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두 사람은 요즘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잔소리를 늘어놨다.
오늘도 내가 하녀 옷에 주스를 부은 걸 포넨트에게 전해 듣고 온 거겠지.
내 딴에는 지극히 평화로운 방법으로 암살자를 처리하고 있는 건데 잔소리를 들으려니 억울하다.
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자 두 사람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소파에 앉아 발을 까딱이며 잔소리를 기다렸다. 하지만 오틸리에와 룩소르는 서로 눈빛만 주고받을 뿐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슬슬 지루해져 하품을 하는데 오틸리에가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뭐야. 왜 이래?’
몸을 옆으로 슬쩍 빼자 이번엔 손을 잡아 왔다.
“리아. 사람은 괴롭히면 안 되는 거야.”
“알아. 벌써 며칠째 같은 말을 하는 중이잖아.”
“그런데 왜 계속 궁정인들을 괴롭히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엄마 아빠한테만 말해 줄 수 있을까?”
“아니.”
오틸리에가 눈물을 참는 표정으로 숨을 흡 들이켰다.
룩소르가 조용히 그녀에게 다가와 어깨에 손을 올렸다. 오틸리에의 손이 룩소르의 손등을 덮었다.
그 모습은 마치, 닥쳐올 비극을 함께 헤쳐 나가기로 맹세한 사람들처럼 비장해 보였다.
그래도 알려 줄 생각은 없지만.
“전하들은 감당 못 할 일이야.”
“리아.”
“이제 곧 사람 괴롭히는 일 없어질 테니까 신경 쓰지 마.”
“어떻게 그러니. 가족인데.”
약속한 게 있으니 가족이 아니라고 말해 버릴 수도 없고!
아니지. 키네시아가 먼저 포기했으니까 이제 상관없나?
그냥 확 말해 버려?
“사실…….”
룩소르와 오틸리에의 촉촉한 눈빛이 한꺼번에 내게로 쏟아졌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나도 모르게 반쯤 벌렸던 입을 다물고 말았다.
황제를 닥치게 만들다니. 대단한 능력이다.
“아니야.”
목구멍으로 한숨이 넘어갔다. 숨을 길게 내쉬며 삐딱하게 앉자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또다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들은 후퇴를 결심했는지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오늘은 이야기할 기분이 아닌가 보구나.”
“엄마 아빠는 항상 들을 준비가 돼 있으니까 말하고 싶으면 언제든 와도 돼.”
“그리고 가능하면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 방법으로 해결해 주려무나.”
괴롭히는 게 아니라 적당한 핑계를 대서 쫓아내는 거지만.
룩소르와 오틸리에가 매일 이렇게 찾아오면 나도 귀찮으니까 다른 방법을 써야겠다.
“알겠어.”
“리아. 엄마 아빠는 정말 언제든 들을 준비,”
“아까 했던 말이잖아.”
손을 내저어 두 사람을 쫓아내고 뒤로 드러누웠다.
착하고 올곧은 사람을 싫어하진 않는데, 그런 사람들에게만 둘러싸여 있으니까 지친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앞으로의 일을 진행하려면 돈이 좀 필요하니 산책이라도 할 겸 금고에 다녀와야겠다.
밖으로 나오자 도라가 움찔 몸을 떨었다.
“공주님, 어디 가세요?”
“응.”
그녀는 따라올지 말지 눈치를 보고 있었다.
내가 패악을 부린다는 소문이 돈 이후에도 그녀만큼은 나를 멀리하지 않았다. 눈치를 보는 빈도가 늘어나긴 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내가 멀리하는 중이다. 눈에 띄게 꺼리면서도 붙어 있으려고 하다니. 뭔가 꿍꿍이가 있어 보이잖아.
“따라오지 마.”
“네. 공주님.”
그녀를 두고 정원을 돌아 건물 뒤로 들어갔다.
내가 열려고 했던 지하로 통하는 문이 이미 조금 열려 있었다.
“어떤 겁대가리 없는 놈이…….”
성큼성큼 걸어 입구로 다가갔다. 주변에 자란 풀들이 입구 쪽을 침범해 있었다. 문이 열린 채로 방치된 지 꽤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뜻이었다.
못해도 10일은 넘은 것 같은데.
주변을 살펴보다가 아래로 내려갔다.
벽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려 비밀통로를 열었다. 자동으로 켜지는 불을 바라보다가 불빛의 개수가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가 여기까지 들어 왔던 건 확실하네.’
다가가 마력석이 뽑혀 있는 자리를 보았다.
날카로운 것으로 고정장치를 벌렸는지 여기저기 날렵한 홈이 패여 있었다.
‘설마 금고를 털어 간 건 아니겠지?’
다급한 마음에 재빨리 재수 없는 주문을 외우고 금고 문을 열었다.
내부는 내가 저번에 들어왔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도대체 누구지?’
궁전 사람들은 지하 감옥이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미 내가 보석을 싹 털어 갔다는 소문이 나서 안에 들어와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밖에서 들어온 놈 중 하나라는 건데.
사절단들이 금고에 대해 알 리가 없고, 소문을 들었다고 해도 비밀통로를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럼 누구지?’
이 금고의 위치를 아는 사람은 펠리온과 라파일밖에 없다.
라파일은 살아 있을 가능성이 없고, 펠리온이 만약 아직 살아 있고, 여기까지 찾아왔었다면 금고가 한 번 열렸던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그리고 성격상 금고를 연 사람을 대면하러 왔었겠지.
‘진짜 어디에 기록이라도 남아 있나?’
일단 금화 두 주머니를 챙겨 밖으로 나왔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문 주변 벽에도 흠집이 있었다. 마력석이 있던 자리 주변과 비슷한 자국이었다.
금고의 위치를 알고 열려고 했던 흔적이었다.
‘저주받았겠네.’
펠리온의 마법은 영구적이니 금고에 손을 댄 사람은 지금쯤 악몽에 시달리고 있을 것이다.
금고와 멀어지면 가끔 악몽을 꾸는 정도겠지만 가까워지면 끔찍한 환각을 경험하게 된다.
이 근처는 얼씬도 하지 않겠지 내 돈은 앞으로도 무사하다.
한시름 놓고 방으로 돌아왔다.
***
“걔네는 뭐가 문젤까.”
언제부턴가 키네시아는 이라네리아를 찾아가지 않았다. 이라네리아 역시 키네시아를 부르지 않았다.
가끔 식사 자리에서 마주쳐도 떨어져 앉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화는 없었다.
갑자기 사이가 어색해진 형제들을 위해 포넨트와 플로레타는 머리를 맞댔다.
“나도 모르겠어……. 싸운 걸까?”
“네가 가서 떠봐.”
“시, 싫어. 리아 요즘 무섭단 말이야.”
“그럼 키네시아한테 가서 물어봐!”
플로레타가 눈을 크게 뜨더니 이내 야무진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플로레타는 곧장 키네시아의 방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막상 도착하자 문을 두드릴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한참이나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던 그녀가 겨우 문을 두드리고 슬그머니 문을 열었다.
“키네샤, 방에 있어?”
“응. 로라.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닫은 플로레타가 안을 쓱 둘러봤다.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종종걸음으로 키네시아에게 다가갔다.
키네시아는 깃펜을 내려놓고 플로레타 쪽으로 돌아앉았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일이 있는 건 아니고……. 포넨트가…….”
“포넨트가?”
“물어보라고 한 게 있어서.”
키네시아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말이야……. 리아랑 싸웠어?”
“…….”
키네시아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진짜 싸웠을 줄은 몰랐는지 플로레타가 놀라며 눈을 굴렸다.
그녀는 더 물어봐도 될까 고민하다가 간이 의자를 끌고 와 키네시아 앞에 앉았다.
“왜 싸웠는지 물어봐도 돼?”
키네시아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플로레타는 깍지 낀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알잖아. 요즘 리아가, 좀 안 좋은 소리를 많이 듣는 것 같아서. 그래서, 걱정돼서.”
“안 좋은 소리?”
“응응. 저번에는 하녀들이 막내 공주님 인성이 점점 이름을 따라간다고…….”
“푸흡.”
키네시아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제야 플로레타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녀는 키네시아 쪽으로 더 당겨 앉으며 조잘거렸다.
“그리고 요즘 훈련장에 자주 보이잖아. 전문적으로 사람을 때리려고 배우는 거라고 그러더라니까. 리아가 그런 나쁜 애는 아니잖아.”
“음…….”
“하인들은 리아를 슬금슬금 피해. 이라네 황제의 금고에 허락도 없이 들어가는 바람에 저주를 받아서 성격이 저렇게 됐다고.”
“그랬을지도 모르지.”
어린아이 몸에 갇힌 것도 저주라면 저주니까.
그녀의 목소리가 조금 냉소적으로 변하자 플로레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내 맑은 청보라색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저, 정말 그런 걸까? 그럼 어쩌지? 신전에 데려가야 할까? 부모님께 말할까?”
“로라, 걱정하지 마. 그냥 해 본 말이야.”
“그래도. 정말 이상하단 말이야. 리아긴 한데 리아가 아닌 것 같아. 그러니까 느낌이, 분명 리아거든! 그런데 완전 다른 사람처럼 행동하니까……. 차라리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면 이해를 할 텐데, 분명 리아거든.”
플로레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횡설수설했다.
키네시아는 사실 플로레타가 무슨 말을 하는지 8할 정도는 못 알아들었다.
그러나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플로레타는 원래도 독특한 구석이 있어서, 불안해할 때면 말이 잘 안 통했다.
이럴 땐 무조건 플로레타를 달래는 게 우선이었다.
키네시아가 부드럽게 제 동생의 팔뚝을 쓸어내리고 등을 다독였다.
“괜찮아, 플로라. 리아도 괜찮을 거야. 그러니까 진정해.”
“응…….”
“자, 크게 숨 쉬자. 들이마시고, 내쉬고. 그렇지.”
“흡. 하. 흡. 하.”
진정하고 나자 플로레타의 볼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고마워, 키네샤.”
“그리고 리아에 관한 건…….”
노크 소리가 그녀의 말문을 막았다.
방문을 허락받기 위해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는 좀 달랐다. 이번 노크는 마치 경고를 하듯 거세고 단단했다.
똑같은 간격으로 3번 노크한 사람은 허락도 없이 문을 열었다.
키네시아가 누구냐고 물을 새도 없이, 기사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키네시아 공주님. 잠시 저희와 함께 가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일이죠?”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독을 먹고 쓰러지셨습니다.”
키네시아는 자기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시종이 공주님을 범인으로 지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