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팔짱을 끼고 아미르 공작과 로그리예를 게슴츠레 노려보았다.
아직 더 지켜봐야겠지만, 둘 다 인물은 나쁘지 않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영토를 확장하려는 것을 보면 인성도 괜찮은 것 같고. 눈치도, 머리도 제법 쓸 만해 보였다.
‘결혼해서 잘만 하면 아미르 공작령을 에피파네스 영토로 수복할 수도 있겠는데?’
하지만 아미르 공작령을 가져오기 위해선 할 게 많았다.
공작의 뜻대로 왕위에 오른 뒤에 기 싸움, 머리 싸움, 수 싸움에서 이기고 그를 완전히 굴복시켜야 했다.
예전이라면 영토를 늘리기 위해 더한 짓도 했겠으나 지금은 아니다. 무엇보다 왕이 될 생각도 없었다.
역사만 바로잡고 성불할 거니까!
얌전하던 놈이 두각을 드러내면 온갖 적들이 꼬이기 마련이다.
죽기 전에도 내가 제왕적 면모를 보이자 온갖 암살 위협이 빗발쳤다.
그건 황제가 된 이후에도 이어져, 평생 두 발을 편하게 뻗고 자 본 적이 없었다.
그 짓거리를 또 하라고? 말도 안 되지.
생글거리는 로그리예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전하.”
공작에게 절절매던 룩소르가 얼굴을 활짝 펴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리아. 왜 그러니?”
“나 아직 결혼하기엔 어린데? 아무리 조혼이 풍습이라지만 10살은 좀 아니지.”
내가 불만스러운 기색을 보이자마자 안절부절못하던 플로레타가 불쑥 끼어들었다.
“맞아요. 저도 이 결혼은 반대예요. 저놈은 미친……, 으읍!”
포넨트가 플로레타의 입을 막고 자리에 앉히며 거들었다.
“나도. 그리고 조혼이 언제 적 풍습인데. 100년은 됐겠다.”
딱 집어 100년이라니. 포넨트, 은근히 예리하네.
뜨끔했지만 황제였던 경력을 살려 태연하게 앉아 있었다.
룩소르가 고민하는 표정으로 오틸리에를 보았다. 그녀까지 고개를 끄덕이자 룩소르도 정신을 좀 차린 듯했다.
“역시 안 되겠소, 공작. 혼인은 아이들이 다 크면 그때 생각해 보는 것으로 합시다.”
공작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유심히 살폈다. 분노하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철회하진 않겠습니다. 그러니 심사숙고해 주십시오, 전하.”
“알겠소.”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나 인사했다. 로그리예도 같이 일어났다.
결혼이 무효가 됐음에도 그는 실망하는 기색 없이 손을 흔들며 밖으로 나갔다.
저렇게 쉽게 포기할 거면 도대체 결혼 이야기는 왜 꺼낸 거야? 공작은 왜 설득해서 데려오고?
로그리예가 나간 문을 빤히 바라보자 포넨트가 자기 어깨로 내 어깨를 툭 쳤다.
“왜, 아쉽냐?”
아쉬운 게 아니고 수상한 거지.
나라를 집어삼킬 의도면 이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돌아가진 않을 텐데. 혹시 원하는 게 그게 아닌가?
보통 진짜 음흉한 놈이면 저렇게 대놓고 나 수상한 사람이오, 하고 다니진 않는다.
반면에 수상한 냄새를 풀풀 풍기는 놈들은 속이 쉽게 짐작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저놈은 꿍꿍이가 있어 보이는데 속을 알 수가 없단 말이야?’
이런 놈은 또 처음이라 기분이 매우 언짢았다.
나는 심각한 얼굴로 소곤거리며 이야기를 나누는 국왕 부부를 한번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기척을 느낀 왕비가 고개를 들었다.
“리아. 어디 가니?”
“로그리예한테.”
“어머.”
왕비가 즐거운 감탄사를 터트렸다.
반면에 플로레타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나를 붙잡았다.
“안 돼, 리아.”
반응이 좀 이상하다. 왜 그러냐는 눈으로 보자 그녀가 내 손을 끌어 상체를 숙이게 하고 귓가에 속닥였다.
“로그리예 공자는 무서운 사람이야. 조심해야 해.”
플로레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어린놈이 용케 눈치챘네. 잘 다듬으면 얘도 쓸 만하겠어.
기특하다는 의미로 머리를 토닥여 주었다.
그러자 그녀가 제 정수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내가 언니인데…….”
그 목소리를 뒤로한 채 밖으로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니 복도에 서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로그리예와 아미르 공작이 보였다.
부르지도 않았는데 로그리예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제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내게 다가왔다.
“나 따라온 거야? 공주님도 나랑 결혼 못 해서 서운했구나?”
“내가 싫다 그런 거거든?”
“응, 알아.”
아는 거…… 아?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는데 로그리예가 내 옆으로 바짝 붙었다.
“그런데 왜 거절했어? 트리스테를 원하는 거 아니었어?”
“4분의 1을 누구 코에 붙이라고.”
“전부 줬다가 네가 땅만 받고 나를 내치면 어떡해. 트집 잡아서 이혼한다거나, 더 필요한 놈이 나타나면 숙청해 버린다거나, 뭐 그런 거.”
“너, 제법 머리도 쓸 줄 아는구나?”
“그렇지. 새삼 매력적이야? 결혼할까?”
아직도 포기를 안 했네. 아미르 공작이야 에피파네스를 먹을 생각이라 쳐도, 이놈은 왜 나랑 결혼하려는 거지? 단순히 아버지가 시켜서?
은근슬쩍 물어보면 능구렁이처럼 넘어갈 게 뻔했다.
그래서 그냥 대놓고 물어봤다.
“나랑 결혼해서 네가 얻는 게 뭔데?”
놈이 나이답지 않게 요사스레 미소 지었다.
“이라네리아. 너를 얻잖아.”
아주 여우가 따로 없네.
내가 로그리예 녀석 또래만 되었어도 저 잔망에 홀라당 넘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내 눈에는 재롱떠는 것으로밖에 안 보였다. 아니면 속내를 감추려고 말을 돌리는 거거나.
“나를 얻어서 뭘 어쩔 건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건데?”
도무지 의중을 모르겠네. 능청스럽게 굴 때는 애 같지 않다가도 저런 말을 할 때면 제 나이 같다.
나름 황제로 지내며 이런저런 유형의 사람을 다 만나 봤다고 자부했는데…….
기가 차 웃음을 터트리다가 표정을 굳혔다.
한 가지는 정확하다. 로그리예에게서는 알아낼 게 없다.
영양가 없는 대화를 계속할 필요는 없겠다고 판단해 갈 길을 가려는데 로그리예가 천천히 내 손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러지 말고 진지하게 생각해 봐. 난 너에게 필요한 사람이니까.”
손등에 그의 입술이 가볍게 떨어졌다.
“날 곁에 둬, 공주님.”
***
“들으셨습니까? 아미르 공작이 왕가에 청혼서를 넣었답니다.”
“이라네리아 공주에게 넣었다던데요.”
“왕가와 연을 맺으려면 왕위를 이어받을 가능성이 큰 키네시아 공주와 결혼시키는 게 낫지 않습니까?”
“그렇죠. 이라네리아 공주는 세상 물정도 모르고 어리니까요.”
한참이나 귀족들 사이에서 아미르 공작가와 왕가의 결합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왕보다 더 왕 같은 번쩍이, 게텔린 백작은 오가는 대화를 듣다가 혀를 찼다.
“쯧쯧. 국가 요직에 계신 분들이 이렇게도 아둔하셔서야.”
귀족들의 시선이 게텔린 백작에게로 쏟아졌다. 그는 잠시 주목받는 느낌을 만끽한 뒤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막내 공주가 가장 예쁨받기 때문 아니겠소? 다들 이라네리아 공주의 일이라면 껌뻑 죽으니까.”
멍청한 말이었지만 주변에서는 박수갈채와 감탄이 쏟아졌다.
“역시, 게텔린 백작님이십니다.”
“아미르 공작의 의중을 정확히 관통하는 통찰력!”
안타깝게도 전혀 관통하지 못했다.
게텔린 백작의 추측은 아미르 공작의 의도와는 하등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모여 있는 귀족들 중에는 그 사실을 알아차릴 정도로 똑똑한 사람이 없었다.
세금을 내고 관직까지 세습한 지 오래되었기 때문에 돈만 있으면 노력이나 능력 없이도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다.
부를 축적해 줄 영지도 따로 있었기에 아무도 나라를 위해 일하지 않았다.
따라서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잔머리만 굴릴 줄 아는 탐욕스러운 멍청이들뿐이었다.
“정말 멋지십니다, 게텔린 백작.”
“역시 믿고 따를 만합니다.”
게텔린 백작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부를 즐겼다.
그러다 한참 뒤에야 그만하라는 둥, 너무 띄워 주지 말라는 둥 말리는 척을 했다. 그즈음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미르 공작이 왕가와 손을 잡으면 공작의 세력이 더 커지는 거 아닙니까?”
옳은 소리였지만 누구도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세력은 무슨. 왕가의 빚이 얼마인데.”
“맞습니다. 빚 갚아 주려다가 빈털터리가 되지 않으면 다행이죠.”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말을 꺼낸 사람만은 웃지 않았다.
“그 빚을 우리가 빼돌린 돈으로 갚으면 어떡합니까? 국왕이야 멍청해서 몰랐다지만 공작은 다르지 않습니까.”
그제야 웃음소리가 뚝 멎었다.
지금이야 공작과 왕가가 아무 사이 아니라 모른 척하고 있다지만 결혼으로 엮이면 말이 달라진다.
다들 제 밥그릇 빼앗길 게 걱정인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로 게텔린을 보았다.
가장 많이 탈세한 자가 그였던 탓이다. 저번 회의에서도 뻔뻔하게 사지 멀쩡한 제 딸의 이름을 팔아 세금 납부를 미루지 않았던가.
아미르 공작가와 왕실이 사돈지간이 되면 게텔린 백작과 그 일당들을 모두 정리하고 제 입맛에 맞는 자들로 내각을 꾸릴 게 뻔했다.
“이거, 생각보다 큰일이로군.”
분위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그들의 얼굴에 불안이 드리웠다.
“그럼 이제 어떡합니까?”
“국왕이 거절했다고 했으니 걱정할 필요 없을 겁니다.”
“아미르 공작이 진짜 원하는 게 있다면 한 번 거절당한 것으로 물러나겠습니까?”
“물러날 리가.”
게텔린 백작이 마지막 말에 긍정했다.
그가 다리를 덜덜 떨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머리에서 새하얀 밀가루들이 후두둑 떨어졌다.
황금색 견장을 얹은 어깨가 새하얗게 변할 때쯤, 게텔린 백작이 녹슨 머리를 굴려 대안을 하나 내놓았다.
“아미르 공작이 포기하지 않는다면 결혼을 못 하게 만듭시다.”
“역시 게텔린 백작님!”
“무슨 좋은 수라도 있으십니까?”
개기름이 번들거리는 혈색 좋은 얼굴 위로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있고말고. 아예 상대를 없애 버리면 되지 않소?”
“그러다 들키면 어쩌시려고요.”
“괜찮습니다. 멍청한 국왕이 배후를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하하!”
“맞습니다. 국왕 내외와 공주, 왕자들은 이라네리아 공주가 어떻게 죽었는지도 모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