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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5화 (15/151)

<15화>

공부하던 키네시아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대충 눈짓으로 인사하고 다가가 책을 들춰 봤다.

그녀는 룩소르나 볼 법한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군주의 도리? 이런 책 봐서 뭐 해.”

혀를 쯧쯧 찼더니 키네시아가 책을 제 쪽으로 끌어가며 변명했다.

“제왕학 기본서야.”

“기본서를 아직도 봐?”

“계속 읽는 거야. 마음에 새겨서 좋은 왕이 되려고.”

“기특하긴 한데, 저런 도움 안 되는 책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

나는 키네시아의 손에서 책을 빼앗았다. 키네시아가 책을 다시 가져가기 위해 움직였다. 나는 그녀의 손을 피하며 탁 소리가 나게 책을 덮고 뒤로 휙 집어 던졌다.

키네시아가 벌떡 일어났다.

“책을!”

“됐고, 따라와.”

키네시아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책을 향해 아련하게 손을 뻗었다. 나는 그대로 그녀의 옷을 붙잡아 홱 끌었다.

한동안 말이 없던 그녀는 1층으로 내려오고 나서야 행선지를 물었다.

“어디 가는데?”

“오늘 왕비가 다과회를 연다던데. 거기 가려고.”

말하자마자 키네시아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냥 끌고 가려는데 힘주어 잡아당겨도 키네시아가 딸려오지 않았다.

어쭈?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보자 키네시아가 차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군주의 도리보다 중요한 게 다과회야?”

집안 형편이 좋지 못한데 사치하게 해 달라고 떼쓰는 혈육을 보는 듯한, 저 경멸 어린 눈은 뭐지?

기분이 심히 언짢은데.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완전히 몸을 돌려 키네시아와 마주 섰다.

일단 그녀의 옷을 놔주었다. 그리고 주변에 누가 없는지 확인한 뒤, 고개를 숙여 보라고 손을 까딱였다.

키네시아가 한숨을 푹 내쉬며 허리를 숙였고,

“윽!”

나는 동그란 이마에 딱밤을 놔주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깔을 불손하게 떠?”

키네시아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여전히 눈빛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아직 어린 녀석이니 눈은 찌르지 말고 봐줘야지.

“너 무도회나 다과회, 사냥대회 그런 거 싫어하지?”

“당연하잖아. 쓸데없이 국고를 털어 가면서 시간을 낭비하고 사치하는 건데.”

“아무것도 건지지 못하면 그렇지.”

다시 몸을 돌렸다. 이번엔 옷깃을 질질 잡아끌지 않아도 키네시아가 내 뒤를 따라왔다.

온실 근처로 가자 서 있던 하인이 문을 열어 주었다.

고여 있던 말과 웃음소리가 문틈으로 왈칵 쏟아졌다. 동시에 옆에서 키네시아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의연한 척하고 있었지만 키네시아의 손에는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리아, 키네샤.”

오틸리에 왕비가 반갑고도 온순한 목소리로 나와 키네시아를 불렀다. 동시에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각자의 테이블에 앉아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사람들이 일순 입구를 돌아봤다.

키네시아의 오른발이 뒤쪽으로 빠졌다.

나는 귀족들을 바라보며 키네시아의 뒤꿈치를 툭 차 원래 자리로 돌려놨다.

“고개 들고, 어깨 펴. 아랫것들한테 약한 모습을 보일 거야?”

“아랫것?”

키네시아가 놀란 눈으로 나를 돌아봤다.

가엾게도 회의장에서 봤던 번쩍거리는 놈들에게 무시당하느라 귀족을 제 신하라고 여겨 본 적이 없는 모양이었다.

“네가 왕이 되면 부려야 하는 놈들인데 그럼 윗것이겠어?”

가볍게 응수한 뒤 왕비에게 다가갔다.

우울했던 오틸리에 왕비의 얼굴이 밝아졌다.

4인용 원형 테이블 10개는 이미 만석이었다. 어떤 테이블은 의자를 추가해 5명이 둘러앉아 있었다.

하지만 오틸리에는 혼자였다.

“흠.”

나는 주변을 쭉 훑어봤다.

‘여긴 꼬질이가 없네.’

다들 번쩍번쩍하고 입가에는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노골적인 조롱이 섞여 있어서 전혀 친근해 보이진 않았지만 말이다.

부채로 입을 가리고 속닥거리다가 웃음을 터트리는 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을지 듣지 않아도 훤했다.

나는 오틸리에 옆에 앉았다.

겸사겸사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바들거리고 있는 키네시아도 자리에 앉혔다.

오틸리에가 씁쓸한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너희가 여긴 어쩐 일이니?”

키네시아는 허벅지 위에 주먹을 올려 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고개 숙이지 말라니까. 말을 안 듣지.

혀를 쯧쯧 차고 입을 다문 키네시아를 대신해 대답했다.

“그냥. 어른들 어떻게 노는지 보려고.”

하인이 차를 가져왔다.

다른 테이블에 앉은 귀족들은 어느새 내게 관심을 끄고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그들을 빤히 보는데 키네시아가 속삭이며 말을 걸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가볍게 웃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귀족들을 조금 더 지켜보다가 찻잔을 내려놓고 키네시아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아까 딱밤을 맞은 것 때문인지 그녀는 오히려 몸을 뒤로 뺐다.

그냥 알려 주지 말까 하다가 손을 뻗어 키네시아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그녀의 상체가 옆으로 기울었다. 나는 가까워진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봐 봐.”

“뭘?”

“왕비가 주관한 다과회에 와서 왕비 근처에는 아무도 앉지 않았어. 왜 그럴까?”

“무시하는 거잖아.”

“뭐, 그런 의도가 없다고 볼 순 없지만.”

저들은 오틸리에를 무시하기 위해 다과회에 참석한 게 아니다.

나는 꽉 말아쥔 키네시아의 손등을 가볍게 찰싹 때렸다.

“키네시아, 흐름을 봐.”

겉보기엔 서로 하하 호호 웃고 있으나 무리는 둘로 나뉘어 있었다. 두 무리 사이에는 대화도 거의 없었다.

중심에 있는 것은 딱 봐도 부유해 보이는 귀부인들이었다.

“저들은 서로에게 책잡히지 않으려고 온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국왕 부부는 쭉정이, 속 빈 마카롱, 빛 좋은 개살구다.

저들은 대충 형식만 갖출 뿐 국왕 부부의 명예나 체면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국왕 부부 역시 무시당한 것으로 트집을 잡을 성품이 아니다. 그럴 만한 권위도 없었다.

그러니 만약 사교계를 누구 하나가 지배하고 있었다면 왕비의 다과회는 파리만 날아다녔을 것이다.

하지만 경쟁자가 있다면? 말이 달라진다.

왕비의 다과회에 고의로 불참했다는 것만으로도 상대에게 꼬투리를 잡힐 수도 있다.

거기까지 이야기해 주었지만 키네시아는 그게 뭐 어떻냐는 식이었다.

“게텔린 백작 부인과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사이가 안 좋은 건 다들 아는 사실이야.”

“그 말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어?”

“무슨 생각이……, 들어야 해?”

농담하는 건가 싶어 쳐다봤다. 놀랍게도 그녀는 진실만 말하고 있었다.

과연 룩소르의 딸답군.

나는 깔끔하게 포기하고 턱짓으로 귀족들을 가리켰다.

“그럼 저걸 보면?”

다들 자신이 줄을 대고 있는 부인에게 아첨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간혹 상대편을 아닌 척 힐난하기도 했다.

“……비굴해 보여.”

“네 감상 말고.”

답답하다, 답답해.

입에 넣어 주면 알아서 씹어 삼킬 줄 알았는데. 이건 무슨, 내 손으로 턱도 움직여 주고, 목덜미도 문질러 삼키는 것까지 도와주어야 할 판이니.

“대화에 집중하면서 표정을 봐. 그러면 저 사람의 호불호를 알 수 있지. 더불어 적도.”

“나도 아첨하라고?”

잊지 말자. 삼키는 것까지 도와주기.

“좋아하는 걸 알면 거래를 할 수 있고, 싫어하는 걸 알면 해를 끼칠 수 있지. 그리고 적을 알면,”

말을 하려는 순간 귀부인이 다가왔다.

“저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전하.”

“네페르트 후작 부인, 자리를 빛내 주어 고마워요. 조심히 돌아가세요.”

그녀는 별 감흥 없는 눈으로 나와 키네시아, 오틸리에를 쓱 훑고는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리고 자리를 뜨기 전, 못마땅한 눈으로 게텔린 백작 부인을 흘겨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네페르트 후작 부인이 떠나고 나자 수많은 귀족이 왕비에게 대충 절을 하고 그녀를 따라나섰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말을 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놈을 편하게 조질 수 있어.”

키네시아의 눈길이 네페르트 후작 부인의 뒷모습으로 향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 이거야?”

“아군은 무슨. 뭘 안다고 아군이래. 손 안 대고 코 풀고 싶을 때 쓰라는 거지.”

키네시아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연회나 다과회, 그 외에도 귀족이 많이 모이는 곳은 정치 흐름의 축소판이야.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걸 알 수 있어.”

키네시아의 시선이, 여전히 모여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의 입으로 향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키네시아에게 속삭였다.

“누가 누구와 앙숙인지, 혹은 친밀한 관계인지, 웃는 얼굴을 맞대고 등 뒤에 칼을 숨기고 있을지. 그걸 파악하는 거야.”

“그래서?”

“그 정보로 정적을 제거하는 거지. 가장 좋은 방법은 네 손을 쓰지 않는 거고.”

“이간질이라도 하라는 거야?”

“필요하다면.”

“그건 너무 비열하잖아.”

“네가 겪은 치욕은 정당하고?”

키네시아가 한 대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침묵했다. 황금빛 눈동자는 조금 혼미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만도 하다. 내가 한 말은 그녀가 옆구리에 끼고 다니던 ‘군주의 도리’ 따위와는 다를 테니까.

하지만 이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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