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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6화 (16/151)

<16화>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거나 누명을 씌우라는 게 아니라, 아는 것만 이용하라는 거야.”

이 정도 했으면 대충은 알아들었겠지.

다 식어 빠진 차를 한 모금 마시고 고개를 돌리다 오틸리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아련한 미소를 띤 채, 씁쓸하고도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재미있게 속닥이니? 엄마도 끼워 주지 않을래?”

“않을래.”

내 단호한 대답에 오틸리에가 순식간에 시들어 버렸다. 키네시아가 나를 향해 눈을 부릅떴다.

뭐, 왜. 끼워 준다 그러면 말을 지어내야 하잖아, 귀찮게.

오틸리에에게 말을 거는 키네시아를 심드렁하게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마침 온실 문이 열리고 있었다.

그 너머로 우아한 은백색 빛이 번쩍거렸다.

곧 안으로 로그리예가 들어왔다. 그는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단번에 나를 찾아내더니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쟤가 여긴 왜 왔을까?’

물론 다과회에 남자 귀족도 온다. 라파일이 황후의 일을 수행했을 때는 오히려 남자 귀족이 더 많았다.

하지만 14살짜리가 자진해서 다과회에 오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무슨 목적인가 궁금해서 쳐다보는데 뭘 알아낼 틈도 없이 로그리예는 귀족들에게 둘러싸였다.

우리 집 꼬질이들이랑 어울리길래 고만고만한 놈인 줄 알았는데, 제법 인기가 많네?

나는 키네시아를 소매를 잡아당겼다.

“쟤, 네 친구라며?”

“맞아, 로그리예 아미르. 아! 그때 전해 준 연고 잘 썼어. 고마워.”

“그냥 남아서 준 거니까 감사 인사는 됐어. 그것보다 아미르 공작가는 뭐야? 처음 듣는데.”

“트리스테와 그 일대의 지방에서 영주로 군림하는 가문이야.”

“뭐?”

트리스테에 누가 영주로 있어?

거긴 에피파네스의 무역을 전담하다시피 하는 항구 도시다. 게다가 내가 얼마나 애지중지했는데.

매년 여름은 트리스테에서 보내고, 다른 놈들이 침을 질질 흘리며 노리는 걸 개고생하면서 지켰거늘!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수도 다음으로 중요한 도시를 어떤 멍청한 왕이 제 손으로 넘겼겠는가. 저건 분명 모종의 협박과 계략과 거래가 있었을 것이다.

‘왕실 기록을 흐린 눈으로 본 게 화근이지.’

미리 알았으면 아미르의 ‘아’자를 들었을 때 저 녀석 멱살을 잡아챘을 텐데!

물론 저놈의 선조가 한 일일 테지만 같은 핏줄이다 보니 곱게 보이지 않았다. 나는 못마땅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려 줄 것도 다 알려 줬으니 키네시아에게 다른 곳으로 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고민이 많아 보였다.

그래, 넌 여기서 생각 좀 정리하다가 네 엄마랑 놀아 드려라.

“난 갈래. 재미없어졌어.”

예의상 오틸리에에게 인사하고, 멀리 있는 로그리예를 지나 온실을 나왔다.

아직 할 일이 많다.

재정 상태도 파악하고, 국제 정세도 파악해야 하고, 외국이 내정에 얼마나 간섭하고 있는지도 알아봐야 했다.

죽어서는 좀 쉬나 했더니……, 어째 더 바쁜 것 같다.

“어휴.”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악! 깜짝아.”

로그리예가 얼굴을 불쑥 내밀며 생글거렸다.

아니, 죽은 건 난데 왜 자기가 유령처럼 다니고 난리야!

매서운 눈초리에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무겁다, 이놈아.

툭 쳐내자 이번엔 한쪽 팔이 꿰였다.

팔짱을 끼는 게 아주 자연스러웠다. 친구 동생을 대하는 것 치고는 지나치게 친근한데.

‘혹시 몸 주인의 약혼자인가?’

왕가의 식구는 태어나기 전부터 약혼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만약 그가 몸 주인의 약혼자라면 처음 봤을 때 보인 반응도 설명이 된다. 지금처럼 자연스러운 접촉도 마찬가지고.

물어서 확인하는 건 쉽다. 다만 내가 약혼자를 기억하지 못하는 걸 이놈이 수상하게 여길지 모른다.

키네시아와의 대화도 들었는지 아닌지 헷갈리는데 단서를 더 줄 필요는 없다.

이럴 땐 떠보는 게 최고지.

최대한 가볍게 묻자. 정색하거나 수상하게 여기면 농담이라고 뻗댈 수 있을 정도로만.

“왜 이렇게 치대? 네가 내 약혼자라도 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의 얼굴이 활짝 피어났다.

“그럴까? 약혼하고 싶어? 할래? 난 좋아.”

약혼자는 아니었군. 그런데 이상하다. 맥락이 왜 저렇게 흐르지?

‘약혼자라도 돼?’라는 말 어디에 ‘너와 약혼하고 싶다.’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고.

100년 사이에 그런 유의 관용구가 생기기라도 했나?

생겼을 리가 없지.

차갑게 식은 눈으로 쳐다보든 말든 로그리예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내 손을 꼭 잡았다.

“아직 어리니까 조금 더 기다리려고 했는데, 공주님이 그렇게 생각해 줄지 몰랐어.”

그러니까 뭘.

“지금 당장 가서 말할까? 약혼? 아니면 결혼?”

미친 건가……? 맞다. 미친 거였지.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없어서 고개를 젓고 몸을 돌렸다.

그러자 어깨와 등에 제법 묵직한 게 얹어졌다.

로그리예가 매달린 모양이다.

“결혼하자, 공주님. 내가 잘해 줄게. 응? 하자. 하자아, 결혼.”

로그리예가 몸을 흔들고 말꼬리를 늘리며 졸라 댔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시야가 흔들리는 게,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정색하며 그의 팔을 치워 내려는데,

“내가 공작이 되면 트리스테도 공주님에게 줄게. 그러니까 결혼하자, 응?”

순간 발이 우뚝 멈췄다.

“영토를 넘긴다고?”

“네가 원한다면.”

어린놈이 제법 달콤하게 웃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는 ‘영’, ‘토’. 이 두 글자밖에 들어 있지 않았다.

잠깐 혹했으나 고개를 세게 가로저어 정신을 차렸다.

눈 돌아가는 줄 알았네.

넘어가지 말자. 무슨 속셈일 줄 알고. 약혼자 소리가 나오기 무섭게 달려드는 것만 봐도 분명 이상한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완전히 거절하진 말까?

솔직히 트리스테, 탐 나잖아.

원래 내 거였고!

‘그래. 그러자.’

결심이 서자마자 나는 최대한 목소리를 부드럽게 냈다.

“로그리예. 순서가 잘못됐어.”

“순서?”

“그래. 영토를 먼저 바치고 청혼을 해야지.”

“아!”

로그리예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씩 웃는 모습이 여전히 미친놈 같아 조금 불안하긴 하지만, 그래도 어린애가 뭘 어쩌겠어.

아미르 공작도 언제 망할지 모르는 나라의 공주와 제 아들을 덜컥 결혼시키겠다고 하진 않겠지.

그것도 땅을 바치면서 말이야.

그래, 그런 몰상식한 인간이 세상천지에 어디 있겠어?

***

“여기 있네.”

“하하. 뭐라고 하셨습니까, 공주님?”

로그리예와 똑 닮은 생김새의 남자가 나를 보며 사람 좋게 웃었다.

“아무것도.”

한숨을 내쉬고 싶은 걸 꾹 참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미르 공작의 시선은 금세 맞은편에 앉은 국왕 룩소르에게로 돌아갔다.

왕비 오틸리에와 머리를 맞대고 청혼서를 읽던 룩소르가 멍하니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혼인하는 대가로 트리스테의 4분의 1과 영지의 일부를 내어 주겠다고?”

“그렇습니다, 전하.”

룩소르가 멍청한 얼굴로 어버버거렸다.

“어째, 어째서. 아니, 물론 우리 리아가 착하고 사랑스럽고 똑 부러지고 귀엽긴 하지만, 그래도, 그래도 영토를…….”

굉장히 주관적이고 듣기 민망한 평가가 줄줄이 쏟아졌다.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어린애들이 다 있는 앞에서 대놓고 나를 추켜세워서가 아니다. 저건 나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이 몸의 주인에 대한 칭찬이니까.

그냥 내 후손이 저렇게 팔불출이라는 게 창피했다.

한숨을 내쉬며 손바닥에 얼굴을 묻는데 웃음소리가 들렸다. 손가락 틈으로 앞을 봤다.

무릎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괸 채, 로그리예가 나를 보고 있었다.

샐샐 웃는 그를 향해 상체를 조금 숙였다. 그러자 그도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나는 입술을 최대한 움직이지 않으며 속삭였다.

“이 미친놈아. 도대체 공작을 어떻게 구워삶은 거야?”

“응, 나도 사랑해.”

“어떻게 구워삶았냐고.”

“진실한 사랑의 힘으로?”

말이 안 통하네.

기가 차 빤히 쳐다보자 그가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플로레타가 기겁을 하며 나를 끌어당겼다. 동시에 포넨트가 황급히 내 눈을 가렸다.

등받이에 편안하게 기대는데 포넨트가 아르릉거리는 게 들렸다.

“내 동생한테 들이대지 마라.”

아무리 봐도 불한당에게서 동생을 지키는 믿음직스러운 오빠의 모습이다.

키네시아가 오기 전 날에 삐졌던 건 잊은 모양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로그리예는 속 긁는 소리를 했다.

“안 들이대고 결혼만 하는 건 찬성이야?”

“한동안 잠잠하더니 왜 그래? 미친 거야?”

아웅다웅하는 둘을 보는데 룩소르의 목소리가 귀에 확 꽂혔다.

“영토를 받는 건……. 부담스럽소, 공작. 우리 사정을 알지 않소. 내가 잘 이끌 수 있을지…….”

어휴, 답답아. 아무리 자신 없어도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영토를 가진 귀족들은 적이다.

신하를 자청하고 있지만 언제 치고 올라와 목을 노릴지 모른다.

특히 저렇게 좋은 땅을 가지고도 바짝 엎드려 있는 놈들은 더더욱 경계해야 한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바로 이 나라를 집어삼키려고 할 테니까.

‘그거구나.’

이제 알겠네. 아미르 공작은 나와 로그리예를 결혼시킨 뒤, 나를 왕위에 올려 실권을 쥘 생각인 것이다.

그렇게 천천히 흡수하면 피를 흘리지 않고도 에피파네스의 영토를 손에 넣을 수 있다.

그런 계획이어야 영토를 넘기는 게 말이 된다.

살을 주고 뼈를 취할 생각인 거지.

‘이래서 실실 웃는 놈들은 조심해야 한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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