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이번엔 플로레타가 호기심을 보였다.
“이건 뭐야?”
“이라네 황제 자서전이던데. 그 쓰레기 같, 흠. 검증되지 않은 책들보다는 훨씬 신빙성 있을 것 같아서 가져왔어.”
“식사한 뒤에 역사학자들과 기록관, 궁중 사서를 불러다 감정해 봐야겠구나.”
룩소르가 책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내용을 꼼꼼히 살피는 룩소르를 이라네리아가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먹는 동안 감정하라고 해.”
그러고는 시종장에게 손짓했다.
“가서 감정에 필요한 애들 다 불러와. 보석 감정사도.”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명령에 시종장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힐끗 그 뒷모습을 본 이라네리아가 언짢은 표정을 했다.
“쯧쯧. 시종장이란 놈이. 국왕에게 먼저 허락을 구해야지.”
“네가 시켰잖아.”
포넨트는 기가 막혔다.
그러나 이라네리아는 아랑곳하지 않고 손가락을 까딱여 시종에게 음식을 가져오게 했다.
그녀는 우아하게 물을 마시려다가 이가 나간 잔을 보고는 잔을 그냥 내려놓았다.
“시킨다고 다 해? 옆에 국왕이 버젓이 있는데? 군주를 모시려면 사리 분별을 할 줄 알아야지.”
재수 없긴 하지만 맞는 말이라 포넨트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조용해진 식탁 위로 수프가 올라왔다.
이라네리아가 못마땅한 얼굴로 수프를 몇 번 퍼 올렸다가 떨어트리더니 접시를 옆쪽으로 밀어 두었다.
키네시아는 조용히 식사하며 제 막냇동생의 행동을 하나도 빠짐없이 눈에 담았다.
“그런데 황제의 금고 위치는 어떻게 알게 된 거야?”
“왕실 기록에서 봤어.”
이라네리아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능숙하게 진실을 감췄다.
다들 갑자기 생겨난 거금이 믿기지 않는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그 사이에서 이라네리아는 거만한 미소를 은은히 머금었다. 그러다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들었다.
서로 닮은 금색 눈동자가 허공에서 마주쳤다.
이라네리아가 키네시아에게 입 모양으로 말했다.
‘뭘 봐?’
포넨트가 어렸을 때나 했을 법한 짓이었다.
말괄량이지만 사랑스럽던 막내 여동생의 변화에 키네시아가 적응하지 못하는 사이 시종장이 식당으로 돌아왔다.
그의 뒤로 사서, 기록관, 궁전 인근에 사는 사학자들이 막 만든 소시지처럼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이라네리아는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지만 다들 에피파네스에서 제법 이름난 자들이었다.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들이 들어오자 넋을 놓고 있던 룩소르가 부랴부랴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법 인자하게 미소 지었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와 주어 고맙소. 다름이 아니라 감정을 부탁할 것이 생겼는데, 일단 식사를…….”
같이 한 뒤에 천천히 이야기를 나눠 보자고 말하려던 룩소르가 얼떨결에 입을 다물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라네리아가 룩소르 앞에 서서 학자들을 향해 손에 든 책을 불쑥 내민 탓이었다.
“이라네 황제의 금고에서 나온 자서전-”
잠깐 말을 멈춘 그녀가 힐끗 룩소르를 돌아보았다.
말을 높이고 싶지 않았으나 왕이 격식 있는 말투를 사용하였는데 자신이 반말을 찍찍 내뱉을 수는 없는 법이었다.
“-이에요. 보니까 도서관에 황제의 친필 편지가 있던데, 필체를 대조해 보면 진품인 걸 알게 될 거예요. 그러니 감정이 오래 걸리진 않겠죠?”
“몇 가지 더 보아야 하긴 하지만, 그렇습니다.”
이라네리아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하인이 메인 요리를 내려놓았기에 이라네는 자리로 돌아왔다.
왕가의 체면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박한 닭 요리였으나 냄새가 훌륭했다. 나이프를 들자 어디선가 군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이라네리아는 보란 듯이 닭고기를 썰어 입에 넣었다. 맛을 음미하다가 꿀꺽 삼키고는 학자들의 표정을 가볍게 훑었다.
다들 허기진 얼굴이었다.
이라네리아는 잘되었다 싶어 시종장에게 명령했다.
“감정이 끝나면 식사를 대접해 드리도록 해.”
그녀의 말에 학자들은 궁전에 온 목적을 떠올리고 머릿속에 떠다니는 닭고기를 치워 냈다.
“그럼 저희는 잠시 서재를 좀…….”
그들이 이라네리아와 룩소르를 번갈아 보며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누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할지 모르는 눈치였다.
이라네리아는 룩소르에게 대답하라고 눈짓하고 식사에 집중했다. 그제야 룩소르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재는 얼마든지 쓰시오. 그리고 배가 고프면 언제든,”
“아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이라네리아가 태평하게 놀란 척하며 검지로 잔을 툭 밀었다.
룩소르 쪽으로 냉수가 와르르 쏟아졌다.
놀란 룩소르가 말을 멈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인이 다가와 자리를 정리하고 룩소르의 옷을 닦아 주었다.
이라네리아는 이를 악문 채 미소 지으며 룩소르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룩소르는 그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듯했다. 그가 어리둥절하는 사이 사학자들은 아쉬운 얼굴로 자리를 떴다.
룩소르는 그들을 붙잡으려다 시기를 놓치고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리아.”
“왜?”
“손님을 불렀으면 대접부터 하는 게 예의란다.”
이라네리아의 조그만 입술에서 한숨이 훅 빠져나왔다.
룩소르를 보는 눈빛 역시 불경스러웠다.
차마 착한 아이에게 쓴소리하지 못해 참는듯한 얼굴이었다. 아빠를 보며 지을 만한 표정은 아니었다.
“전하.”
“또 아빠한테…….”
“친목이나 다지자고 그자들을 불러들인 게 아니잖아. 그쪽에서 원하는 걸 먼저 주면 치하가 아니라 상납이 되는 거야.”
이제껏 고요히 이라네리아를 바라보던 키네시아의 눈동자에 기묘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문득, 이라네리아가 고개를 돌렸다.
넓은 식탁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시선이 다시 한번 마주쳤다.
“군주에게는 권위가 필요해. 하지만 상납하는 자는 권위를 지키기 힘든 법이지.”
그녀의 말을 들으며 키네시아는 지나간 역사를 떠올렸다.
파라돈이 에피파네스를 침략했을 때, 당시 왕이었던 알리에 벨로아스는 겁에 질렸었다.
그는 레튜니아가 호시탐탐 노리던 영토를 주며 동맹국으로서 도움을 요청했었다.
그러자 영토와 부를 축적하고 있던 고위 귀족들과 주변 국가들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넌지시 드러냈다.
알리에 왕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넘기고 후에 협조를 얻어 냈다.
파라돈은 에피파네스 영토에서 물러났다. 하지만 영토는 침략당한 게 나을 정도로 줄어들었고, 영주들의 독립으로 세금 역시 반토막 나고 말았다.
그 뒤로 에피파네스에는 망조가 들었다.
‘정신 차리라는 의미로 한 말일까?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라고?’
키네시아는 잠깐 떠오른 의문을 지워 냈다.
서고에서 왕실 기록을 읽었다는 말은 들었다. 하지만 기록은 기록일 뿐 아무런 주석도 달려 있지 않다.
저런 생각을 하려면 오로지 이라네리아가 본인의 통찰력을 발휘해야만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고작 10살이었다.
‘우연이겠지.’
키네시아는 상념을 지워 냈다. 그러나 이라네리아가 한 경고를 머리에 새겼다.
그녀와 달리 룩소르는 이라네리아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 눈치였다.
“하지만 리아야. 고작 권위를 지키자고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해서야 쓰겠느냐.”
이라네리아가 드물게 입꼬리를 늘어트리며 웃었다.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그녀가 다시 식기를 들자 룩소르가 굳어 있는 가족들에게 식사를 마저 하자고 했다.
한동안 식당 안에는 식기 부딪히는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가장 먼저 식사를 끝마친 이라네리아가 우아하게 입가를 정리했다.
멍하니 있던 하인이 디저트를 가져오기 위해 재빨리 몸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보다 학자들이 먼저 돌아왔다.
그들의 흥분한 발걸음을 보자 이라네리아의 표정도 상기되었다.
사학자들은 그녀의 기대에 부응하는 말을 꺼냈다.
“이건 이라네 황제의 필체가 맞습니다. 대조해 보니 확실했습니다.”
이라네리아의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그럼! 본인이 쓴 건데 당연하지.’
내 기록이 날조로 가득해서 이 나라 학자들 머리는 다 먹통인 줄 알았는데, 그런 건 또 아닌가 보다.
이제 슬쩍 역사를 바로잡자고 운을 띄워 볼까, 생각하던 차에 사학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식 기록으로 인정할 순 없습니다.”
아니 이 먹통들이 뭐가 어쩌고저째?
만족스럽던 이라네의 표정이 순식간에 매서워졌다.
“이유가 뭔데? 친필이 맞다며.”
나름 신경 썼던 정중한 어투는 어처구니와 함께 사라지고 난 뒤였다.
“몇 가지 수상한 점이 있어서…….”
“말해 봐.”
이라네리아의 살벌한 눈빛이 제일 앞에 있는 학자의 머리로 향했다.
제대로 된 이유를 대지 못하면 풍성하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죄다 뜯어 놓고 안경도 똑 부러트릴 것만 같았다.
분명 눈매는 동글동글한데 귀신이라도 마주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그는 괜히 제 머리를 정리하고 안경을 고쳐 쓴 뒤,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툭 다른 사람을 앞으로 밀었다.
얼떨결에 튀어나온 궁정 사서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동시에 뒷걸음질 쳤다. 그게 몇 번 반복되자 이라네리아와 그들 사이는 점점 멀어졌다.
‘좀 더 기다려 주면 그대로 뒷걸음질 쳐 궁전 밖으로 나가겠네.’
보다 못한 이라네리아가 의자에서 폴짝 내려와 그들 앞에 섰다.
작달막한 아이를 보자 두려움이 조금 가신 궁정 사서가 목을 가다듬었다.
“흠흠! 일단 이라네 황제의 주장을 뒷받침할 역사적 근거가 없습니다.”
“다른 나라에 요청하면 되잖아.”
역사는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한 나라에서 발생한 일은 다른 주변 국가에 영향을 끼친다. 그러므로 당연히 주변 국가의 역사에도 흔적을 남기기 마련이었다.
‘치정의 여제’는 사생활과 인성에 관한 것이어서 주변 국가에는 기록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라네가 쓴 자서전에는 언제 어디를 정복하였는지, 통치하는 동안 어떤 법률을 만들고 동맹을 결성했는지에 관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내 자랑도 조금 섞었지만 다 사실이니까.’
어쨌든 주변 국가에 확인해 보면 충분히 진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확인도 안 해 보고 속단을 하냔 말이야.’
그 생각이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자 사학자가 변명하듯 입을 열었다.
“가장 많이 교류한 국가인 레튜니아는 이라네 황제에 관한 기록을 말소했습니다. 아무래도 렘브로스 바멜마흐 2세가 고의적으로 삭제한 듯합니다.”
죽기 전, 그가 내 손을 잡고 한 말이 떠올랐다.
‘나는 너를 잊을 것이다.’
그게 이런 뜻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