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어머, 또 혼자 일어나셨네요.”
하녀 도라가 나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벌써 며칠째 저렇게 놀라고 있다.
나는 며칠째 성불을 못 하고 있고 말이다.
그동안 정말 최선을 다했다.
종일 기도도 해 보고, 잠도 자 보고, 벽에 머리를 박고 기절도 해 봤다.
유체이탈도 해 보고 싶었지만 어떻게 하는지 몰라 실패했다.
혹시 이 몸에 후손의 영혼이 살아 있을 것을 감안해 목숨을 끊는 짓 같은 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을 제외하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황제로서의 위엄도 기꺼이 내려놓았다.
‘그런데 왜 성불이 안 되냐고!’
성불은커녕 미친 사람 취급만 받았다.
그래서 내가 처음 이라네리아의 몸에 들어왔을 때를 생각해 봤다.
궁전에 불이 났었지. 혹시 그 상황으로 만들면, 불길에 갇혀서 기절하면 이 몸에서 나갈 수 있지 않을까?
마침 적당히 태울 만한 것도 생각났다.
나에 대해 개같이 기록해 둔 것들을 모아다 불쏘시개로 써야겠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나왔다.
“공주님! 또 어디 가세요, 공주님!”
도라를 따돌리고 서고로 들어갔다.
성불의 제물이 될 부정한 책을 고르고 있는데, 유리 액자 안에 보관된 편지 한 장이 보였다.
다 낡아 빠지고 찢어져서 내용은 일부밖에 보이지 않았다. 누가 보면 쓰레기인 줄 알고 버릴 만한 모양새였다.
그러나 나는 이 종이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약 110년 전, 내가 쓴 편지였다.
파라돈 놈들이 동맹국인 우리나라를 배신하고 레바나 신전과 손잡았다는 걸 듣고 홧김에 펠리온에게 보낸, 아주 사적인 편지.
[아, 진짜 빡쳐서 돌아버리겠네. 파라돈 이 오장육부로 장기 자랑을 하게 만들 놈들. 감히 날 등쳐 먹어?
걸리기만 해 봐. 아니, 안 걸려도 뒤졌어. 내가 파라돈의 그 조막만 한 영토를 백 갈래로 찢어 놓지 않으면 황제가 아니다. 겸사겸사 동조한 귀족 놈들 목도 날려 버릴…….]
우아하고 위엄 있는 말투로 쓴 공식적인 문서는 다 어디 가고 이런 게 귀한 대접을 받고 있어?
이러니까 내가 폭군 소리를 듣지!
다시 열불이 뻗쳐서 양손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순간, 섬광처럼 깨달음이 번쩍였다.
‘그래, 이거야!’
내 기록이 엉망인 건, 그야말로 내가 죽어서도 억울해할 일이었다.
그래서 다시 깨어난 건 아닐까?
내가 이룩한 위대한 발자취가 왜곡되는 것을 가엾이 여긴 샤마흐께서 나를 후손의 몸에 넣어 준 것일 수도 있잖아.
그게 맞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돌아올 이유가 없어.
‘후손아. 미안하지만 좀 더 기다려 주렴. 내가 역사를 바로잡으면 자동 성불이 될 것 같거든?’
위대한 황제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대가라고 생각하렴.
내가 위명을 되찾으면 너도 영광을 누리고 살 테니까!
속으로 이 몸의 주인과 합의한 뒤,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으로 나오자 나를 쫓아온 도라와 마주쳤다.
“공주님. 자꾸 사라지시면 저 정말 간 떨어져요.”
“간은 그렇게 쉽게 떨어지는 물건이 아니야.”
“어휴, 정말. 속 터져 죽겠네!”
도라가 가슴을 내리치는 걸 못 본 체하고 복도를 걸었다.
하인들이 평소보다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오늘 무슨 일 있어? 좀 어수선하네.”
뒤따라오던 도라가 걸음을 우뚝 멈췄다.
아랑곳하지 않고 내 갈 길을 가니 그녀가 다시 따라오며 황당하다는 투로 물었다.
“이날만 손꼽아 기다리셨으면서……. 정말 잊으신 거예요?”
“응.”
“키네시아 공주님이 돌아오시는 날이잖아요.”
“아. 키네시아?”
포넨트의 쌍둥이 누나이자 망할 왕국의 첫째 공주?
걔가 돌아오는 날이구나.
“그렇네. 근데 쟤네는 뭐 하는 거야?”
턱짓으로 창밖을 가리키자 도라가 목을 빼 확인하더니 대답했다.
“귀환 축하 파티가 열릴 테니 궁전을 장식해야죠. 외국 사신들도 오거든요.”
“저게?”
나무에 무슨 거적때기 같은 걸 얹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레이스였다. 너무 헤져서 멀리서 보면 바람에 흩날리는 거미줄처럼 보일 정도였다.
귀환 축하 파티 장식이라며. 어디로 귀환하는데? 저승?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그러면 궁전이 심심하잖아요.”
“으스스한 것보다는 낫지.”
“…….”
도라가 모호하고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을 바쁘게 움직였다.
에피파네스 인들의 심미안이 다 이상해진 줄 알았는데 다행히 그런 건 아닌가 보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지나쳐 가자 다 꾸며진 공간이 나왔다.
다른 나라 사신들도 온다며. 도금한 장식품은 왜 꺼낸 거야? 칠 벗겨진 촛대만으로는 가난함을 뽐내기 부족했나?
뒷골이 당겨 눈을 감고 깊은숨을 내쉬는데 어깨가 묵직해졌다.
고개를 돌리니 포넨트가 보였다. 그가 나를 향해 씩 웃어 보였다.
“아침부터 웬 한숨이야?”
이놈 마침 잘 만났다.
“너 잠깐 따라와 봐.”
“어? 왜?”
왜긴 왜야. 이 망할 왕국이 여기저기에 웃음거리가 될 것 같으니까 그렇지.
물론 나도 망할 왕국이라고 욕하긴 했지만, 나는 그래도 된다.
내가 일궈 놓은 것을 후손 놈들이 망쳤으니까. 욕할 자격이 된단 말이야.
하지만 다른 나라 놈들에게 무시당하는 건 못 참지. 까도 나만 까고, 비웃어도 나만 비웃을 거야!
그러니 어디 가서 기죽지 않도록 얼굴에 금칠 좀 해 줘야겠다.
의아한 표정의 포넨트를 질질 끌고 걸었다.
내가 진짜 이건 죽을 때까지 비밀로 안고 가려고 했는……. 아, 이미 죽었구나.
그래. 죽은 뒤에도 혼자 비밀로 간직하려고 했는데 특별히 알려 준다.
아마 보면 까무러칠걸.
“힘쓸 놈이 필요해서 데려가 주는 거니까 영광인 줄 알아.”
“오빠한테 놈이 뭐냐, 놈이? 키네시아 온다고 아주 막 나가지?”
귓바퀴를 향해 뻗어 오는 손을 휙 피하고 궁전 밖으로 나왔다.
나는 그를 이끌고 건물 뒤쪽으로 갔다. 그곳에는 지하로 통하는 문이 있었다.
잘 따라오던 포넨트는 내가 지하 감옥 입구 앞에 서자 걸음을 멈췄다. 문을 열려는데 그가 경악하며 나를 붙잡아 세웠다.
“야! 너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온 거야?”
“아는데.”
“도서관에 가는 줄 알았더니…….”
“아닌데.”
“아니어도 여긴 내려가면 안 돼.”
“괜찮아.”
“안 된다니까!”
“괜찮다니까?”
황제일 때 귀족들이 불법적으로 모은 비자금을 나 역시 불법적으로 빼앗았는데, 둘 곳이 없어서 그냥 금고에 숨겨 두었다.
외교 사절단 앞에서 체면치레할 정도는 꺼내 줄 수 있었다.
100년이나 지났으나 마법을 여러 겹 둘러 두었으니 누군가 훔쳐 갔을 리도, 변질됐을 리도 없었다.
금고는 지하 감옥 아래에 있는 데다가 가려면 비밀통로를 열어야 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라 금고 문을 열려면 암호를 알아야 한다.
그러니 아직 내 보물들은 멀쩡히 잘 있을 것이다.
누가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어보면 대충 기록에서 봤다고 하면 된다.
1,000권에 달하는 왕실 기록을 다 읽어 본 사람이 어디 있겠어?
“쉿! 조용히 하고 따라와.”
“안 돼. 못 가.”
포넨트가 그 자리에 서서 팔짱을 끼고 버텼다.
위대한 황제의 금고를 깜짝 공개하겠다는데 말이 많네. 그래, 싫으면 말아라.
“나 혼자 가지 뭐.”
포넨트를 놓고 지하실 감옥으로 향하는 문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자기 몸이 번쩍 들리더니 배가 포넨트의 어깨에 짓눌렸다.
이게 어디 감히 황제를 들쳐 메?!
마침 눈앞에 보이는 포넨트의 등을 손으로 마구 내리치며 발을 버둥거렸다.
“야! 놔! 안 놔? 이게 어딜, 무엄하게!”
그가 잠깐 멈췄다가 한숨을 내쉬며 걸음을 옮겼다. 성큼성큼 걸은 그는 별궁을 나오고 나서야 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구제 불능의 말괄량이를 보는 눈을 하고는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너 진짜 요즘 왜 이러냐.”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지 눈이 저절로 먼 산을 향한다.
근처에서 꽃을 구경하고 있는 플로레타가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다가왔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데 포넨트가 대답을 재촉했다.
“진짜 왜 그러냐고!”
“크흠. 흠! 내가 뭘?”
“망아지처럼 굴잖아.”
플로레타가 조용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건 원래도 그랬어.”
갑작스러운 목소리에 포넨트가 잠시 심장을 부여잡았다가 고개를 끄덕여 수긍했다.
“그건 그렇지. 그런데 지금은…….”
그는 적당한 비유를 찾는 듯 턱을 괴고 고민했다.
“그래! 예전이 그냥 망아지라면 지금은 미친 망아지야.”
그것참 놀랍고도 감탄스러운 표현력이다. 오래 고민한 만큼 아주 잘 나왔다.
콧방귀를 뀌고 몸을 돌렸다.
다시 별궁으로 가려는데 포넨트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눈치를 보던 플로레타가 손끝으로 내 옷자락을 조심스럽게 붙잡았다. 소심한 손길을 톡 쳐서 떨어트리고 고개를 들었다.
포넨트가 엄한 표정으로 내 눈앞에 검지를 들이대고 있었다.
콱, 깨물어 버릴까 보다.
“진짜 안 돼. 네가 가려던 곳은 지하 감옥이라고.”
감옥에 들어가려던 나는 심드렁한데 옆에 있던 플로레타가 놀란 토끼처럼 펄쩍 뛰었다.
“지, 지하 감옥?”
“그래!”
플로레타의 반응에 포넨트는 신이 난 모양이었다.
그가 어린애를 겁주듯 양손을 들어 올리고는 좌우로 흔들며 내 쪽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게 그냥 지하 감옥인 줄 알아? 아주 무시무시한 미궁이 있어. 들어가면 나오지도 못한다고.”
옆에서 플로레타가 거들었다.
“맞아. 엄청난 폭군이 설계했다고 들었어. 그, 있잖아……. 이라네 황제 말이야.”
그게 나다.
그러니까 폭군이라고 하지 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