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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8화 (18/151)

<18화>

***

‘정말 허술하기 짝이 없네.’

나는 김이 폴폴 나는 차를 보며 턱을 괬다.

마시지 않고 내려다보고만 있자 옆에 있는 플로레타와 포넨트가 말을 걸었다.

“왜 그래, 리아?”

“맞아. 왜 안 마시냐? 네가 좋아하는 수국차잖아.”

몸 주인도 차를 마실 줄 아나 보네.

차는 역시 수국차지.

나 역시 살아 있을 때 수국차를 즐겨 마셨다.

물론 독이 들어 있는 것을 알면서도 마실 정도로 좋아하진 않지만 말이다.

향긋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것을 보다가 고개를 삐딱하게 돌렸다.

한쪽에서 하인이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을 달달 떨며 서 있었다.

‘아니, 저렇게 ‘나 무슨 짓 했어요,’ 하고 서 있으면 마시고 싶어도 마실 수가 없잖아.’

게다가 향도 조금 이상하다.

독살의 기본은 무미, 무취, 무색의 독을 쓰는 건데. 그런 걸 모르나?

아니면 향이나 맛이 강한 음식에 넣어서 독을 좀 가리든가. 이건 뭐, 알아서 죽어 달라는 것도 아니고.

한숨을 푹 내쉬자 형제끼리 차 마시는 자리에 뻔뻔하게 껴 있던 로그리예가 내 잔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그의 손등을 찰싹 때리고 잔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찻잔을 뒤집어 바닥에 차를 쏟아부었다.

여기저기서 놀란 숨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덜덜 떨고 있는 하인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다시 내와.”

하인이 화들짝 놀라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더니 조심스럽게 찻잔을 가져갔다.

애들은 전부 바닥에 쏟아진 차를 보고 있었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한 곳에 쏠리자 한 하녀가 다가와 찻물을 치우려고 했다.

“그냥 둬. 아까 걔가 치울 거니까 만지지 마.”

“네, 공주님.”

“다들 나가 있어.”

서로 눈치만 보던 사용인들은 키네시아가 괜찮다는 듯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밖으로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갔던 하인이 다시 차를 가지고 왔다.

나는 맑은 찻물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잔을 들자마자 하인이 뒤로 물러나려고 했다. 나는 질문으로 하인의 움직임을 막았다.

“너. 이름이 뭐야?”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아 줄래? 내가 지금 기분이 좀 안 좋거든.”

“아르만입니다.”

하인이 벌벌 떨자 포넨트가 어이없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야, 왜 갑자기 시비야?”

“그래, 리아. 너 이런 적 없었잖아. 괜히 트집 잡는 건 나쁜 짓이야.”

플로레타도 끼어서 나를 말렸다. 키네시아와 로그리예는 잠잠했다.

나는 만류하는 애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하인만 빤히 보았다.

내가 오래도록 시선을 거두지 않자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직감했는지 그가 딱딱하게 굳은 몸을 움츠렸다.

“공주님.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차를 들어 향을 맡았다. 여전히 조금 비리고 달콤한 향기 뒤로 싸한 냄새가 숨어 있었다.

“차가 마음에 안 드는데. 네가 선택해 봐. 다시 타 올래?”

“너 진짜 적당히 해라.”

포넨트가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아르만을 쳐다봤다.

그는 고개만 숙인 채 뒤로 물러나 있었다.

‘기어이 나한테 이걸 먹이겠다 이거지?’

좀 봐주려고 했는데. 잔을 내려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로그리예.”

“응?”

“플로레타하고 포넨트 데리고 나가.”

내 말에 포넨트가 곧장 반발했다.

“야! 너 뭐 돼? 왜 자꾸 이래라저래라야!”

플로레타는 눈치를 보다가 후다닥 몸을 움직였다. 누가 봐도 부모님께 이르러 가는 모양새였다.

눈치 빠른 로그리예가 플로레타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이, 이거 놓으세요, 로그리예 공자!”

“그래, 이거 놔! 너 언제부터 리아의 하수인이 된 거야? 내 친구잖아!”

두 사람이 반항하거나 말거나 로그리예는 둘을 단단히 움켜쥐고 문으로 끌고 갔다.

그리고 플로레타를 이용해 문을 연 뒤 나에게 잔망을 떨었다.

“나중에 뽀뽀해주기.”

뽀뽀는 무슨.

가볍게 무시하고 몸을 돌려 앞을 봤다. 키네시아가 내 옆으로 다가오는 게 느껴졌으나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아르만.”

“네, 네. 공주님.”

“뭘 받기로 했어?”

“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하인이 나를 쳐다보지도 못한 채 몸을 떨었다.

“말해 봐. 아무 대가 없이 내 찻잔에 독을 타진 않았을 거 아니야.”

하인은 말이 없었다. 그는 양손을 꼭 맞잡아 떨림을 감추더니 고개를 들었다.

발뺌할 생각인지 아무렇지 않은 척했으나 이미 표정은 경직되었고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다. 그는 키네시아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요청했으나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인은 결국 고개를 살짝 숙여 내 시선을 피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 저는 그런 적이 없어서…….”

“그래?”

“네.”

“그럼 마셔 봐.”

“……네?”

“두 번 말하게 하지 말라니까?”

하인에게 잔을 내밀었다. 그는 안절부절못한 채 제 손톱 옆의 살을 뜯기 시작했다.

“마셔.”

“저는, 저는.”

손톱 옆으로 피가 뚝, 뚝, 흘렀다.

“뭘 망설여? 그냥 달콤한 수국차인데.”

“그건…….”

“아니면 내가 마실까? 자비를 베풀어 미리 알려주는 건데, 내가 지금 이걸 마시면 너도 죽어. 네 뒤에 누가 있든지 말이야.”

“…….”

“독살을 사주한 놈에게 네가 가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위험한 일을 시키지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하인이 털썩 주저앉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다가갔다.

하인은 오한이 든 사람처럼 몸을 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물기 어린 얼굴을 보며 하인 앞에 친히 찻잔을 내려놔 주었다.

“마셔.”

그가 찻잔으로 손을 뻗었다.

하인의 손끝이 찻잔에 툭 부딪혔다. 그는 들지도 못한 채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싹싹 빌기 시작했다.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제발, 공주님, 제발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어야지.”

“그게, 죽을죄가 아니라, 그게, 그러니까.”

“아니야? 나를 죽이려고 한 게?”

눈을 홱 치켜뜨자 하인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맞, 맞습니다. 죽을죄가 맞습니다.”

“그렇지. 어딜 감히 제멋대로 감형을 하고 난리야.”

나는 찻잔을 발로 툭 차 넘어트리고 다시 의자로 돌아갔다. 삐딱하게 앉아 팔걸이에 몸을 기댔다.

하인은 여전히 엎드려 있었다.

“그래서, 뭘 받았니?”

“아버지를…….”

하인이 목이 메는지 말끝을 흐리며 고개를 숙였다.

“아버지를 받았다고?”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집이 힘들 때 게텔린 백작이…….”

그는 자신이 내뱉고도 놀랐는지 몸을 크게 움찔거리며 겁먹은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누구 짓인가 했더니 그 번쩍이는 밀가루빵 짓이었구나.

물론 그놈은 주동자일 뿐이고, 아마 회의장에서 본 번쩍이들은 거의 다 가담했을 것이다.

청혼 이야기가 퍼진 직후이니, 아미르 공작이 자기들 밥그릇에 손대는 걸 견제한 건가.

이렇게 속이 빤히 보여서야.

혀를 쯧쯧 차는데 하인이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계약이 막히고 농사가 안된 해가 있었습니다. 그때 그가 접근했습니다. 저희는 그저 곡식을 빌리고 싶었을 뿐인데 돈을 빌려줄 테니 그것으로…….”

“됐어.”

“네?”

“더 들을 필요 없다고.”

들어보나 마나 적은 돈을 빌려주고 무시무시한 이자를 요구했겠지. 그렇게 빚이 불어났고, 그걸 핑계로 저놈이 하인의 아버지를 노예로 팔거나 죽이겠다고 협박했을 것이다.

다른 곳과 계약을 할 정도면 땅의 크기가 꽤 컸을 텐데. 그게 탐나서 게텔린이 수를 쓴 것일 수도 있고.

그러니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듣는 건 시간 낭비다.

차라리 그 시간에 저놈을 어떻게 써먹을지 고민하는 게 낫다.

생각에 잠기려는데 하인이 무슨 상상을 했는지 기어와 내 발을 붙잡았다.

“살려 주세요! 시키는 일은 뭐든 하겠습니다. 제가 아니면 아버지라도, 제발 아버지라도 도와주십시오.”

“리아.”

키네시아가 옆에서 동정심 가득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발치에 매달리는 모습에 동질감이라도 느낀 모양이었다.

나는 다리를 흔들어 그를 떼어 놓는 대신 턱을 붙잡아 끌어 올렸다. 하인이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는 고양이 발바닥 밑에 깔린 생쥐처럼 떨고 있었다.

“정말 시키는 건 다 할 거야?”

“네.”

“그럼 일단 내 것이 돼.”

***

게텔린 백작은 붉은색의 푹신하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수염을 꼬며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밤이 깊어지자 슬슬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늘어지게 하품하던 그는 이내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헤 벌어진 입에서 침이 주륵 흐르려 할 때, 집사가 문을 두드렸다.

“흐억! 씁.”

게텔린 백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입가를 닦았다.

그리고 근엄한 척 표정을 굳히고는 문에다 대고 소리쳤다.

“들어와라!”

집사가 안으로 들어와 문 앞에서 비켜섰다.

그러자 뒤에 서 있던 사람의 모습이 드러났다.

후드를 깊게 써 얼굴을 꽁꽁 감춘 남자가 방 안으로 완전히 들어섰다.

게텔린은 손을 저어 집사를 내보냈다.

방 안에는 둘만 남게 되었다. 집사의 발소리마저 멀어지자 게텔린은 심기 불편한 얼굴을 숨기지 않으며 제 수염을 꼬았다.

“네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지?”

남자는 대답하는 대신 후드를 뒤로 젖히고 복면을 아래로 내렸다.

얼굴을 드러낸 것은 아르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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