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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9화 (19/151)

<19화>

분명 중간 연락책은 아르만이 독살을 시도하다가 이라네리아 공주에게 들켰다고 했다. 그것도 아르만 본인이 직접 와서 말했다고 전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아직 안 죽었지? 왕족을 살해하려다 발각되면 즉결 처형도 가능할 텐데.

심지어 이라네리아 공주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를 전속 시종으로 삼아 달고 다녔다.

처음에 게텔린은 아르만이 저를 배신했다고 여겼다.

분노에 휩싸여 길길이 날뛰다가 뒤늦게 아르만이 공주를 독살하기로 결심한 이유가 떠올랐다.

아르만의 아버지는 아직 게텔린 백작의 손아귀에 있었다.

아르만 부자는 서로에게만 의지하고 살았기에 그 관계가 더 애틋했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나를 배신했을 리가 없지.’

그리고 만약 아르만이 저를 배신했다면 분명 룩소르 국왕의 귀에 게텔린 백작이 배후라는 말이 들어갔을 것이다.

국왕은 멍청하고 착해 빠지긴 했어도 자기 가족은 끔찍하게 아끼는 작자이다. 암투와도 거리가 먼 놈이라 몰래 숨어서 조사하는 법도 모른다.

배후를 알게 되었다면 잡아들이겠다고 잡아들이겠다고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을 것이다.

그러니 아르만은 게텔린을 배신한 게 아니다.

게텔린은 좋지 않은 머리로 겨우 그럴듯한 결론을 도출해 냈다.

어쩌면 아르만 이용해 왕실을 더 제 것처럼 주무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르만과 직접 대면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대답에 따라 실패한 대가가 달라질 거다.”

게텔린의 말이 끝나자마자 아르만이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백작님. 공주에게 백작님이 시켰다는 것을 흘렸습니다.”

“뭐?!”

잠이 다 달아난 얼굴로 게텔린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르만은 게텔린의 얼굴을 보지도 못한 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라네리아 공주님이 너무 눈치가 빨라서, 그래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쩔 수 없기는, 네가 살려고 나를 팔아넘긴 게 아니더냐! 여봐라! 당장 이놈의 아비를,”

“팔아넘긴 게 아닙니다. 백작님, 제 이야기 좀 들어 주세요.”

“듣긴 뭘 들어!”

그는 손에 닿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졌다. 그중 잉크병 하나가 아르만의 머리를 가격하고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아르만은 잉크 위로 떨어지는 피를 바라보다가 몸을 더 숙였다.

“시간을 더 주시면 죽일 수 있습니다.”

씩씩거리던 게텔린 백작은 피를 보더니 진정이 됐는지 자리에 털썩 앉았다.

“됐어. 너와 네 아비 전부 죽은 목숨이다. 다른 사람을 쓰겠다.”

“막내 공주님은 순진하지만 눈치가 빠르십니다. 아마 다른 사람을 보내셔도 쉽게 성공하지 못할 겁니다.”

일리가 있었다. 며칠 새 게텔린은 여러 방면으로 암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라네리아 공주는 강한 방법을 쓸수록 물 묻은 비누처럼 요리조리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크흠.”

그가 불편한 소리를 내자 아르만이 여전히 떨리는 목소리로 고했다.

“제게 이중 첩자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게텔린 백작님을 배신하고 싶지 않습니다.”

사실 아르만은 그 마음을 충분히 증명했다.

중간 연락책을 통해 꾸준히 연락했으며 얼마 전에는 왕이 세금을 걷기 위해 불시에 재산 조사를 할 것이라는 정보까지 보내 주었다.

덕분에 게텔린은 무사히 재산을 은닉할 수 있었다.

그가 생각에 잠겨 수염을 꼬자 아르만이 피를 닦고 다시 두 손을 공손하게 모았다.

“그분들은 제 아버지를 구해 줄 힘이 없지 않습니까. 게텔린 백작님처럼 부유하신 것도, 커다란 군사를 가진 것도 아니고요.”

“흠, 그렇지. 그렇지.”

“시간을 더 주시면 신뢰를 얻어 꼭 공주를 죽이겠습니다. 그리고 가장 거슬렸던 자에게 뒤집어씌우면 한 번에 2명을 처리하실 수 있으실 겁니다.”

“호오.”

게텔린이 놀란 표정으로 아르만을 보았다.

“그래. 그렇게만 된다면 내가 네 아버지도 풀어 주고 담보로 가져간 땅도 돌려주고, 빚도 탕감해주마.”

아르만은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눈엣가시 같은 공주들만 해치울 수 있다면, 게텔린은 아르만 부자에게 빼앗은 돈 같은 것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게다가 저놈은 상황을 스스로 타개한 주제에 아직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지 않은가.

“키네시아 공주가 사주한 것으로 하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아미르 공작에게 뒤집어씌우고 싶었으나 그는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이미 그의 군사력과 재정 수준은 에피파네스 왕국을 뛰어넘었다.

왜 세금을 꼬박꼬박 내며 에피파네스에 속해 있는지 모를 정도였다.

괜히 건드렸다가 그걸 빌미로 독립이라도 하면 정말 국가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나라가 위기에 처할 것이다.

그러면 이런 부귀영화도 끝이다.

“시간을 얼마나 주면 되지?”

“2주만 더 주십시오.”

“좋다. 대신 네 아비는 편안하게 감옥에 있는 게 아니라 광산으로 보낼 것이다. 빨리 해치워. 시간을 끌었다가 네 아비가 노역을 견디지 못해서 죽어 버리면 곤란하지 않겠나?”

“……예, 백작님.”

***

나는 연무장이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매일 같이 나와 수련을 하는 사람은 어림잡아 5명 남짓이었다. 그중에 인품까지 쓸만해 보이는 놈은 3명 정도.

개판이 따로 없는 기사단을 보며 혀를 차다가 고개를 돌렸다.

한 하녀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저거 수상한데.’

나는 차를 따르는 하녀의 팔 안쪽 소매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 이라네 필로티메오마이 벨로아스.

암살 대상 경력 30년. 살면서 만난 암살자 수만 200명이 넘는다.

‘다른 사람 눈은 속여도 내 눈은 못 속이지.’

움직일 때마다 언뜻, 팔뚝의 굴곡이 어색하게 드러나는 게 보였다.

마치 단단한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예를 들면 급소를 단번에 찌를 수 있는 송곳이라든가…….

“너 또 뭘 하려고.”

포넨트가 나를 노려봤다. 쯧쯧. 버르장머리 없는 놈.

이래서 두고 오려고 했는데 굳이 따라와서는 잔소리다.

녀석의 이마에 딱밤을 놔 주고 불시에 하녀에게 다리를 걸었다. 하녀가 놀라며 폴짝 뛰어 내 발을 피했다.

어쭈. 이것 봐라. 제법 행동이 날쌘데.

나는 지체하지 않고 하녀에게 주스를 뿌렸다. 이번엔 피할 수 없었는지 하녀의 앞섬이 전부 젖었다.

“미안해라. 옷이 젖었으니 가서 쉬어.”

“괜찮습니다.”

“지금 감히 왕족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거야?”

하녀가 한숨을 깊게 내쉬고 몸을 돌렸다.

뒤에서 포넨트의 감탄사가 들렸다.

“저, 미친.”

멀쩡한 사람에게 미쳤다니.

“너 뭐 폭군의 영혼이라도 쓰였냐?”

영혼이 씐 건 맞는 것 같은데, 폭군은 아니다. 이 불경스러운 놈.

이마에 딱밤을 한 번 더 놔줬다.

그러자 포넨트가 폭발해 날뛰기 시작했다. 옆에 앉아 있던 키네시아와 로그리예가 냉큼 그를 붙잡았다.

“너 진짜 오빠한테……! 이리 와. 오늘 나랑 끝장을 보자. 놔! 안 놔?”

“쯧쯧. 누굴 닮아서 성격이 저렇게 불같은 거야?”

키네시아가 나를 빤히 보았다.

또 그 표정이다. 내 양심이 뒈졌는지 살았는지 의심하는 듯한 표정.

“뭘 봐? 너도 이마에 혹 나 볼래?”

키네시아가 고개를 돌렸다. 제 이마는 소중한 모양이다.

“참아, 포넨트.”

“그래, 친구. 진정해.”

나는 느긋하게 앉아 키네시아와 로그리예가 포넨트를 말리는 걸 구경하며 잔을 들었다.

목을 축이려는데 잔이 여전히 비어 있었다.

나는 곁에 서 있는 아르만에게 손가락을 까딱였다.

“주스.”

“예, 공주님.”

아르만이 다가와 주스를 따랐다.

나는 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피딱지가 앉은 옆머리를 콕 찔렀다.

아르만이 움찔거리며 몸을 벌벌 떨었다.

“너는 전생에 꿀벌이었니? 건들기만 하면 윙윙 소리가 날 정도로 떠네.”

“죄송, 죄송합니다.”

“흠……. 어제저녁엔 어디 갔었어? 안 보이던데.”

“네, 그게…….”

아르만이 내 앞에 있는 두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주스를 한 모금 마시고 내려놨다.

독은 없군.

“됐고. 이마는 왜 그래?”

“그냥, 다쳤습니다.”

“키네시아. 저번에 쓰던 연고 남았어?”

“응. 조금.”

“가져오라고 해.”

키네시아가 사람을 시켜 연고를 가져오게 했다.

나는 연고를 받아 들고 아르만에게 손짓했다.

그가 뒷짐을 진 채 허리를 숙였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놈이 칠칠치 못하긴.”

연고를 조금 퍼 상처 난 부위에 발라 주었다.

“너의 흠은 주인의 흠이니까 몸가짐에 신경 쓰도록 해.”

아르만이 손으로 연신 제 상처 부위를 만지작거렸다.

그럴 만도 하지. 즉시 효과를 볼 수 있을 정도로 강한 신성력이 담긴 연고는 성자나 성녀, 대신관 정도나 만들 수 있었다.

한마디로 수도 적고 엄청나게 비싸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런 연고는 왕족이나 되어야 구할 수 있다.

물론 부유한 왕족 말이다. 에피파네스 꼬질이들에게는 어림도 없는 물건이지.

‘그럼 저놈은 이미 왕족 수준의 부를 축적했겠지.’

로그리예 아미르를 보았다. 그는 뭐가 불만인지 무표정한 얼굴로 아르만을 빤히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또 심기가 오락가락하는 모양이다.

어린놈이 벌써부터.

혀를 쯧쯧 차고 아르만의 이마에 아슬아슬하게 붙어있는 피딱지를 살살 떼어 내 주었다.

안에 이미 살이 차올랐기에 쉽게 떨어졌다.

손가락을 가볍게 터는 와중에도 그는 여전히 허리를 숙이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방에 들어가서 쉬어.”

“괜찮습니다.”

“내 말대로 해.”

흘러내린 그의 앞머리를 쓸어 넘겨 주며 눈을 맞췄다. 홉뜬 눈 안에 담긴 짙은 녹색 눈동자가 내 시선을 피해 굴러다녔다.

나는 아르만에게서 손을 떼며 속삭였다.

“간밤에 먼 길 다녀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아, 게텔린 백작의 저택이면 그리 멀지 않나?”

아르만의 동공이 순식간에 확장되었다. 숨이 잠시 멎었다가 떨리며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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