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떨떠름한 표정으로 플로레타를 쳐다봤다. 그녀는 내 뚱한 표정을 보고 겁을 먹었다고 생각했는지 한 발자국 더 다가와 속삭였다.
“그리고 그 폭군이 아주아주 흉악한 죄수들을 풀어 뒀대.”
죄수들은 전부 제대로 감금해 놓았다가 형이 끝나면 무사히 풀어 주었는데, 이건 또 무슨 날조야?
물론 무기징역수도 있었다.
만에 하나 그중 한 죄수가 운이 좋아 족쇄를 풀었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100년이나 지났는데 살아 있을 리가 없잖아.”
보니까 내가 죽고 나서는 쓰지도 않은 것 같던데.
두 사람 사이를 파고들려는데 포넨트가 나를 번쩍 들어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들어가면 해골들이 담쟁이넝쿨처럼 벽에 붙어 있을걸?”
“바닥에도! 잡초처럼 수두룩할 거야.”
“상관없는데.”
두 사람을 한꺼번에 밀어내려고 했으나 이 몸보다 큰 소년 소녀를 치워 버리는 건 무리였다.
‘이것들이 진짜. 내가 불쌍해서 돈 좀 나눠 주려고 했더니! 도와주려고 해도 난리네.’
결국 두 사람의 등쌀에 떠밀려 별궁과 점점 멀어졌다.
둘을 따돌리고 별궁으로 가려 하자 포넨트가 나를 달랑 들어 등에 업었다.
땅속에 금은보화가 있다는 걸 알기에 내 속은 터져 나갔다.
그러나 반항하진 않았다. 어차피 지금은 힘으로 두 사람을 못 이긴다. 버둥대 봤자 괜히 힘만 빼는 거지.
‘오늘만 날도 아니고. 몸을 웅크리고 때를 기다리는 것 또한 군주의 미덕이지.’
……절대 업혀 있는 게 편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다.
나는 달랑거리는 발을 더 흔들었다.
플로레타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보며 걷고 있었다. 제 딴에는 나를 감시한다고 저러는 것 같은데, 저러다 넘어지지.
생각하자마자 플로레타가 돌부리에 걸려 휘청거렸다.
“앞을 보고 걸어야지.”
손을 뻗어 팔뚝을 잡아 주자 플로레타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언닌데…….”
소심하기는. 혀를 가볍게 차고 적당한 주제로 말을 걸어 주었다.
“키네시아는 언제 도착해?”
“나도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오늘 온다고 했으니까……. 아마 늦어도 내일쯤엔 도착하지 않을까?”
“늦더라도 오늘 올 거야. 아니면 새벽에 오든가.”
포넨트가 의문문으로 끝난 플로레타의 말을 단정 지었다.
보통 귀족들은 약속한 날짜보다 사나흘 늦는다. 워낙 게으르기도 하고, 맞이하는 쪽을 배려하는 것이기도 했다.
조금 늦어야 준비할 시간이 충분해지니 말이다.
“그럼 사신들도 그때 오나?”
“사신들은 아마 더 늦게 도착할걸. 키네시아는 성실한 애라 말한 시간을 지킬 거야. 궁전을 앞두고 늦장 부릴 리가 없거든.”
키네시아는 제법 정신머리가 박혀 있는 후손인 모양이다.
자랑스러울 내용임에도 포넨트의 목소리는 어딘가 씁쓸했다.
‘키네시아와 포넨트가 쌍둥이랬나?’
키네시아가 먼저 태어나긴 했으나 몇 분 차이가 안 난다는 기록을 봤었다.
그 정도 차이면 보통 왕자를 보낼 텐데.
“동맹국에서 볼모로 공주를 요구했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몸을 받치고 있던 손이 훅 사라졌다. 물론 나는 언제나 준비된 황제이기에 당황하지 않고…….
“으악!”
……조금 당황한 채로 땅에 무사히 착지했다.
“리아, 괜찮아?”
허둥대는 플로레타를 손으로 저지하고 일어나 엉덩이를 털었다. 고개를 들자 양 주먹을 꽉 쥐고 있는 포넨트가 보였다.
이내 그가 버럭 소리쳤다.
“걔가 가겠다고 한 거야!”
“누가 뭐래?”
“너, 진짜……!”
포넨트가 나한테 달려들 듯이 씩씩거렸다. 그러다 몸을 홱 틀어 비련의 주인공처럼 궁전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뭐야, 왜 저래. 사춘긴가?”
“……사춘기긴 한데, 그것 때문은 아니지 않을까?”
플로레타가 조심스럽게 내 말을 부정했다.
그러나 내 관심이 이미 그녀와 포넨트에게서 멀어진 뒤였다.
‘플로레타 하나 정도면 어떻게 구워삶을 수 있을 것 같은데. 힘 좀 쓸 줄 알려나?’
플로레타의 팔뚝 굵기를 보며 보물의 양을 가늠해 봤다.
그녀의 힘은 딱히 쓸 만해 보이진 않았다.
역시 다음을 기약하는 게 낫겠다 싶어 걸음을 옮기자 플로레타가 나를 따라왔다.
“리아, 그러니까 왜 그런 말을 했어. 포넨트가 그 일로 죄책감 가지고 있는 거 알면서.”
모르는데.
“키네시아랑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플로레타가 나를 빤히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서 사과하자.”
그리고 내 손을 잡아끌었다.
포넨트에게로 데려가려는 것 같아 잡힌 손을 빼냈다.
“혼자 발끈해서 화낸 것 같은데, 두면 풀리겠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발을 동동 구르는 플로레타의 어깨를 잡고 정원 쪽으로 돌려세워 주었다.
“자, 너도 정원으로 돌아가서 꽃구경이나 마저 해.”
플로레타를 내버려 두고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쓸 만한 놈이 없다. 그냥 혼자 들어가서 들 수 있는 만큼만 가져올까? 그것도 나쁘진 않겠네.
고민하던 차에 내 업적을 바로잡을 방법이 번뜩 떠올랐다.
‘오히려 잘됐어.’
자서전을 써서 금고에 넣어 두자.
어차피 지금 공식 기록으로 인정되는 것도 소설에 불과하다. 그런 허무맹랑한 것보다는 자서전을 더 믿겠지.
그리고 아무리 망할 왕국이라도 선조 중에 성군이 하나라도 더 있는 게 낫지 않겠어?
암. 그렇고말고. 폭군이 한 명 더 있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금고와 함께 발견했다고 하면 자기들끼리 알아서 공식 기록을 수정할 것이다.
……살짝 못 미덥긴 하지만 말이다.
해 보긴 해 봐야지. 성공하면 성불이다!
깍지 낀 손가락을 이리저리 비틀어 우드득 우드득 손을 풀었다.
‘최대한 짧고 간결하게, 하지만 중요한 업적은 다 담아서 쓰는 거야.’
까짓것 어려워 봤자 얼마나 어렵겠어.
문을 걸어 잠그고 최대한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식사 시간이 되자 도라가 문을 두드렸다.
“공주님. 식,”
“안 먹어!”
문밖에서 뭐라고 잔소리가 들렸다.
대답하지 않고 할 일을 하고 있자 한숨 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멀어졌다.
잠깐 집중이 끊어진 김에 램프에 불을 붙였다.
다시 집중하면 날이 어두워지는 것도 모를 게 뻔했기 때문이다.
내 예상대로 업적 아래에 간단한 평가와 감상을 달고 나자 창밖이 어두워져 있었다.
미리 켜 둔 램프를 들어 벽시계를 확인했다.
‘새벽 1시.’
좋아. 이제 이걸 지하로 들고 갔다가 보물과 함께 발견한 척하면 된다.
책을 품 안에 넣고, 미리 준비해 둔 자루 하나를 챙겼다.
그리고 밖으로 나와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역시나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화재로 정신이 없어서 치안이 허술해진 건 줄 알았는데, 그냥 원래 허술한 모양이다.
‘이러니 국왕이 공주를 구하러 불 속에 뛰어들지.’
덕분에 살아 있긴 하지만, 국왕의 신변에 문제가 생기면 나라가 흔들릴 수도 있다.
제대로 된 후계자도 없는데 국왕이 위험하도록 내버려 두다니. 내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도대체 이 나라 기사들은 뭘 하는 건지 모르겠네. 훈련을 어떻게 시킨 거야?
혀를 차며 뒤뜰에 있는 지하 감옥 입구에 섰다.
아래로 내려가자 앞이 막힌 복도가 보였다. 비밀통로를 여는 방법은 소수만 알기에 따로 경비가 필요하지 않았다.
‘덕분에 사람이 없어서 편하게 드나들 수 있었지.’
한참 귀족들을 털어먹고 다닐 때는 내가 미궁에 사람을 가둬 두고 말라 죽어 가는 것을 구경하며 즐긴다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돌기도 했…….
‘잠깐.’
내가 폭군이라는 소문의 출처를 방금 깨달은 것 같은데?
하여튼 이게 다 말 옮기기 좋아하는 놈들 때문이다.
나처럼 선량한 사람이 폭군이라는 오명을 다 뒤집어쓰고 말이야!!
‘헛소리하기 전에 다 저승으로 치워 버렸어야 했는데.’
아쉬움을 느끼며 벽을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그러자 일곱 번째 촛대와 여덟 번째 촛대 사이의 벽이 안으로 열렸다. 동시에 안에 박힌 마력석이 환하게 빛나며 복도를 밝혔다.
긴 계단을 내려가다가 완벽하게 감추어 놓아 그냥 벽처럼 보이는 금고 문 앞에 섰다.
“암호가 뭐였더라?”
엄청 입에 담기 싫은 말이었던 것 같은데.
팔짱을 끼고 서서 금고를 처음 만들었던 날을 떠올렸다.
과거의 잔상일 뿐인데 펠리온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것만 같았다.
‘금고를 열 수 있는 조건은 두 가지야. 첫째. 이라네 너 본인이거나, 네 피를 이었을 것. 둘째. 암호를 알고 있을 것.’
‘하나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암호를 틀리는 건 상관없지만 피를 잇지 않았다면 지독한 악몽에 시달리게 되겠지.’
기억 속의 펠리온이 푸른 눈을 음산하게 빛냈다.
‘문 앞을 벗어나도 공포에선 벗어나지 못할 거야.’
‘뚫릴 일은 없겠지?’
‘내 마법을 파훼하면 열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있을 리가.’
‘잘했어. 암호는 뭔데?’
‘좀 긴데 바로 따라 할 수 있겠어?’
‘나 황제야.’
‘황제에겐 흠이 없는 법이고? 잘 알지.’
펠리온은 씩 웃고 내 손을 끌어다가 벽 위에 올려놨었다.
나는 기억 속 그 위치에 손을 올렸다.
‘이제 말할 거야. 그대로 따라 해.’
‘알겠으니까 그만 뜸 들이고 빨리빨리 하자. 나 바빠.’
‘하여간 성질 급하긴. 한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입을 열었다.
‘펠리온, 사랑해. 내 마음을 받아 줘.’
‘펠리온, 사기 치는 거야? 뒤질래?’
‘아니아니, 좀 다르잖아. 다시 제대로 따라……, 아야. 알겠어, 알겠어.’
‘뜩브르해라.’
이를 악물고 말하자 그가 제대로 된, 그러나 여전히 짜증 나게 만드는 암호를 읊었다.
“펠리온. 현존하는 가장 강력한 마법사. 위대한 현자. 드래곤의 화신. 마법으로 가려진 문을 열어 주시오.”
떠오르는 말을 그대로 따라 하자 공간이 반전되었다. 그리고 이내 눈앞이 오색찬란한 빛으로 번쩍……,
번쩍!
……번쩍여야 하는데……?
“어디 갔어.”
천장에 닿을 정도로 쌓여 있어야 할 금은보화! 온갖 마법 물품들과 마정석!
“어디 갔냔 말이야, 내 보무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