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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7화 (7/151)

<7화>

귀한 건 다 어디 가고 자잘한 보석만 돌멩이처럼 굴러다니고 있었다.

주변에 금화가 있긴 했는데, 언덕처럼 쌓아 놓았던 게 지금은 엉덩이만큼도 안 되었다.

‘도대체 어떤 새끼야. 어떤 새끼가 위대한 황제의 금고를 털어 가?’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씩씩거렸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 금고를 열 수 있는 놈은 하나뿐이었다.

“펠리온 이 개새끼!”

펠리온일 수밖에 없다.

라파일도 금고의 존재를 알고 있긴 했지만 그는 내 재물에는 한 번도 눈독 들이지 않았다.

게다가 나는 다른 사람에게는 저 재수 없고 자아도취적인 암호를 알려 준 적이 없다!

그렇다면 마법을 해제하고 금고를 열었다는 건데, 그건 불가능하다.

펠리온은 입버릇처럼 자신을 능가하는 마법사는 나올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만일 있다고 해도 어떤 미친놈이 궁전에 침입해 황제의 금고를 털어 가겠어.

물론 펠리온은 가능하다. 그놈은 미친놈이니까.

“내가! 어떻게! 모은! 보물인데!”

얼마 남지 않은 보석들을 자루에 던지듯 집어넣으며 이를 갈았다.

“만나기만 해 봐. 가만 안 둬.”

마법사는 수명이 기니 아직 살아 있을 수도 있다.

물론 호호 할아버지가 되었겠지만, 알 바야? 황제의 보물을 털어 갔는데 봐줄 순 없지. 노인 공격이 뭔지 아주 제대로 보여 주겠어.

자루가 꽉 차고도 아직 금화가 남아 있었지만 내가 모아 온 것에 비하면 티끌만도 못했다.

자루를 하나 더 가져올까 하다가 비자금으로 남겨 두기로 했다.

‘비자금 생각하니까 또 열이 뻗치네!’

보석을 챙기는 동안 발을 구르고 소리도 질렀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다.

그래도 황제는 언제나 실리를 취하는 법. 본래의 목적을 잊지 않고 자루 맨 위에 자서전을 찔러 넣었다.

‘역사는 바로잡아야지.’

여전히 성질이 뻗쳐 자루 주둥이를 머리채처럼 휘어잡고 질질 끌었다.

‘무거워 죽겠네.’

쿵쾅거리며 지상으로 나와 궁전 외벽을 빙 둘러 가고 있을 때였다.

정원 쪽에서 자그마한 불빛 몇 개가 빠르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잠시 자리에 멈춰 늦은 시간에 궁전을 돌아다니는 게 누구인지 확인했다.

후드를 쓰고 있는 게 어딘가 수상해 보였다.

‘기사들을 불러야 하나?’

고민하는데 멀리서 내 이름을 소리쳐 부르는 게 들렸다.

“리아!”

선두에서 오던 사람이 말을 급하게 멈추고 휙 뛰어내렸다.

머리에 걸쳐 두었던 후드가 뒤로 넘어가며 그녀의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굳고 말았다.

흔들리는 주홍빛에 비친 얼굴은…….

‘율시안?’

내 아들의 얼굴과 꼭 닮아 있었다.

여자애만 아니었으면 율시안이라고 착각했을 정도였다.

‘진짜 내 핏줄이긴 하구나.’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소녀가 다가와 꼭 끌어안는 것을 내버려 두었다.

“리아. 이 시간에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언니 온다고 마중 나온 거야?”

멍한 와중에도 내 뛰어난 머리는 소녀의 정체를 추론해냈다.

“키네시아?”

“응. 왜, 언니가 돌아온 게 안 믿겨?”

대충 그렇다고 하자.

고개를 끄덕이고 마음을 가다듬었다. 빤히 보고 있으니 그리운 기분도 조금 가셨다.

뒤늦게 잡힌 손을 빼내자 키네시아의 시선이 자루로 향했다.

“이건 뭐야?”

“내일이면 알게 될 거야.”

“혹시 나 주려고 준비한 거니? 선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키네시아가 활짝 웃으며 나를 한 번 더 꼭 끌어안은 뒤 몸을 돌렸다. 뒤따라오던 기사들이 걸음을 멈췄다.

“모두 저를 따라 일정을 재촉하느라 고생했습니다. 이만 돌아가 푹 쉬세요.”

“예, 공주님.”

기사들이 절도 있는 동작으로 경례하고 자리를 떠났다.

키네시아가 다시 내 손을 잡고 본성으로 들어가려다가 새까맣게 불탄 별관을 발견했다.

“저건 왜 저래?”

“탔어. 불이 났는데 수리할 돈이 없나 봐.”

“그렇다고 그냥 저렇게 둔 거야? 곧 사신들이 올 텐데……. 그대로 두면 분명 얕잡아 보일 거야.”

이제야 말이 통하는 애가 왔네. 역시 내 아들을 닮은 애라 그런지 똑똑한가 보다.

흐뭇하게 바라보는데 키네시아가 손을 뻗었다.

“리아. 무거워 보이는데 언니가 들어 줄게.”

“됐어. 내가 해.”

그녀가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거두고 걸음을 옮겼다.

“애들이랑 부모님은?”

“자겠지.”

심드렁하게 말하자 키네시아가 놀란 눈으로 나를 봤다.

“왜?”

“그냥. 우리 리아, 성격이 좀 변한 것 같아서. 몇 년 전만 해도 귀여웠는데.”

“애들은 금방 자라잖아.”

키네시아가 볼을 꼬집으려고 손을 뻗길래 살짝 피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키네시아와 조금 거리를 둔 채 마주 섰다.

“그럼, 아침에 봐.”

“같이 자자고 안 조르네? 이제 어디 가지 말란 말도 안 하고.”

“내 나이가 몇인데.”

코웃음을 치고 몸을 돌려 계단을 올라갔다.

왕족들의 방은 2층에 있으니 따라오는 소리가 들릴 줄 알았는데 등 뒤는 고요하기만 했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나를 빤히 보고 있었다.

“방 어딘지 까먹었어?”

“아니, 설마.”

키네시아가 고개를 젓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나를 향해 작게 인사했다.

“잘자, 리아.”

나는 고개만 끄덕이고 방으로 향했다.

***

“키네시아!”

식당으로 들어서자마자 플로레타가 키네시아의 품으로 달려들었다. 그녀는 제 여동생의 등을 토닥였다.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포넨트가 제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데면데면하게 인사했다.

“어, 왔냐?”

“응. 잘 지냈지?”

“그냥 그렇지, 뭐.”

키네시아가 포넨트의 옆으로 가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리아는?”

“아직 안 내려왔어.”

플로레타가 키네시아의 품을 벗어나며 대답했다.

키네시아는 이라네리아와 마주쳤던 시간을 가늠해 봤다.

‘많이 늦은 시간이긴 했지.’

그래도 누군가 깨워서 준비시킨 뒤 내려보내긴 했을 텐데. 아직 자리에 없다는 게 이상했다.

키네시아가 의아한 표정으로 빈자리를 보자 포넨트의 얼굴이 뚱하게 변했다. 그는 탁자에 팔꿈치를 올리고 턱을 괬다.

“내버려 둬. 걔 요즘 이상해. 갑자기 나무에 머리를 들이박질 않나.”

“말투도 좀 변했어…….”

“갑자기 괴팍해지지 않았냐?”

“맞아 맞아. 요즘엔 뭘 해도 심드렁하고 잘 웃지도 않잖아.”

“밥도 자주 걸러.”

“저번에는 무슨, 서고에 처박혀서 밤새 왕실 기록을 읽더라니까? 그것도 별관이 불탄 날에. 납치라도 당한 줄 알고 난리 났었잖아.”

키네시아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언제부터 그랬는데?”

“한 일주일 됐나?”

키네시아는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커다란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빛을 응시했다.

그러다 입구 쪽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국왕 부부가 안으로 들어오다가 키네시아를 발견했다.

그들은 빠르게 다가와 양옆에서 키네시아를 끌어안았다.

“키네시아. 보고 싶었단다.”

“잘 지냈느냐? 다친 곳은 없고?”

룩소르가 키네시아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러면서 몸 이곳저곳을 살펴보고 울음을 참는 듯 입을 꾹 다물었다.

키네시아는 제 아버지를 걱정시키지 않기 위해 의젓하게 웃었다.

“파라돈에서 많이 배우고 편하게 지냈어요.”

“그렇다면 다행이다만, 타국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겠니.”

“괜찮아요. 정말 걱정하실 일은 하나도 없었는걸요.”

오틸리에 왕비가 키네시아의 머리에 입을 맞추고 꼭 끌어안았다.

룩소르는 울먹이며 팔을 크게 벌려 두 사람을 한꺼번에 감쌌다.

“내 딸. 네가 없어서 얼마나 허전했는지. 돌아온 걸 환영한단다.”

“저도 돌아와서 기뻐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키네시아가 몸을 기댔다.

룩소르가 그대로 플로레타와 포넨트에게 손짓했다.

두 사람이 다가오자 룩소르와 오틸리에는 품을 더 벌려 세 아이를 한 번에 안아 주었다.

때마침 식당으로 들어오던 이라네리아가 그 모습을 보며 감탄했다.

“얼씨구.”

만나자마자 얼싸안고 기뻐하거나 안부를 물어본 가족들과 달리, 이라네리아는 키네시아에게 힐끗 눈길만 줄 뿐이었다.

어제도 그렇고, 보고 싶어서 새벽까지 기다렸다는 사람치고는 심심한 반응이었다.

담백하다 못해 건조할 지경이었다.

마찬가지로 의아하게 여긴 룩소르가 이네리아가 앉기 전에 부드럽게 타일렀다.

“리아. 언니한테 인사는 해 줘야지 않겠느냐. 오랜만에 보았는데.”

“오랜만 아니야. 새벽에 봤어.”

룩소르가 키네시아를 보았다.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이라네리아가 검지를 까딱여 하인을 부르고 식탁을 톡톡 두드렸다.

이라네리아를 따라온 하인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차마 왕의 식탁 위에 먼지 묻은 자루를 둘 수 없었는지 우물쭈물거리기만 했다.

이라네리아가 쯧쯧 혀를 차고는 하인의 팔을 끌어 자루를 식탁 위에 놓게 했다. 그리고 식사용 나이프를 들어 단번에 자루의 끈을 잘랐다.

하인이 들어왔을 때부터 자루를 주시하던 포넨트가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물었다.

“뭐야?”

이라네리아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름하게 올리고는 자루에 든 것을 식탁 위로 쏟았다.

반짝거리는 보석과 금화, 은화가 와르르 굴러떨어졌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리아, 이게 도대체…….”

키네시아는 양손을 오목하게 모아 보석을 퍼 올렸다. 다른 가족들은 차마 이라네가 가져온 보석에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이라네리아는 거만한 표정을 지으며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이라네 황제의 금고에서 찾았어. 팔아서 살림에 보태.”

만져 봐야 보석에 파묻힌 자서전을 발견할 텐데, 룩소르는 얼빠진 표정만 짓고 있었다.

조금 기다리던 이라네리아가 결국 가볍게 혀를 차며 보석 안으로 손을 쑥 집어넣어 헤집었다.

이라네리아가 곧 얇은 책 하나를 빼냈다. 하지만 보석에 정신이 팔려 이라네리아가 밤새 저술한 자서전에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라네리아가 작은 입술을 비틀었다. 아직 젖살조차 빠지지 않은 볼이 불만스럽게 튀어나왔다.

몇 번 헛기침 해도 시선을 주지 않자 그녀는 책을 쿵 소리가 나게 올려 두었다.

그제야 가족들이 이라네리아를 쳐다봤다. 그녀는 책을 룩소르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건 살림에 보태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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