였다.

궁지에 몰린 기분이다.

누명을 벗지 못하면 사형에 처할지도 모른다.

죽는 것도 두렵지만 가족들에게 제 이름이 상처로 남을 게 더 두려웠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해.’

자꾸만 다리에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저는 아니에요.”

키네시아는 이제 14살이었다. 아무리 똑똑하고 생각이 깊다지만 살인자로 몰리는 것을 감당하긴 어려웠다.

그렇다고 룩소르가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봤다. 지금이라도 이라네 황제가 극적으로 나타나 도와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런 일은 없었고, 키네시아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결백을 주장하는 것뿐이었다.

“아버지. 제가 한 게 아니에요.”

“안다, 아가. 아빠가 잘 설……,”

-쾅!

게텔린이 탁자를 거칠게 내리쳤다.

천둥 같은 소리가 룩소르의 말문을 막았다.

룩소르가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새도 없이 게텔린이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 한 나라의 공주가 독살당할 뻔한 일입니다. 그런데 용의자가 같은 공주라는 이유만으로 쉽게 넘어가려고 하시다니요.”

비열한 얼굴로 웃고 있던 다른 귀족들이 심각한 척 얼굴을 굳히고 게텔린의 말에 동조했다.

“맞습니다, 전하. 지금 이라네리아 공주님은 사경을 헤매고 있지 않습니까.”

“의사 말로는 오늘을 넘기기 힘들 거라고 했습니다.”

“이라네리아 공주님도 전하의 딸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범인의 편을 드시는 겁니까?”

룩소르가 절박한 목소리로 반박했다.

“키네시아가, 다른 누구도 아닌 키네시아가 그럴 리 없소. 이건 분명 오해가 있을 것이오.”

그러나 아무도 그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키네시아는 그 모습을 두 눈에 똑똑히 담았다.

자신과 같이 무력하고 나약한 아버지.

권위와 위엄을 잃은 국왕.

키네시아는 북받치는 울음을 참기 위해 숨을 빠르게 들이마시고 내쉬다 겨우 입을 열었다.

“증언했다는 시종을 만나게 해 주세요.”

게텔린이 조소를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문가에 서 있는 궁정인을 향해 손짓했다.

“그냥 한꺼번에 다 보시죠. 증인들을 모두 데려와.”

곧 안으로 아르만이 들어왔다.

키네시아는 눈을 부릅뜨고 그를 쳐다봤다. 분노와 증오로 경련하는 콧잔등을, 아르만은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게텔린은 엄지와 검지를 비벼 콧수염 끝을 꼬아대며 폭소를 참기 위해 헛기침했다.

“흠, 크흠. 이라네리아 공주님의 시종. 네가 본 것을 말해 봐라.”

“새벽 3시에 키네시아 공주님이 부엌으로 들어가는 것을 봤습니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이상한 마음에 따라가 봤더니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드실 마카롱 안쪽 면에 무언가를 바르고 있었습니다.”

“키네시아 공주님. 그때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잠을 자고 있었어요.”

“그걸 본 사람이 있습니까? 증명해 줄 사람은요?”

당연한 말이지만 증명해 줄 사람은 없었다.

“혼자 자는데 그걸 누가 증명해 줄 수 있겠어요?”

“그 말은 공주님이 새벽에는 몰래 돌아다닐 수 있다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그 시간에 제 행동을 꾸며내 모함할 수도 있다는 뜻이죠.”

게텔린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는 수염만 만지작거리다가 하녀에게 눈짓했다.

“저는 이라네리아 공주님께 마카롱을 전달해 드렸습니다. 독이 들었을 줄은, 그런 줄은 정말 몰랐어요.”

하녀가 눈물을 터트렸다.

게텔린이 답지 않게 인내심을 발휘해 하녀가 진정할 때까지 좀 기다려 주었다.

“그걸 누가 시켰지?”

“다른 하녀한테 전달받았는데, 키네시아 공주님이 화해 선물을 준비하셨다고, 청소가 끝나면 받아서 이라네리아 공주님께 가져다드리라고 했어요.”

룩소르가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얼굴은 봤나?”

“원래 집중을 하면 주변을 잘 못 보는 편이라서……, 얼굴이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럼 키네시아가 시켰다고 볼 수 없지 않소!”

게텔린의 표정이 못마땅하게 변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시키지 않았다고도 볼 수 없지 않습니까?”

게텔린이 룩소스의 말을 흉내 내며 비아냥거렸다.

룩소르는 모욕감을 참으며 파티셰에게 물었다.

“그대는 무엇을 보았지?”

“쪽지로 일을 부탁받았습니다.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복숭아를 좋아하시니 화해의 선물로 복숭아 마카롱을 준비해 달라고요.”

왕족의 지시를 말이나 쪽지로 전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파티셰는 국왕과 일가족의 필체를 모두 알고 있었다.

“제가 본 바로는 키네시아 공주님의 필체가 맞았습니다.”

“이렇게 증거가 뚜렷한데 아직도 발뺌하실 겁니까?”

“필체는 조작할 수 있으니 직접적인 증거가 될 수 없습니다.”

생각보다 키네시아의 변론이 치밀했다.

일이 생각만큼 쉽게 풀리지 않자 게텔린 백작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더 있다가는 두 사람의 입에서 진범을 찾겠다는 말이 나올 것 같았다. 보다 못한 다른 귀족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럼 일단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공주를 유폐시켜 두십시오. 전하.”

“그게 무슨 말이오. 아직 공주가 범인이라는 증거도 없는데, 유폐라니!”

“하지만 범인이 아니란 증거도 없지 않습니까? 공주를 너무 아끼는 어떤 분이 도주를 도와주면 어쩌시려고요.”

귀족들의 눈이 룩소르에게로 향했다.

그는 압박감을 견디다 못해 기절할 것만 같은 표정이었다.

키네시아는 그 자리에 서서 자신을 가두라고 소리치는 목소리들을 듣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상황에서 벗어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녀는 자꾸만 저도 모르게 입구 쪽을 뒤돌아보았다.

상황이 극에 치달았음에도 이라네리아는 그림자조차 비추질 않고 있었다. 키네시아는 단념했다.

‘이라네 황제는 오지 않을 거야.’

그녀는 고개를 더 돌려 아르만을 노려보았다.

분명 그가 이라네 황제에게 독을 먹였을 것이다. 그렇게 자비를 보였음에도 결국 배신한 것이었다.

‘역시 두려움은 두려움을 부를 뿐이야.’

전혀 기쁘지 않게도 제 생각이 옳았다.

자비를 보이든 어떻든, 결국 더 큰 두려움에 지고 마는 것이다.

이라네 황제는 아르만을 회유할 수 있는 것처럼 굴었다. 자신이 모든 상황을 통제하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결과는 어떤가?

그는 결국 게텔린과 눈빛을 주고받고 있지 않은가.

이라네는 독을 먹었고 자신은 위험에 처했다.

‘내가 그녀를 너무 과대평가했어.’

키네시아는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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