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울먹이는 플로레타를 뒤로하고 방으로 돌아갔다.
옷장을 뒤져 후드를 걸쳤다. 깊게 눌러쓰자 얼굴이 완전히 가려졌다.
정문으로 나가면 기사들에게 걸릴 게 뻔했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비밀통로로 향했다.
보통 이런 곳은 군주의 직속 정예 기사가 순찰을 돌기 마련인데.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군!
“쯧쯧.”
도대체 몇 번이나 혀를 차는 건지. 이러다 혀에 쥐 나겠네.
통로를 지나 밖으로 나오긴 했는데 막상 도시로 나가려니 조금 무서웠다. 왕국 꼴도 이런데 도대체 백성들은 얼마나 처참하고 굶주린 삶을 살고 있을까?
벌써 혈압이 오르고 뒷골이 당겼다.
한숨을 내쉬며 숲을 지나 시가지로 들어섰다.
나는 광장 중앙에 멈춰 서서 사람들의 표정부터 살폈다.
‘응? 의외로 괜찮네?’
못 먹은 티가 나는 사람들도 얼굴이 밝았다. 풍족해 보이는 사람은 몇 없었으나 거리에는 활력이 넘쳤다.
‘나쁘지 않군.’
궁전을 벗겨 먹은 모지리지만 그래도 백성은 살피는 모양이지?
룩소르에 대한 평가를 개미 눈물만큼 높여 주며 걸음을 옮겼다.
신전의 위치는 신이 정해 주는 자리로, 어지간하면 바뀌지 않아 찾기 쉬웠다.
그런데.
“여긴 또 왜 이래?”
남동 대륙 최대 규모의 샤마흐 신전은 아네스 궁과 같은 꼴이 되어 있었다.
톡 치면 무너질 것만 같은 거지꼴이라는 뜻이다.
‘라파일이 알면 무덤에서 기어 나오겠네.’
***
예부터 남동 대륙은 태양의 신 샤마흐를, 북서 대륙은 달의 신 레바나를 모셨다.
두 대륙 사이를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거대한 대양은 이상 기후가 빈번히 발생했고, 온갖 암초들이 즐비했다.
그런 이유로 살아서 대양을 건너는 건 드래곤의 비늘을 떼 오는 것만큼 어려웠다. 그러다 보니 두 대륙 간의 교류 역시 거의 없었다.
‘내가 죽기 20년 전까진 그랬었지.’
안전한 항로를 개척한 뒤로 레바나 교는 빠르게 남동 대륙으로 침투했다.
몇몇 왕국들이 레바나 교를 국교로 삼았고, 당연히 샤마흐 교는 신도들을 빼앗겼다.
위기를 느낀 샤마흐 교단은 레바나 교를 몰아낼 힘이 필요했다. 마침 나는 영토를 확장할 명분이 필요했으므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성자인 라파일과 혼인했다.
신의 아들을 내 곁에 세우고, 신의 이름을 앞세워 성전을 일으켰다.
그 전쟁으로 레바나 교를 국교로 삼았던 왕국들을 흡수하고 레바나 교를 대륙에서 몰아냈다.
샤마흐 교단이 다시 바로 선 후에도 라파일이 내 곁을 떠나지 않은 것은 의외였지만 말이다.
‘후계자를 봐야 제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그건 펠리온하고 낳아도 돼. 네가 너무 성스럽게 생겨서, 좀……. 죄짓는 것 같아.’
‘죄라니요?’
‘신성모독.’
‘…….’
그렇게 말했을 때 라파일이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무리 교단의 위신을 굳건히 하고 싶어도 그렇지, 감히 황제 앞에서 눈을 불경스럽게 뜨고 말이야.
라파일의 눈을 쿡 찔러 불손함을 지워 주는 상상을 하며 신전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안 계시오?”
주변을 둘러보며 사람을 불렀다. 한참을 기다렸으나 바람이 깨진 유리창을 통과하는 소리만 웅웅거렸다.
“이리 오너라!”
아무도 이리 오지 않았다.
신관이 신전을 비울 리가 없는데? 진짜 망한 건가?
당황스러워 멍하니 서 있었다.
그때, 구석에서 오래된 문이 삐거덕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리가 들린 쪽으로 몸을 틀며 물었다.
“누구냐?”
“제가 할 말인데, 누구십니까?”
모습을 드러낸 남성은 수척한 몸 위로 낡아 빠진 신관복을 입고 있었다.
“아무도 찾지 않은 지 한참 되었는데, 어린 아가씨께서 무슨 일로 오셨을까. 부모님은 어디 계십니까?”
“부모님은 편안한 곳에 있고, 나는 성수를 얻으러 왔소.”
“뭐를요?”
“성수.”
“악령에라도 씌었습니까?”
저게 누구더러 악령이래.
가만히 노려보자 신관이 가래 낀 목소리로 웃더니 손가락을 들어 내가 들어왔던 곳을 가리켰다.
“이곳엔 성수가 없습니다. 레바나 신전으로 가 보십시오.”
도움을 구하는 신도에게 다른 신을 찾아가라고 한다고?
‘이 꼴을 막기 위해 라파일이 성자의 몸으로 결혼해서 애까지 낳았는데…….’
나는 나가지 않고 몸을 완전히 돌려 그와 마주 봤다.
“기도라도 해 주시오.”
“소용없습니다. 이미 샤마흐께서 은총을 거두신 지 오래입니다.”
“그건 신관들이 신성력을 쓰지 못한다는 뜻이오? 전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겁니까, 아니면 제가 마지막 남은 신관인 것을 알면서 놀리는 겁니까?”
신관의 얼굴에 슬슬 노기가 어렸다.
“아니, 그런 게 아니라 나는 정말 몰라서……. 미안하,”
“됐습니다! 나가십시오, 어서!”
사과를 하기도 전에 등 떠밀려 쫓겨났다.
문을 쾅 닫는 소리에 사람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망한 신전에서 쫓겨나는 망할 나라 공주라니.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네.
후드를 앞으로 더 잡아당겨 얼굴을 완전히 가리고 고민했다.
‘어쩌지? 정말 레바나 신전이라도 찾아가 봐야 하나?’
에피파네스 왕국의 국교는 샤마흐 교이니 레바나 신전을 찾으려면 국경을 넘어야 할 것이다.
천천히 걸으며 손쉽게 성불할 방법이 없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동시에 이질적인 건물이 눈길을 낚아챘다.
화려한 달의 문양을 전면에 붙인 번쩍번쩍한 건물.
레바나 교의 신전이었다.
‘이게 왜 여기에 서 있어?’
한 나라에 두 교단의 신전이 있다니. 세상이 거꾸로 돌아가는구나.
심지어 관리되지 않은 도로와 허름한 집들 사이에 혼자만 휘황찬란했다. 마치 누더기에 황금 단추를 달아 놓은 것 같았다.
신전은 교단에서 관리하니 가능한 일이었다.
다시 말해 ‘망함 임박’ 꼬리표를 달고 있는 샤마흐 교와 달리, 레바나 교는 대륙에서 제대로 자리 잡았다는 뜻이다.
순간 눈앞이 아찔하며 라파일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지만,
‘알 게 뭐야. 어떤 신이든 성불만 시켜 주면 되지!’
이미 뒈진 마당에 샤마흐든 레바나든 알 게 뭐람.
신전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이리 오라고 부를 새도 없이 은으로 된 장신구를 주렁주렁 단 신관이 느긋하게 걸어 나왔다.
“이게 누구십니까? 막내 공주님 아니십니까?”
이놈은 누구길래 왕족을 옆집 꼬마처럼 부르냐?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려는데 신관이 사탕 하나를 내밀었다.
“또 놀러 나왔다가 길을 잃으셨습니까?”
곤란하게 됐네. 아무래도 아는 사이인가 보다.
괜히 들켰다가 성불은 못 하고 궁에서 쫓겨나기만 하는 거 아니야? 그러면 곤란한데.
“그, 성수가 필요해서…….”
평소 말투를 몰라 애매하게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신관이 고개를 기울였다.
“성수는 왜 찾으십니까? 악령 퇴치라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근데 이 신관 놈들은 왜 아까부터 자꾸 악령 타령이야?!
성수를 악령 퇴치에만 쓰는 것도 아닌데!
기력이 모자랄 때도 쓰고, 다쳤을 때도 쓰고, 목마를 때도 마시고, 심지어 성수로 씻기도 하면서.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며 빤히 보자 신관이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하. 농담입니다. 필요하시다니 드려야죠.”
신관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은으로 된 잔에 성수를 떠 왔다.
눈 딱 감고 들이마시자.
그렇게 생각하며 잔에 입을 가져다 대는데 신전 문이 벌컥 열렸다.
“이라네리아!”
들은 척하면 방해받는다.
나는 돌아보지도 않고 성수를 입에 쏟아 넣었다.
이제 안녕이다. 잠시나마 되살아나서 더러웠고, 다신 만나지 말자!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뺐다. 좋아. 이제 성불하기만 하면……!
하면…….
하면 되는데? 해야 되는데!
‘왜 아무 변화가 없는 거야!’
이상하다. 성수가 효과가 없을 리가 없는데!!
눈을 번쩍 뜨자 룩소르가 달려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화재로 많이 놀란 모양이구나! 어디 다치기라도 한 게냐?”
“아니, 그런 게 아니,”
“아니긴. 가족들이 걱정할까 봐 신전에 몰래 와 치료하려고 한 걸 이 아빠가 모를 줄 알았느냐. 흐읍! 그래도 아프면 의사를 불러야지, 왜 신전으로 왔어.”
무슨 소리야. 아픈 데엔 성수가 직방인데.
심드렁하게 보자 룩소르가 질질 짜기 시작했다.
그의 뒤에는 호위 기사 몇 명이 서 있었다. 내 뒤에는 아마 신관들이 있을 것이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국왕이라는 놈이 위엄 없이! 쯧쯧.’
한마디 하려는데 룩소르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 막내. 입맛 다시는 걸 보니까 배가 고픈 모양이구나.”
혀 찬 거거든?
“……내려.”
“응?”
“놓, 으세요.”
그래도 현 국왕이고 뒤에 레바나 신관들도 있으니 예의를 갖춰 말을 높였다. 애써 웃는 얼굴도 유지했다.
하지만 룩소르는 서운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우리 리아도 이제 다 컸지. 그래도 갑자기 말을 높이고, 아빠는 서운하구나.”
나 때는 애들을 이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우리 율시는 옹알이할 때 빼고는 나한테 격식 없는 말투를 쓴 적이 없었다.
아니. 우리 율시는 옹알이도 격식 있게 했을 거다.
내가 그렇게 가르쳤으니까!
그런데 나라에 무슨 변고가 있었길래 다 큰 놈들이 아빠, 아빠, 거려?
내가 못마땅하게 쳐다보든 말든 국왕은 내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못난 꼴을 보인 게 민망해 저절로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나와 눈이 마주친 신관이 눈짓으로 내게 인사를 했다. 그림 같은 미소가 어딘지 싸했다.
‘뭔가 이상한데.’
성자를 남편으로 둔 덕에 성수는 질릴 정도로 많이 접해 봤다.
조금 과장하자면 축배보다 성배를 들어 본 적이 더 많았다. 시원한 물 한 잔 떠오라고 하면 얼음 대신 신성력을 담가 내올 정도였다.
그때는 정말 신성한 기운이 몸을 감싸며 몸이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말 그대로 액운이 씻겨 나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평범한 물을 마신 것과 별반 다른 게 없었다.
내 영혼이 아직 여기, 내 후손인 막내 공주의 몸에 잘 붙어 있는 것도 그렇고.
역시 레바나 신을 믿는 게 아니었는데.
“저거 돌팔이 아냐?”
“응? 우리 막내, 뭐라고 했니?”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이제 어떻게 성불한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