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아니, 잊으려면 혼자 곱게 잊을 것이지 기록은 왜 건드려?
이라네리아가 한숨을 푹 쉬며 얼굴을 문질렀다.
사학자들은 심란해 보이는 어린 공주님을 앞에 두고도 할 말을 이어 갔다.
“파라돈은 대외용 역사가 있을 정도로 엄격하게 역사를 통제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타국의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약소국에서는 레튜니아와 파라돈의 눈치를 보느라 저희와는 잘 교류하지 않고요.”
“그리고 동시대 사람인 렘브로스 바멜마흐 2세가 이라네 황제에 관한 내용을 지운 것으로 봐서는…….”
“아마도 인성이…….”
이라네리아가 발끈해서 소리쳤다.
“인성이 뭐!”
“크흠. 아닙니다. 그것 외에도 잉크가 덜 마른 부분이 있다든가, 노트의 질이 100년 전의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든가 하는 문제가 있어서 정사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이라네리아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건 생각 못했네. 철두철미한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지만 설명하지 못할 건 아니다. 금고에 걸려 있는 보존 마법은 물체의 산화나 부패를 막는다.
“그건 금고에 마법이…… 어휴, 됐다. 됐어.”
설명하려던 이라네는 한숨을 내쉬며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그 부분을 해명해 봤자 진위를 파악할 수 없다는 말이나 해 댈 게 분명했다.
가슴을 몇 번 내리친 그녀는 입을 앙다문 채 자리로 돌아왔다.
힘이 들어가 볼록 튀어나온 볼은 제법 깜찍했으나 등 뒤에 넘실거리는 검은 기운은 무척이나 위협적이었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는 와중에 룩소르만이 학자들을 챙겼다.
“시종장. 손님들께 식사를 대접하게나.”
시종장이 공손하게 대답한 뒤 학자들을 이끌고 나갔다.
발소리가 멀어지자 식당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생쥐가 구멍에 숨기 위해 복도를 가로질러 달려가는 소리까지 들릴 정도였다.
이라네리아는 소리가 들린 쪽을 잠시 노려보았다가 하인이 가져온 디저트를 포크로 푹푹 쑤셔 댔다.
그녀를 보며 플로레타가 포넨트에게 속삭였다.
“유령이 씐 게 분명해.”
포넨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확신했다.
“그것도 악령.”
***
손에 뭔가를 든 사용인들이 개미처럼 열심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나는 창틀에 팔꿈치를 세우고 턱을 괸 채 삐딱하게 앉아 그 모습을 구경했다.
룩소르가 내가 준 돈을 엄한 곳에 쓴 건 아닌지, 장식들은 제법 괜찮은 상태가 되었다. 물론 석고상은 여전히 발자국만 남아 있지만 말이다.
그래도 샹들리에 몇 개 정도는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러면 뭐 해. 마음대로 된 게 하나도 없는데.’
성불은 시도하는 족족 실패하고, 밥까지 거르며 쓴 자서전은 가짜 취급당했다.
심지어 앞에 수식어도 하나 붙었다.
나는 이제 그냥 폭군이 아니다. 무려 ‘자아도취형’ 폭군이다. 자서전에 자기 자랑이 너무 많단다.
하, 참! 어이가 없어서.
자서전 내용은 역사로 인정도 안 해 주면서 ‘자아도취형’이라는 수식어는 왜 붙이는데?
씩씩거리는데 문이 열렸다.
도라는 이제 혼자 깨어 있는 나를 봐도 놀라지 않게 되었다.
“공주님, 이제 단장하고 나가셔야 해요. 파라돈과 레튜니아에서 친선 사절단이 곧 도착할 예정이거든요.”
친선 사절은 무슨. 안전한 남의 땅에서 서로를 견제하러 오는 거면서.
염병할 파라돈은 동쪽으로 몸집을 불려 제국이 되었고, 젠장맞을 레튜니아는 서쪽으로 세력을 넓혀 제국이 되었다.
인접한 두 나라가 동시에 커지면 마찰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힘의 균형을 생각해 보면 그래야 정상이다. 서로 기세를 누르려 침략에, 전쟁에. 아주 난리를 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파라돈과 레튜니아는 그러지 않았다.
공식 문서를 보면 남동대륙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니 어쩌니 하지만, 어림도 없는 소리.
그들이 서로를 견제만 하는 이유는 지형 때문이다.
두 제국의 국경 지대에는 세계에서 가장 높고 험악한 렘록 산맥이 늘어져 있었다.
그들이 서로를 침략할 방법은 뼈대만 남은 에피파네스를 지나는 것뿐이었다.
에피파네스를 집어삼키는 쪽이 대륙의 패권을 쥔다.
그렇게 서로에게 넘겨주지 않으려고 눈치 싸움을 하다 보니 에피파네스의 명맥 역시 어영부영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온갖 굴욕을 겪었겠지. 예를 들면 가장 유력한 후계자 후보를 볼모를 보내야 한다든가, 하는 것 말이다.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안 나가.”
파라돈이든 레튜니아든 이름을 듣는 거로도 열불이 뻗치는데, 마중은 무슨 마중이야.
나 때는 말이야! 나가긴커녕 그놈들이 알현을 요청해도 그날 기분에 따라 받아 줄지 말지 골랐다고. 내가 허락하면 그때 와서 인사를 했단 말이야!
레튜니아는 그렇다 쳐도 파라돈, 그 배신자 놈들한테 고개를 숙이라니.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까진……, 이미 한 번 들어갔구나.
어쨌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고집스럽게 팔짱을 끼자 도라가 뭐라 말하려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말씀 전할게요.”
그녀가 다가와 옷을 갈아입히고 머리를 해 주며 엄포를 놓았다.
“대신 무도회에는 꼭 나오셔야 해요. 그땐 싫다고 떼쓰셔도 어림없어요.”
떼를 쓰긴 누가! 발끈해서 돌아보았다.
그러나 위대한 황제를 떼쟁이로 만든 도라는 이미 나간 뒤였다.
나는 불편한 옷을 갖춰 입은 채로 방에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시간이 지나자 희미한 무도곡이 방 안으로 흘러 들어왔다.
‘귀찮은데.’
사실 춤을 왜 추는지 모르겠다.
황제일 때야 필요에 의해 무도회에 참석했다지만 지금은 그냥 막내 공주잖아. 굳이 가야 할까?
붕 뜬 발끝을 까딱이며 두 가지를 저울질했다.
무도회에 참석하는 것과 참석하지 않아서 후손 꼬질이들한테 시달리는 것 중 어떤 게 더 귀찮을까?
아무래도 후자가 더 귀찮을 것 같았다.
‘그냥 얼굴만 비추고 와야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따라오려는 도라를 손짓으로 물리고 대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리아 왔니?”
“웬일로 행차를 하셨냐?”
“그러게. 무도회 싫어하잖아.”
괜히 왔네. 이라네리아 공주가 무도회를 싫어할 줄이야.
“그냥.”
“그래도 잘됐다. 온 김에 같이 있자.”
플로레타가 내 손을 잡았다. 그냥 두면 무도회가 끝날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아 손을 쏙 빼냈다.
“됐어. 난 좀 구경하다가 들어갈래.”
후손들을 뒤로하고 벽에 붙었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빙글빙글 돌거나 부채를 흔들고, 웃음을 터트렸다.
‘무도회는 어떻게 100년이 지나도 재미가 없지?’
황제일 때는 인사 받는 재미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길바닥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가 된 느낌이다.
그래서인지 흙 묻은 것이라도 주워 먹으려는, 굶주리고 탐욕스러운 놈들이 내 주변을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공주님. 왜 혼자 계십니까? 마침 제 아들도 혼자 있는데 함께 노실래요? 아주 훤칠하게 잘생겼답니다.”
봐 봐. 10살짜리한테 아들을 들이대는 거.
아주 넌덜머리가 난다.
나는 콧방귀나 흥 뀌고 몸을 돌렸다.
차라리 바람을 쐬자 싶어 정원으로 나왔다. 그러나 불이 켜진 곳에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바람이 선선하니 제법 숨통이 트였다.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그것도 지겨워져 쉬기 위해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벤치에 앉아 다리를 흔드는데 나무 사이에서 묵직한 게 나뒹구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조롱 섞인 웃음이 우악스럽게 터져 나왔다.
‘뭐야?’
어린 애들 같은데, 웃음소리가 퍽 귀에 거슬렸다.
딱밤이라도 한 대씩 때려 주려고 일어나는데 익숙한 뒤통수가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반짝이는 금발에 내 아들을 닮은 소녀.
“키네시아?”
먼 램프의 흐린 불빛에 물기 어린 황금색 눈동자가 반짝였다.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다.
“너 우니?”
키네시아는 쓰러진 채 땅을 긁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풀들이 그녀의 손아귀에서 일그러졌다.
손톱이 이리저리 뒤집어졌으나 그녀는 아픔보다 수치심을 느끼는 게 더 고통스러운 것 같았다.
키네시아가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저리, 가.”
멀뚱히 보고 있는데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다.
“푸하하하하! 뭘 가래.”
남자애 한 명이 키네시아 앞에 쪼그려 앉아 그녀의 머리를 검지로 툭툭 밀었다.
“그러니까 내가 시키는 대로 했어야지. 물을 떠 오라면 떠 오고, 바닥에 떨어진 걸 입으로 주워 먹으라면 주워 먹고.”
키네시아는 대꾸하지 않고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자 소년이 키네시아의 머리채를 움켜쥐어 끌어당겼다.
“네 나라로 돌아오면 뭐가 달라질 줄 알았어?”
저건 또 뭔 소리야.
혈압이 올라 뒷골이 당겼지만 황제는 어떤 상황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법.
일단 심호흡을 하고 15살쯤 되어 보이는 소년에게 말을 걸었다.
“너 혹시 파라돈에서 왔니?”
소년이 입꼬리를 삐죽이며 기분 나쁘게 피식거렸다.
“그렇다면? 뭐 어쩌려고.”
어쩌긴 뭘 어째. 이래야지.
나는 키네시아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파라돈 놈의 손을 있는 힘껏 깨물었다.
콰득, 하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비명이 울렸다.
“으아아악!!!!”
파라돈 놈이 나를 밀쳐 내며 손을 빼냈다.
휘청거리는 몸에 중심을 잡고 입 안에 고인 비린내를 한데 모아 퉤 뱉었다.
애들이 좀 멍청하리만치 착하긴 하지만 엄연히 대 에피파네스 황제의 후손들이다.
그러니 괄시해도 나만 괄시하고, 괴롭혀도 나만 괴롭힐 거다. 내가 그렇게 결정했다.
그런데 감히 파라돈에서 온 놈이 위대한 황제의 뜻을 가로막아?
그것도 내 나라에서?
“야. 이리 와. 손 두 짝을 아주 넝마로 만들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