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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0화 (10/151)

<10화>

“리아!”

묵직한 게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곧 두 다리가 허공에 달랑 들렸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팔을 휘둘렀다.

“겁먹었냐? 어? 겁먹었어?”

“너, 너너너, 우, 우리, 아니, 내가 누군지 알아? 나 파라돈의 황자야!”

“황자면 뭐. 황자는 물리면 피도 안 나냐? 덤벼! 안 덤벼? 내가 가?”

“나한테 이런 걸 폐하께서 아시면 이딴 나약하고 거지 같은 왕국이 남아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내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갈비뼈가 아파 고개를 뒤로 돌렸다.

바로 보인 키네시아의 얼굴은 하얗게 질린 채 굳어 있었다.

황자 파라돈이 키네시아의 안색을 보더니 기세를 회복하고는 이죽거렸다.

“이제 좀 주제 파악이 되시나? 친선 사절 교류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지?”

에피파네스는 파라돈이나 레튜니아로 후계자 를 보낸다.

3년이 지나면 이번엔 파라돈과 레튜니아에서 에피파네스로 황족을 아무나 한 명씩 보내 6년간 머무르게 한다.

반드시 3년을 채워야 하는 에피파네스의 왕족과 달리, 파라돈과 레튜니아의 황족은 언제든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다.

즉, 마음만 먹으면 저 황자 파라돈은 6년간 에피파네스에 머물면서 우리를 괴롭힐 수 있다는 뜻이었다.

황자 파라돈이 낄낄거리면서 내 볼을 툭 툭 건드렸다.

“내가 원하면 네 애비도 내 앞에 무릎 꿇릴 수 있어. 알아?”

“애비? 너 지금 에피파네스의 국왕 전하께 애비라 그랬냐? ”

황자 파라돈한테 손을 뻗는데 키네시아가 나를 꽉 붙들었다.

“리아, 제발.”

애처로운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나는 키네시아의 손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불거진 손마디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울분을 참는 것 때문일까? 아니면 당장 고통스럽지 않기 위해 굴복하는 것에 대한 수치심 때문일까?

나는 몸에 힘을 풀었다.

황자 파라돈의 미소가 짙어졌다.

내가 얌전해지자 좀 안심이 된 건지 황자 파라돈이 가까이 와 깝죽댔다.

“솔직히 에피파네스는 우리 속국이나 마찬가지잖아. 그럼 지배자한테 존경심을 보여야지. 안 그래?”

지배자의 지읒도 모르는 놈이.

“높은 사람에게 대들면 어떻게 되는지 가르쳐 줄 테니 머릿속에 똑똑히 새겨 두라고.”

폼 하나 더럽게 오래 잡네. 협박도 너무 구구절절하고 구리다.

속으로 파라돈 놈의 행동을 하나하나 평가하고 있는데 키네시아가 나를 내려놓고 앞을 가로막았다.

“제가 시키는 대로 다 할게요. 그러니 동생은 보내 주세요.”

얼씨구? 여기저기 처맞아 엉망이 된 주제에 언니라고 나서기는.

안타깝지만 그녀의 보호는 필요 없다.

나는 개싸움의 장인이니까.

어린 시절부터 재수 없었던 펠리온과 렘브로스를 쥐어패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황제가 위엄 없이 그래도 되냐고 물어보면 당연히 된다고 대답하겠다. 사실 그 말은 나 편하자고 아무 데나 갖다 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개싸움하고 다닐 때는 황제도 아니었는걸.

키네시아를 뒤로 끌어내려는데 황자 파라돈이 피가 뚝뚝 흐르는 손을 내밀었다.

“그럴 순 없지. 이거 안 보여?”

아쉽게도 생각보다 상처가 깊진 않았다. 하지만 트집을 잡으려면 뭔들 못 들이대겠어.

옆에 있는 놈들이 낄낄거리며 동조하고 나섰다.

“그래. 미리 기강을 잡아 둬야지.”

“너도 네 동생 나이 때부터 우리한테 설설 기면서 맞았잖아. 기억 안 나냐?”

덩치 큰 파라돈 놈 세 명이 서서히 키네시아에게 다가왔다.

키네시아가 자꾸만 손을 뒤로 뻗어 나를 밀어냈다. 도망치라는 뜻인 것 같았다. 키네시아가 원하는 대로 해 줄까 말까 고민하는데 황자 파라돈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당장 몸을 웅크렸다. 그리고 흙을 한 움큼 집어 놈의 얼굴에 뿌렸다.

“아악! 이 비겁한!”

본디 황제란 때때로 비겁해야 하는 법.

그리고 다 큰 놈 셋이서 여자애 하나 괴롭혀 놓고 나한테 비겁을 논하는 거야?

웃기지도 않아.

정강이를 강하게 걷어차 주고 넘어진 황자 파라돈 놈에게 올라탔다.

밑에 깔린 파라돈 놈이 나를 쥐어뜯고 때렸지만 나는 손에 힘을 빼지 않았다. 오히려 놈을 물고 늘어졌다.

“으악! 놔! 놔!!”

뒤에서 누군가가 소리치는 게 들렸다.

“저거 떼어 내!”

“이, 미친!”

“리아!”

다급하게 나를 부르는 소리와 함께 등 뒤도 부산스러워졌다.

비명과 애들이 뒹구는 소리, 누군가가 얻어맞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키네시아가 내 개싸움에 끼어든 듯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한 놈만 조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 파라돈이 나를 거칠게 밀어냈다.

곧 머리채가 붙잡히고 볼에 커다란 주먹이 내리꽂혔다.

머리가 징 울리고 숨이 턱 막혔지만 오히려 눈을 치켜뜨고 황자 파라돈에게 달려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녀석이 주춤거렸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놈의 다리 사이를 걷어찼다.

“억!”

굉장히 절제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내 밑에서 벗어났던 황자 파라돈이 다시 쓰러졌다.

주위가 무서울 정도로 고요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끝장을 내기 위해 다시 발을 들었다.

황자 파라돈이 시퍼렇게 질린 얼굴을 하고 제 가랑이 사이를 가리며 꼴사납게 소리쳤다.

“그, 그만! 그만! 잘못했어!”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지.”

심판의 발길질을 하려는데,

“안 돼! 리아, 거, 거긴 안 돼!”

기겁하며 뛰어든 키네시아가 나를 들쳐 메다시피 끌어내 황자 파라돈에게서 떼어 놨다.

심하게 처맞은 파라돈 놈들이 황자 파라돈을 챙기며 뒤로 물러났다. 꺽꺽거리며 고통을 진정시키던 황자 파라돈이 눈을 표독스럽게 떴다.

어쭈?

“저게 아직도, 어느 안전이라고 눈깔을.”

다가가려 하자 황자 파라돈이 홱 고개를 돌려 키네시아를 노려봤다.

“내가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줄 알아?”

키네시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까처럼 분을 참는 것 같긴 했지만 겁먹은 짐승처럼 움츠러들진 않았다.

아이를 지키는 건 어른의 의무이기에 나는 키네시아 앞에 섰다.

“안 넘어가면 어쩔 건데?”

“황제 폐하께 말해서…….”

“그래. 어디 10살짜리한테 맞아서 질질 짰다고 말해 보시든가. 네 아버지가 ‘역시 내 피를 이어받았군!’ 하면서 아주 좋아하겠어.”

“이, 이!”

“만약 그러면 나도 네가 키네시아에게 한 짓을 전부 밝힐 거야.”

“밝히면 뭐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 버러지 같은 것들이. 너희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야!”

황자 파라돈이 기가 막힌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나도 똑같이 놈을 비웃어 주며 천천히 다가갔다.

“명목상으로나마 교류 목적이 친선이니만큼 네 행동이 알려지면 손해를 보는 건 파라돈이야. 레튜니아가 득달같이 달려들어 꼬투리를 잡을 테니까. 네 아버지가 그걸 원할까?”

황자 파라돈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그는 내 말에 반박하지 못하는 게 분한지, 주먹 쥔 손을 벌벌 떨었다.

나는 그에게 바싹 다가가 멱살을 잡아 끌어내렸다.

“문제가 커지면 결코 너에게 유리하게 돌아가지 않을걸. 넌 황제의 눈 밖에 나게 될 거야.”

“네가, 뭘 알아!”

그가 소리치며 내 손을 뿌리쳤다. 하지만 내 말이 옳다고 생각했는지 이를 갈면서도 뒤로 물러났다.

“두고 봐. 내가 이 치욕을 절대 잊지 않을 테니까. 언젠가 되갚아 주겠어.”

지극히 악당 같은 대사를 남기면서 말이다.

저런 말을 하면서 도망가는 놈들치고 제대로 복수하는 놈을 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울먹거리는 목소리라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러시든가.”

심드렁하게 대답하자 놈들이 서로를 부축했다. 맞은 곳이 아픈지 퇴장하는 걸음걸이가 퍽 우스꽝스러웠다.

중간에 비틀거리고 코를 훌쩍이는 게 아주 구질구질해 웃음이 터져 나왔다.

“100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네!”

나는 한참을 웃다가 시원하게 숨을 한 번 터트리고 몸을 돌렸다. 산발한 키네시아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와 제 몸을 한 번 번갈아 보더니 제 꼴을 짐작했는지 머리와 옷을 정리했다.

그래 봤자 거지꼴인 건 똑같았지만 말이다.

빤히 바라보자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키네시아는 퉁퉁 부은 입술을 꾹 깨물고 눈에 힘을 준 채 울음을 참고 있었다. 그 위로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 보였다.

‘왜 저러고 있는 거야. 마음 약해지게.’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가가 키네시아의 흙 묻은 손바닥을 다정히 털어 주며 말했다.

“울 거면 다른 데 가서 울어. 난 조용히 쉬고 싶으니까.”

키네시아가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내 인성의 존재 여부를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넌!”

“뭐.”

“…….”

“말을 왜 하다 말아? 뭔데.”

“아무것도 안 물어봐?”

“뭘 물어봐?”

“내가 파라돈에서 3년간 무슨 일을 겪었는지.”

키네시아가 목소리는 숫제 흐느끼는 듯했다.

나는 머리를 빗어 내리고 흙투성이가 된 치마를 털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그걸 꼭 들어야 알아? 망해 가는 나라 왕족들 대우가 다 거기서 거기지. 굴욕도 좀 당하고, 억울한 일도 당하고, 까이고 맞고 그랬겠지.”

어머니가 약소국 출신이라 안다.

그래도 내가 황제가 된 이후에는 이런 꼴을 안 봐도 될 줄 알았는데. 죽었다 깨어나서도 보게 될 줄이야.

감회가 새로워 헛헛하게 웃는데 키네시아의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끌어당겼다.

“왜, 끼어들었어?”

뭐라고 대답을 해야 할까.

파라돈 놈들이 재수 없어서 그랬다고?

나는 길게 고민하지 않고 가장 그럴듯한 이유를 툭 내뱉었다.

“그럼 언니가 맞는데 과자 먹으면서 구경이나 할까?”

“……잖아.”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안 들렸다.

귀를 가져다 대니 키네시아가 소매로 눈가를 훔치고 고개를 들었다.

율시안과 비슷한 색의 황금색 눈동자가 내 눈을 직시했다.

“당신, 내 동생 아니잖아.”

키네시아가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말려 있던 어깨와 등이 펴지고 눈동자에는 확신이 깃들었다.

그녀는 꼿꼿하게 선 채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

“이라네리아, 제 동생은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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