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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2화 (12/151)

<12화>

분명 이라네리아와 아는 사이인 것 같긴 한데, 어떤 사이인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나는 놈의 친근한 태도와 평소 들었던 이라네리아의 성격, 행실을 종합했다. 그리고 대답하나 마나인 안부 인사 같은 건 과감하게 건너뛰었다.

대신 그를 밀어내며 물었다.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그건 왜? 키네시아와 비밀 이야기라도 하고 있었어?”

아니, 근데 이놈이. 버르장머리 없게 어른이 묻는데 질문으로 되받아쳐?

아, 지금은 어른이 아니구나.

그럼 공주님이 묻는데 어디 버르장머리 없게.

뚱한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키득거렸다.

“알겠어, 알겠어. 대답할게.”

그러더니 무릎을 짚고 눈높이를 맞춘 뒤 대뜸 볼을 내밀었다.

“대신 뽀뽀.”

미친놈인가?

“아니면 내가 해 줄까?”

미친놈이구나.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들은 거로 협박할 생각이면 따라와서 원하는 걸 말하겠지. 들어줄 생각은 없지만.

입이 가벼워 소문을 퍼트리는 놈이라도 상관없다. 영혼이 바뀌었다느니 하는 말을 누가 믿겠어.

걸음을 옮기는데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안 궁금해?”

안 궁금하다.

“공주님, 잠깐만.”

놈이 갑자기 심각한 척 나를 불렀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그런다고 내가 돌아볼 줄 알고?

콧방귀를 뀌고 가는데 뒤에서 따라오던 놈이 순식간에 나를 추월해 앞을 가로막았다.

“얼굴이 왜 이래?”

키네시아와 내가 개싸움 하는 건 못 봤나 보네.

파라돈에서 온 어린 사절단들을 쥐어팼다는 게 알려지면 여러모로 곤란해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놈이 코앞까지 얼굴을 들이댔다.

‘이놈이 어딜 불경스럽게.’

치워 내려 하는데 소년의 얼굴에 서려 있던 웃음기가 종적을 감췄다.

아름다운 얼굴에 창백하고 고요한 노기가 깃들었다. 청보랏빛 눈동자에 새하얀 달빛이 반사되어, 마치 짐승의 눈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키네시아가 이랬어?”

소년이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볼을 쓸었다. 황자 파라돈 놈에게 맞은 상처가 생각보다 심한지 살짝만 닿아도 아팠다.

인상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리자 소년이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말해 봐. 키네시아가 그런 거야?”

이 정신 나간 놈이 듣자 듣자 하니까 자꾸 헛소리하네.

맛이 간 눈빛 위, 모양 좋은 이마에 딱밤을 놔 주었다. 소년이 눈을 크게 뜨며 뒤로 한 발 물러났다.

“내가 걔한테 맞게 생겼어?”

성질을 내자 그제야 소년이 다시 샐샐 웃었다.

“아야.”

이마를 문지르며 평이한 목소리로 아픈 척을 하는 게, 제법 열 받는다.

“키네시아가 네 친구야? 어디 공주님 존함,”

“응.”

“을 함부로, 친구라고?”

“나랑 키네시아, 포넨트. 이렇게 셋이 둘도 없는 친구잖, 아야.”

너무 민망해서 나도 모르게 딱밤을 한 대 더 때리고 말았다.

소년이 억울하다는 듯 나를 쳐다보았다. 장난기가 가득한 눈빛을 보니 전혀 미안하지 않았다.

“그럼 가서 친구나 챙겨.”

걸음을 옮기자 따라오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그냥 무시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마주친 하녀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툭 건들면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나는 하녀가 소란을 떨기 전에 냉큼 해명했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다친 거야. 소란 피우지 마.”

“어떻게 계단에서 볼을…….”

하녀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내 뒤에 서 있던 놈을 쳐다봤다.

“로그리예 아미르 공자님도 계셨군요. ……설마.”

이 녀석 이름이 로그리예 아미르였군.

‘아미르라…….’

처음 들어 보는 가문인 걸 보니 내가 죽고 난 뒤에 작위를 받았나 보다.

짧게 생각을 마치고 다시 하녀를 보았다.

그녀는 내가 고개를 조금이라도 끄덕이면 당장 룩소르에게로 뛰어갈 기세였다.

그래서 고개 대신 검지를 들어 난간을 가리켰다.

“난간 장식에 부딪혔어.”

내 손가락을 따라 하녀의 고개가 돌아갔다. 내가 가리킨 곳에는 난간 끄트머리에 달린 동그란 장식이 주먹처럼 서 있었다.

금세 공손하고 차분해진 하녀가 안타까운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물었다.

“궁정의를 부를까요?”

“고작 이런 걸로 뭘. 됐어. 씻고 싶으니까 목욕물이나 준비하라고 해.”

“예, 공주님.”

하녀가 재빨리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새삼스러워졌다.

내가 공주였을 때는 사용인들이 감히 내게 말도 못 붙였는데.

왕이 물러 터져서 그런가. 궁정의 분위기는 국왕 부부의 성향을 따라가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신기하네.’

계단에 발을 올리자마자 로그리예도 같이 움직였다.

“로그리예 아미르.”

“응?”

“어디 따라올 생각이야? 이러다 욕실까지 들어오겠네.”

“그래도 돼?”

“되겠냐?”

슬그머니 주먹을 들어 보이자 그가 뒤로 슥 물러나며 샐쭉 웃었다.

“알겠어.”

그리고 연극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허리를 숙여 절을 했다.

“그럼 소신은 공주님 명대로 친구를 살피러 가겠습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오냐. 가거라.”

빨리 보내려고 장단을 맞춰 주자 그가 웃음을 터트리며 손을 흔들었다.

물론 나는 손을 흔들어주지 않은 채 로그리예가 몸을 돌려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기만 했다.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네.

배는 더 피곤해진 기분이라 한시라도 빨리 쉬고 싶었다.

방으로 들어와 씻은 뒤 옷을 갈아입었다.

시중을 받으며 의미 없이 방을 둘러보는데 협탁에 못 보던 물건이 하나 올려져 있었다.

“저건 뭐야?”

옷을 다 갈아입혀 준 도라가 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보았다.

“처음 보는 건데요. 가져올까요?”

“아니, 됐어. 나가 봐.”

도라를 물리고 수상한 통 쪽으로 다가갔다.

통을 슬쩍 밀자 아래 깔린 쪽지가 보였다.

[사랑과 염려를 담아, R]

‘R’이면……. 혹시 로그리예의 ‘R’인가?

습관처럼 쪽지를 불태워 없애고 통을 쳐다봤다.

열어 보자 안에 든 연고가 보였다.

손톱 끄트머리로 아주 소량만 퍼내 손목 안쪽에 발랐다. 시간이 좀 지나도 이상은 없었다.

다만 연고가 스며든 쪽에서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신성력이 깃든 약이잖아?’

독 걱정은 할 필요가 없겠다. 신성력은 해독도 하니까.

안 그래도 국왕 부부에게 상처를 들키면 귀찮아질 것 같았는데 잘됐다 싶었다.

‘제법 눈치가 있네.’

다친 곳에 듬뿍 얹어 놓자 통증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반쯤 남은 연고를 보다가 통을 닫고 일어나는데, 문득 키네시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 못지않게 엉망이었지, 아마?

“흠.”

팔짱을 끼고 고민하다가 도라를 불러 연고를 넘겼다.

“이거 키네시아에게 줘.”

***

키네시아는 이라네리아가 사라진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초라한 모습을 들키거나 걱정을 사고 싶지 않았기에 그녀는 몰래 방으로 돌아왔다.

온몸이 욱신거리고 피곤이 몰려왔다.

그녀는 완전히 지쳐 소파에 늘어진 채 천장을 올려다봤다.

‘괜찮겠지?’

엉망이 된 채 울던 파라돈의 황자가 떠오르자 통쾌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다.

사실 지금도 비굴함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아직 늦지 않았으니 찾아가 납작 엎드려 빌라고. 그래야 화를 면할 수 있다고.

그러나 키네시아는 고개를 젓고 눈을 질끈 감았다.

‘다신 비굴하게 살지 않을 거야.’

그녀는 3년간 겪었던 치욕의 날들을 되새겼다.

파라돈의 황자인 요르고스 카텔라코는 에피파네스에 올 때마다 분풀이하듯 포넨트를 괴롭혔다.

포넨트는 요르고스를,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가지고 있는 권위를 두려워했다.

“사절단 교류를 해야 하는데…….”

룩소르가 침통하게 말을 꺼내자마자 포넨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맞은편에서 그 모습을 본 키네시아는 제 쌍둥이를 위해 기꺼이 나섰다.

“제가 갈게요.”

“안 돼, 키네샤. 내가, 내가.”

“난 괜찮아 포넨트. 제가 가겠어요.”

키네시아는 직접 당한 게 아니기에 요르고스의 패악이 그렇게 심한 줄 몰랐다.

마음의 준비가 없이 간 탓인지 파라돈에서의 생활은 예상보다 더 끔찍했다.

그곳의 왕족, 귀족들과 함께 생활했으나 동등한 대우를 받는 건 아니었다.

침대는 딱딱했고 발이 삐져나올 정도로 작았다.

검술 수업을 받을 때면 자세를 잡아 준다는 명목으로 한 자세로 몇 시간 동안 세워 두기도 했다.

발을 걸어 넘어트리거나 키네시아가 에피파네스에서 가져온 물건을 고의로 망가트리는 건 예삿일도 아니었다.

반항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소리치고 저항했지만 그럴수록 괴롭힘의 강도는 높아졌다.

“어디다 말하고 싶으면 해. 여기 네 편이 있을 것 같아?”

“우리 제국이 정말 에피파네스 같은 나라와의 친선을 원해서 교류하는 것 같아? 불쌍해서 돌봐주는 거지.”

항상 호의에 둘러싸여 살았던 키네시아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누군가는, 선량한 마음을 가진 누군가는 나를 도와주겠지.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파라돈의 황제에게 여러 번 알현을 요청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친해진 파라돈의 귀족에게 말해도 보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차가웠다.

“공주님. 그런 말을 함부로 하시면 생활하기 더 고단해지실 겁니다. 차라리 좀 참으세요.”

“하지만 너무 힘이 듭니다. 폐하라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세요.”

파라돈의 귀족이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이 일을 모르실 것 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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