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키네시아는 당연히 황제가 요르고스와 그 일행들의 만행을 모를 거라 여겼다. 제국의 지배자가 신경 쓰기엔 너무 사소한 일이니까.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황제가 묵인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건, 어렵게 그를 마주했을 때였다.
키네시아는 우연히라도 황제와 마주치기 위해 아무리 아프고 힘들어도 연회와 만찬에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리고 드디어 그와 마주했고, 힘겹게 사실을 알리려 했다.
“폐하, 에피파네스의 공주 키네시아 벨로아스라고 합니다. 드릴 말씀이…….”
하지만 황제는 그녀가 본론을 꺼내기도 전에 마치 오물을 밟은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경멸 어린 시선과 마주한 키네시아가 굳어 있는 사이 황제는 자리를 떠났다. 그 모습을 궁 안의 사람들이 모두 보고 있었다.
시선이 화살처럼 키네시아를 꿰뚫었다.
비웃는 소리, 자신을 훑어보는 수백 개의 눈.
그녀는 난생처음 사람들의 시선에 두려움을 느꼈다.
도무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다. 키네시아는 힘 빠진 다리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이제 어떡해야 하지……?’
황제가 묵인하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해진 뒤로 키네시아가 먹는 음식이 변하기 시작했다.
이가 나가고 곰팡이 핀 나무 그릇에 가축들이나 먹을 법한 것을 담아, 하인은 키네시아의 앞에 버리듯 두고 갔다.
조롱도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왕은 또 어떻고. 배알도 없이 실실 쪼개잖아.”
“그래도 왕비는 좀 예쁘던데? 야. 네 첩으로나 삼으면 딱이겠더라.”
“좋네. 키네샤, 에피파네스에 편지라도 써 보는 건 어때? 아주 더러운 꼴을 당했다고.”
“그래, 일러바쳐. 네 아비가 뭐라고 불만스러운 말이라도 해야 그걸 빌미로 우리나라가 침략이라도 할 거 아냐.”
키네시아가 아무리 똑똑하다 한들 11살이었다.
그녀는 국제 정세 같은 것은 몰랐다.
그녀가 아는 것이라고는 본국인 에피파네스가 파라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하고 나약하다는 것.
자신이 참지 못하면 어머니와 아버지가 곤란해진다는 것.
그리고 이 치욕을 제 동생들이 겪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전쟁이라도 벌어지면?’
그녀는 파라돈으로 오는 길에 본 에피파네스의 풍경을 떠올렸다.
룩소르는 수도뿐만이 아니라 모든 영토를 신경 쓰는 왕이었으나 국경 지대에서 벌어지는 잦은 약탈과 침략을 막을 힘은 없었다.
군사의 수가 터무니없이 모자란 탓이었다.
어떤 이는 무너진 집 앞에서, 어떤 이는 난데없는 습격으로 죽은 가족을 끌어안고 울었다.
안 그래도 나라가 약소하다는 이유만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이다.
그들이 인내심 없는 공주 때문에 땅을 빼앗기고 집과 가족을 잃게 만들 순 없었다.
키네시아는 참고 또 참았다.
3년. 3년만 버티면 된다.
옷이 찢기고, 머리카락을 뜯기고, 괴롭힘의 흔적이 사라질 날이 없었다.
그래도 3년이 지나면 내 나라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갈 것이다. 지금의 괴로움은 모두 잊고 지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희망은 돌아가기 일주일 전,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지금, 뭐라고 했습니까?”
“이게 말귀도 못 알아듣네.”
파라돈의 황자가 낄낄거리며 키네시아의 걷어차 넘어트렸다.
“우리도 같이 간다고. 에피파네스로.”
“야. 쟤 얼빠졌는데?”
“키네샤. 너무 좋아하는 거 아니야?”
난폭한 웃음소리가 귓가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그들은 곧 자기들끼리 왕족을 노예로 부리겠다느니, 민가를 불태우겠다느니 하는 질 나쁜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들의 말은 점점 더 저열하고 더러워졌다. 키네시아는 구역질이 치미는 것 같았다.
더는 가만히 듣고 있을 수가 없었다. 분노로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자마자 키네시아는 악을 쓰며 달려들었다.
“그 입 닥쳐!”
쌓였던 분노가 한순간에 폭발했다.
그러나 3년을 참아 온 감정은 너무나 처참하고 손쉽게 제압당했다.
팔다리가 붙잡히고 어깨가 짓눌려 꿇어앉아야만 했다. 곧 커다란 손바닥이 관자놀이에 벼락처럼 내리꽂혔다.
그 뒤로는 몸을 웅크리기 급급했다. 무수히 많은 발길질이 쏟아졌다.
“귀엽다, 귀엽다, 해 주니까 기어오르긴.”
요르고스가 쓰러져 있는 키네시아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어 들어 올렸다.
“이게 네 위치야. 잘 새겨 두라고.”
사람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키네시아는 혼자가 되었다.
무력함, 모멸감, 분노, 치욕.
한꺼번에 몰려든 감정들은 웅덩이에 버려져 뒤섞인 음식물처럼 악취를 풍겼다.
그리고 그녀는 그 위에 누워 있었다.
고통이 썩은 내처럼 주변을 맴돌며 숨에 섞여들었다.
모욕과 폭력이 다시 한번 그녀의 뇌리를 점령했다. 하지만 그것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자신이 두려움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녀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겁쟁이가 되어 있었다. 스치듯 들리는 풀벌레 소리에도 움찔거리며 웅크릴 정도로.
“흐윽, 흑…….”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숨죽여 우는 것밖에 없었다. 무력감이 몸을 짓눌렸다.
제 나라가 조금만 더 유복했더라면, 조금만 더 부강했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다시는 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까? 이 수치스러운 두려움을 어떻게 이겨 낼 수 있을까?
시간이 흐를수록 몸은 점점 움츠러들었다.
그때, 어디선가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괜찮으십니까?”
키네시아가 화들짝 놀라며 다리로 땅을 마구 밀어 뒤로 물러났다.
고개를 들자 후드를 깊게 눌러 쓴 남자가 보였다.
“누구시죠?”
얼굴을 반쯤 가린 천 밑으로 붉은 입술이 가느다랗게 휘어지는 게 보였다.
남자는 후드를 뒤로 넘기며 그녀 앞에 앉아 눈을 맞췄다.
손을 뻗자 흐리고 창백한 보랏빛이 흘러나와 키네시아의 몸을 감쌌다. 고통과 수치심이 꿈결처럼 사라졌다.
키네시아는 말끔해진 제 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언뜻,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한 순간. 남자가 물었다.
“괴로운가 보군요.”
그녀는 얼굴을 가린 손을 천천히 내리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해도 달도 뜨지 않은 날. 밤과 낮 그사이 어느 시간에 서서, 남자가 붉은 입술을 달싹였다.
“제가 도와 드리겠습니다.”
꿈결 같은 음성 사이로 현실의 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군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키네시아는 회상에서 벗어나며 꿈에서 깬 사람처럼 벌떡 몸을 일으켜 세웠다.
“들어와.”
대답 대신 문이 열렸다.
엉망인 꼴을 감추려던 키네시아는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을 확인하고 긴장을 내려놓았다.
로그리예가 인사도 없이 성큼성큼 다가와 대뜸 물었다.
“공주님 다쳤던데. 누가 그런 거야?”
“너는 3년 만에 만나자마자 묻는다는 게…….”
“잘 지냈어, 키네샤? 돌아와서 기쁘다. 그래서 누가 그런 건데. 혹시 너야?”
로그리예가 전혀 기쁘지 않은 표정으로 빠르게 안부 인사를 해치운 뒤, 키네시아를 추궁했다.
말을 이을수록 그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아니어야 할 거야.”
묘하게 굳은 미소에 키네시아는 어쩐지 등골이 오싹해졌다.
“파라돈의 황자와 다툼이 있었어.”
“그래?”
로그리예가 가볍게 대답하고는 키네시아의 발치에 앉았다.
궁금증이 해소되고 나자 그는 언제 무서운 기운을 풍겼냐는 듯 평소처럼 미소 지었다.
“알려 줘서 고마워.”
그리고 미련 없이 몸을 돌려 방을 나갔다.
키네시아는 저도 모르게 몸을 반쯤 일으켜 굳게 닫힌 방문을 보다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리아를 대하는 로그리예의 태도가 유별난 건 알았지만 오늘은 어째 정도가 더 심한 듯했다.
‘리아 몸에 있는 건 다른 사람인데…….’
양심이 따끔거렸다. 그녀는 한숨을 삼키고 자리에서 완전히 일어났다.
그 김에 씻고 나와 옷을 갈아입었다.
침대에 누워 잠이라도 청하려는데 다른 방문자가 찾아왔다.
“공주님. 막내 공주님이 전해 드리라고 하신 게 있어서요.”
하녀가 들어와 키네시아에게 연고를 건네주고 나갔다.
키네시아는 혼자 남아 연고 통을 만지작거리며 이라네 황제를 떠올렸다.
‘나쁜 사람은 아닌가 보네.’
통을 열어 상처에 연고를 올리자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곧 옅은 청보랏빛이 감돌다가 상처 안으로 흡수되었다.
언젠가 느껴 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뒷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에 그녀는 손등으로 연고를 문질러 닦았다.
상처가 있어야 할 자리에는 이미 새살이 돋아 있었다.
***
“흐아암.”
어제 개싸움을 해서 그런가, 피곤하네.
찔끔 나온 눈물을 닦아 내고 복도 너머를 바라봤다.
키네시아를 도와주기로 했으니 적어도 나라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파악해야지.
회의에 들어가면 대략적으로 어떤 분위기인지, 나라가 얼마나 휘청거리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래서 물러터진 룩소르에게 회의에 데려가 달라고 졸라보기라도 할 심산으로 기다리는 중이었다.
‘곧 재무 회의가 시작될 시간이랬는데?’
룩소르 얘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고개를 빼고 기웃거리다가 룩소르를 발견했다.
그는 꼬질꼬질한 남자 한 명만을 대동한 채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역시. 여기로 지나갈 줄 알았어.’
짧아진 다리를 열심히 움직여 룩소르 앞을 가로막았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그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리아! 이 시간에 여긴 어쩐 일이니?”
“전하를 기다렸지.”
“일어나자마자 아빠 얼굴이 보고 싶었던 모양이구나!”
둘러댈 말도 없으니까 대충 그런 거로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그의 표정을 살폈다.
좋아서 펄쩍 뛸 줄 알았는데 그는 난감하다는 듯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