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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1화 (11/151)

<11화>

이 몸의 주인은 어디로 사라진 걸까? 나도 오래 고민해 본 질문이다.

……사실 고민하지 않았다.

죽었으면 어쩔 수 없고 죽지 않았다면 이 몸 어딘가에 있겠지.

어쩌면 아직 몸 안에 존재하긴 하지만 위대한 황제의 기운에 짓눌려 못 나오는 것일 수도 있다.

“나도 몰라.”

키네시아의 표정이 충격과 불안으로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손을 뻗어 구명줄을 잡듯 내 어깨를 움켜쥐었다.

“리아, 리아는. 죽은 건 아니겠죠?”

나는 키네시아를 빤히 바라보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아까 말했잖아. 모른다고. 깨어나 보니까 이 몸 안이었어.”

“그때 상태는 어땠습니까?”

“불바다였지. 하지만 몸에 이상은 없었어.”

손아귀가 더 조여졌다. 뻐근한 통증이 느껴져 키네시아의 손등을 툭툭 쳤다.

“이거 네 동생 몸이야.”

그제야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손을 뗐다. 그리고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키네시아는 눈을 질끈 감고 숨을 가다듬었다. 무슨 결심을 했는지 눈빛이 금세 단단해졌다. 아까와 같은 혼란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이라네리아가 아닌 게 맞나 보네요.”

하지만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없었다.

갑자기 동생 몸에 엄한 사람이 들어 있는 게 심란한 모양인지 키네시아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당신이 누군지 알려 주세요.”

말해 줄까? 폭군이라고 까무러치는 거 아냐?

“이라네 필로티메오마이 벨로아스.”

폭군 어쩌구저쩌구하면 딱밤을 먹여 줄 생각이었는데, 다행히 키네시아는 폭군의 피읖도 꺼내지 않았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소개를 덧붙였다.

“에피파네스의 황금기를 이끌고 스스로 황위에 오른 사람이지. 네 선조라고 할 수 있겠네. 마음껏 자랑스러워 해도 돼.”

기껏 허락해 주었는데 키네시아의 표정은 불손하게 변했다.

그다지 기뻐하는 기색도 없었다.

“당신이 이라네 황제라고요? 하지만 왜, 하필…….”

“하필?”

눈을 홱 치켜떴지만 키네시아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황당하고 허망한 얼굴로 땅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마치 사기로 값진 보석을 홀라당 빼앗긴 사람 같았다.

“하필 폭,”

“폭군이라고 하기만 해 봐, 아주.”

키네시아는 입을 다물었지만 폭군의 폭자를 들은 게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하는 수 없이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리고 손을 들어 올렸다.

이마 앞에서 검지를 튕기자 딱 하고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윽!”

키네시아가 이마를 부여잡고 고개를 들었다. 흐리멍덩하던 눈이 점점 빛을 되찾았다.

“그럼 자서전의 내용이 사실입니까?”

“응.”

“정말 폐하의 통치하에 있던 에피파네스는 부유하고 강대했습니까?”

“그걸 말이라고 해? 지금 파라돈 영토의 반과 레튜니아 영토의 절반이 다 내 거였어.”

“굶는 백성들은요?”

“많지 않았지.”

“어딜 가도 에피파네스 사람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지 않았습니까?”

“누가 겁대가리 없이 내 나라 국민을 무시해? 뒈질려고.”

“모두가 조국을 자랑스러워하고요?”

“두말하면 입 아프지.”

키네시아는 피딱지가 붙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더니 자세를 고쳐 무릎을 꿇고 나를 올려다봤다.

경외하는 황제를 대면할 때 응당 취해야 할 자세였으나 나에게 폭군이라던 애가 저러니 썩 내키지 않았다.

“너 뭐 하니?”

“도와주세요.”

이거 영 불길한데.

듣지 말고 방으로 돌아가야겠다.

몸을 틀었는데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아래를 내려다봤다. 발목에 키네시아의 손이 붙어 있었다.

제때 털어 내지 못해 굳은 진흙처럼 아주 찰싹 매달려 다리를 움직일 때마다 대롱대롱 흔들렸다.

“이거 안 놔? 어디 고귀한 황제의 몸에 손을 대?”

다리를 마구 흔들었으나 그녀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담쟁이넝쿨처럼 내 종아리를 타고 올라왔다.

“에피파네스가 다시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무시당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절박한 목소리에 열심히 버둥대던 다리를 내려놓았다.

나는 다시 키네시아와 마주 섰다.

그래. 솔직히 잘만 키우면 키네시아는 훌륭한 재목이 될 것이다.

만약 내가 황제일 때 키네시아 같은 딸이 한 명 더 있었다면, 후계자를 선택할 때 한참 고민했을 것이다.

특히 의지로 찬란히 빛나는 눈동자를 보고 있노라면 저 원석을 가공해 보석으로 만들고 싶다는, 일종의 장인 정신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그것과 별개로, 저 반짝이는 눈에 대고 말하긴 조금 미안하지만.

“내가 왜 도와야 하는데?”

장인 정신에 휘둘릴 거였으면 황제가 아니라 보석세공사나 되었겠지.

그리고 정말로 도와야 할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찌 보면 내가 공들여 쌓은 탑을 무너트려 놓고 다시 지어 달라고 떼쓰는 꼴이 아닌가?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더 가관이었다.

“저는 폐하의 핏줄이잖아요. 가족이요.”

그게 뭘 어쨌다는 걸까?

“안타깝게도 공략 방법이 틀렸어.”

나는 원래 가족의 정을 모르는 사람이다.

어머니는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멀리서 약소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무시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게 다였다.

철이 들 무렵부터 아버지와는 정치적 견해 차이로 서로를 적대했다.

유모는 수시로 바뀌었다. 그나마 가장 오래 내 곁에 있었던 유모는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거기에다가 외동이라 형제도 없었으니 말 다 했지.

그러니 천륜에 호소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내 인자함과 동정에 호소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다.

재차 붙잡는 손을 심드렁하게 보다가 몸을 돌리려는데 키네시아가 소리쳤다.

하지만 나는 다신 귀찮을 짓을 하지 않을 생각이므로 들을 필요도 없,

“오명을 벗겨 드릴게요.”

……자고로 참된 군주는 다른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법이지.

“어떻게?”

“저를 절대 군주로 만들어 주세요. 왕위에 오르면 폐하에 관한 역사를 제대로 조사하고 다시 기록하도록 할게요.”

“흠.”

“물론 폐하께서 작성하신 자서전의 내용을 토대로 하겠습니다.”

제법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다.

들을 때마다 속에서 천불이 나는, 폭군이라는 오명을 지울 수 있다니!

“흠…….”

어차피 지금은 성불할 수도 없다. 그냥 이대로 폭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괴로워해야 했다.

그럴 바에야 도와주는 게 낫지 않을까?

게다가 귀찮은 왕 노릇을 하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옆에서 훈수나 두고 인재를 찾아 키네시아에게 붙여 두면 되는 거잖아.

법을 재정비하고 자기가 왕인 줄 아는 번쩍이들만 좀 쳐내면, 나라는 십중팔구 제대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개인적으로도 꾸준히 성불 방법을 찾을 거지만 인생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대비책을 만들어 두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후손들을 잘 이끌다 보면 감명받은 샤마하께서 성불시켜 줄지도 모르고.

마음이 완전히 ‘도와주자.’ 쪽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냉큼 좋다고 하면 가벼워 보일까 봐 좀 뜸을 들일 생각이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키네시아의 표정이 너무 간절해져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좋아. 도와줄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율시안을 닮은 얼굴이 몰라보게 밝아졌다.

그녀는 당장에라도 나를 얼싸안고 싶어 하는 표정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일어나 손을 뻗길래 은근슬쩍 피하며 거리를 벌렸다.

키네시아가 어정쩡하게 팔을 든 채로 서 있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한동안 제 손을 내려다보더니 긴 숨을 내쉬었다.

뭔가를 생각하듯 한참 동안 발끝만 보던 그녀는 침묵이 지루해질 즈음에야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더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뭔데?”

“폐하께서 리아의 몸에 들어왔다는 걸 비밀로 하고 싶어요. 에피파네스가 강국이 되기 전에 승천이라도 하시면…….”

애매하게 흐려지는 말을 대신 마무리 지어 주었다.

“너도 약속을 지킬 필요가 없어진다고?”

“……네.”

“제법 손에 쥔 걸 써먹을 줄 아네. 마음에 들어.”

“감사, 합니다?”

협박해 놓고도 칭찬받은 게 얼떨떨한지 키네시아가 이상한 어투로 인사했다.

“그럼 일단 호칭부터 어떻게 해. 존댓말도 쓰지 말고.”

“알겠습, 아니, 알겠어, 리아.”

“그래, 키네시아. 앞으로 잘해 보자고.”

키네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까치발을 들어 그녀의 어깨를 대충 두드려 주고 몸을 돌렸다.

갑자기 확 피곤하네. 방에 돌아가서 진짜 쉬어야겠다.

생각할 게 많은지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키네시아를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제법 멀어져 나무 사이를 지나려는데,

“응?”

시야에 반짝거리는 뭔가가 툭 걸렸다.

어떤 미친놈이 은으로 된 목걸이를 나무에 걸어 놓은 게 아니라면 보일 리 없는 색감이었다.

사람이라면 나와 키네시아의 대화가 다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이기도 했다.

‘잘못 본 거겠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반짝이는 쪽을 쳐다봤다.

한 소년이 나무에 등을 기대고 서 있었다.

은색 광택이 도는 머리카락. 차가운 달빛을 받아 요요히 빛나는 푸른 보랏빛 눈동자. 나이는 한……. 플로레타나 키네시아 정도 되어 보였다.

‘언제부터 저기 서 있었던 거지?’

다 들은 건 아니겠지? 정체를 숨기기로 하자마자 들킨 거면 황제 체면이 말이 아닌데.

은근슬쩍 추궁이라도 해 볼까?

다가가자 소년이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소년의 입술이 벌어졌다.

“안녕, 공주님.”

다가온 소년이 나를 꽉, 숨이 막힐 정도로 힘주어 끌어안았다.

“정말 오랜만이야.”

라고 처음 보는 놈이 말했다.

얜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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