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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4화 (14/151)

<14화>

나는 룩소르가 난감해하는 이유를 금세 알아차렸다.

회의는 보통 군주의 집무실에서 진행된다.

나라마다 문화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보통 왕의 집무실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

운이 좋아 들어갈 자격을 얻었다 하더라도 왕의 허락 없이는 의자에 앉을 수조차 없는, 그런 숨 막히는 곳이었다.

게다가 내가 들어온 몸은 왕가의 직계 혈족이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후에 대립하는 세력이 될지도 모르니 경계하는 거겠지.

어떤 말로 구워삶을지 고민하는데 룩소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빠는 재무 회의에 가는 중이란다. 리아가 못 알아듣는 소리만 해서 따라가도 지루할 텐데, 괜찮겠느냐?”

난감한 티를 낸 게 내가 지루해할까 봐 그런 거였어? 나를 견제한 게 아니라?

……아무래도 내가 룩소르를 과대평가한 모양이다.

“상관없어.”

“아빠랑 많이 같이 있고 싶은 게로구나! 좋다. 함께 가자.”

룩소르가 싱글벙글 웃으며 내 손을 잡고 집무실로 향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며 붙잡힌 손을 슬쩍 빼냈다. 그리고 귀족들을 쭉 둘러보았다.

꼬질이와 번쩍이가 대충 2대 8의 비율로 섞여 있었다.

나는 번쩍이들의 개기름 흐르는 얼굴을 머릿속에 넣어 두며 룩소르의 옆에 섰다.

‘저것들이 대대로 나랏돈을 해 처먹은 놈들이겠군.’

내가 황제였으면 가만두지 않았을 텐데.

성질부리고 싶은 것을 참기 위해 심호흡하는데 몸이 붕 떠올랐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룩소르의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딸을 무릎에 앉히다니! 이런 위엄 없는 왕을 보았나!

잔소리가 튀어나오려는 입술을 꾹 다물며 그의 무릎에서 내려왔다.

“왜 그러니, 리아?”

동년배 무릎 위에 앉아 있을 순 없지. 황제 체면이 있는데.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 하인에게 손을 까딱였다.

하인은 내 손짓을 알아듣지 못했는지 고개를 앞으로 뺀 채 눈만 껌뻑였다.

“의자.”

“아, 예!”

하인이 품위 없이 후다닥 달려가더니 어린이용 의자를 가져왔다.

나는 깜찍한 크기에 요란한 색으로 치장된 의자를 보며 애써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한숨 쉬지 말자. 한숨 쉬지 마.

속으로 나를 다독이고 작은 의자에 앉았다. 고개를 돌리자 룩소르의 시무룩한 얼굴이 보였다.

애지중지하는 막내딸이 무릎에 앉는 걸 거부한 게 서운한 모양이었다.

내 알 바가 아니기에 눈짓으로 빨리 회의나 하라고 종용했다.

룩소르와 함께 온 꼬질이가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팔짱을 끼고 회의 돌아가는 꼴을 보는데 한 놈이 갑자기 눈물을 흘려댔다.

“전하. 세금 납부 기한을 조금만 더 미뤄 주십시오.”

저건 또 뭔 개소리야?

어이가 없어 우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밀가루를 들이부었는지 새하얘진 머리카락이 보였다. 그 위에 진주 가루까지 뿌렸는지 아주 번쩍번쩍했다.

콧수염은 끝을 바짝 말아 올려 멋을 냈고 눈썹도 단정했다.

리본이나 레이스도 제대로 각을 잡아 둔 것이 옷차림에 매우 신경을 쓴 것 같았다.

왕관이 없는데도 룩소르보다 더 왕처럼 보일 정도이니, 말 다 했지.

“게텔린 백작. 이미 저번에도 미루지 않았습니까?”

꼬질이 중 하나가 맥아리 없는 목소리로 반박했다. 하지만 번쩍이는 놈은 똑똑하게도 마음 약한 결정권자인 룩소르를 보며 변명했다.

“딸아이가 병에 걸리는 바람에……. 거기다 약으로 쓰이는 식물이 워낙 구하기 힘들고 비싸서 가문이 파산 직전입니다, 전하.”

무슨 소리야. 머리 위에 쓰고 있는 것만 떼다 팔아도 파산은 면하겠는데.

억지로 속아 줘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저런 뻔한 거짓말에 넘어갈 리가 없……,

“사정이 그렇게나 안 좋단 말이오? 괜찮소. 딸이 아프면 응당 그래야지!”

없어야지, 룩소르야.

뒷골이 당겨 깊게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더 있다가는 화병으로 쓰러지든지, 옆에 있는 화병을 던져 저 번쩍이는 놈을 쓰러트리든지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황제는 속내를 함부로 보이지 않는 법. 참자, 참아.

‘게텔린 백작이라고 했지.’

좀 더 알아봐야겠다.

권력 구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게텔린 백작이 외부 세력과 결탁하진 않았는지, 그런 것 말이다.

저택에 잠입해야 하나? 아니면 사람을 포섭해?

저놈에게 알감자처럼 딸려 있을 것들을 생각하니 두통이 일었다.

“리아. 머리가 아픈 게냐?”

“응.”

“리아가 아프다는데 아빠가 일만 하고 있을 순 없지.”

딸이 아프든 말든 국정은 돌봐야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왕이 이런 정신머리를 가지고 있다니.

이마를 짚자 룩소르가 나를 안아 들었다.

“그럼 오늘 회의는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소.”

그의 말이 끝나자 행정관이 회의 종료를 알렸다.

정말? 그냥 이렇게 끝난다고?

설마. 아니겠지. 라는 생각이 끝났을 때, 나는 이미 룩소르에게 들린 채 복도를 지나고 있었다.

순식간에 진행된 일에 멍하니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그의 품을 벗어났다. 버둥거리던 양발이 땅에 닿자마자 뒤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전하!”

아까 룩소르를 회의실로 데려갔던 꼬질이가 달려오고 있었다.

“재상, 왜 그렇게 뛰시오. 그러다 숨넘어가겠소.”

“전하. 이렇게 회의를 끝내시면 안 됩니다.”

“하지만 리아가…….”

꼬질이, 아니, 재상이 나를 힐끔 보더니 룩소르의 곁으로 바짝 붙어 섰다.

“공주님을 보십시오. 괜찮아 보이시지 않습니까. 분명 지루해서 그런 말씀을 하신 걸 겁니다. 그런데 회의장을 박차고 나오시다니요. 설사 진짜 아프다고 하시더라도 회의가 먼저입니다.”

자기 딴에는 어린 공주가 상처받을까 봐 안 들리게 말한다고 한 것 같은데, 다 들린다.

하지만 전적으로 동감하는 바였다.

애는 왕이 아니라도 돌볼 사람이 많지만, 나라는 군주가 아니면 돌볼 사람이 없다.

나는 안 들리는 척 눈을 깜빡이며 두 사람이 속닥거리는 소리에 집중했다.

“어차피 더 나눌 안건도 없지 않소.”

“없긴 뭐가 없습니까! 아직 국가 부채에 대한 게 남아 있습니다.”

부채가 있구나. 하긴, 궁전이 이 모양인데. 없는 게 더 이상하지.

“화재의 원인도 조사하라고 명령하셔야죠.”

거의 2주나 된 일을 여태껏 조사도 안 하고 내버려 뒀단 말이야?

나도 모르게 룩소르를 쳐다봤다.

그도 자신이 좀 심했다는 걸 인지했는지 헛기침만 해 대고 있었다.

“어흠. 크흐흠!”

“그러고 보니 샹들리에에 달린 수정을 판 돈! 그 돈에 손대지 말라고 제가 누누이 말씀드렸는데!”

“그건…….”

룩소르가 은근슬쩍 재상의 눈을 피했다.

설마 도박이라도 했나? 만약 그런 거면 당장 룩소르를 끌어내리고 키네시아를 왕으로 세울 생각이었다.

그리고 너는 죽은 목숨이다, 룩소르야.

나랑 함께 성불하는 거야.

가만히 노려보고 있는데 재상의 입에서 나온 건 전혀 다른 말이었다.

“또 백성들에게 푸셨습니까?”

“가뭄이 심하지 않았소.”

“재난이 있을 때마다 다 퍼주시면 궁전은 어떻게 유지합니까?”

“그래도 백성들을 어떻게 외면한단 말이오.”

그래서 광장에 나가 봤을 때 사람들 표정이 그렇게 밝았구나.

참. 애가, 참. 착한데…….

착한 것 말고는 재능도 복도 없는 모양이다.

조금만 강단 있고, 비정하고, 뒷배가 있었다면 나처럼 성군이 되었을 텐데.

안타까운 마음에 혀를 쯧쯧 차는데 룩소르가 목을 가다듬고 다시 속닥거렸다.

“어차피 회의한다고 당장 해결될 문제가 아니지 않소.”

“그래도 타국에 다녀온 공주님께 부끄럽지 않으시려거든 뭐라도 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세금 미납은 지금 당장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조금 더 독촉하셔야 합니다.”

“하지만 백작의 딸이 아프다고 하지 않소.”

아이고, 답답아!

바싹 마른 식빵을 억지로 목구멍에 욱여넣은 것처럼 숨이 턱 막혔다.

재상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제 가슴을 퍽퍽 내리쳤다. 갈비뼈가 부러지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렸다.

자기가 때려 놓고도 아픈지 재상이 심장을 부여잡았다.

조금 멍청해 보였으나 의미 있는 희생이었기에 모른 척해 주었다. 대신 손짓으로 룩소르를 불렀다.

“왜 그러느냐, 리아야?”

룩소르가 다정한 낯으로 몸을 숙였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딸이 아파서 진짜 걱정되면 그렇게 치장할 시간이 있었겠어? 머리에 밀가루를 하도 많이 뿌려서 그대로 오븐에 넣으면 식빵이 돼서 나오겠더구만!”

재상과 룩소르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룩소르의 옷깃을 붙잡은 채 앞뒤로 짤짤 흔들었다.

“빨리 가서 돈 받아 와!”

룩소르가 당황하며 나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리아야,”

“가! 안 가?”

엉덩이를 걷어차서 내쫓고 싶은 것을 참으며 호통쳤다.

룩소르가 충격받은 얼굴로 굳었다. 재상이 국왕을 질질 끌고 가며 나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고생이 많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준 뒤 몸을 돌렸다.

‘가능하면 룩소르도 좀 손봐서 써먹어 보려고 했는데 안 되겠네. 가망이 없어.’

키네시아에게 집중하자.

결심하고 곧장 키네시아의 방으로 가서 문을 열어젖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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