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나는 ‘치정의 여제’를 향해 성큼성큼 돌진해 손을 뻗었다. 먼지 쌓인 책을 낚아채고 기록 보관실로 돌아왔다.
빠르게 내용을 훑으며 선정적인 부분을 건너뛰니 제대로 된 이야기는 3분의 1도 남지 않았다.
아니지. 이걸 제대로 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나?
‘아주 가관이군.’
내가 아버지를 독살하고 왕위에 올라 이웃 나라의 왕, 성자, 드래곤을 유혹해 동침한 뒤 그들의 권력을 이용해 에피파네스를 제국으로 선포했단다.
황제가 되고 난 뒤에는 술과 도박, 학살을 즐겼다고 적혀 있었다.
내 폭정과 방탕함을 보다 못한 성자 라파일과 펠리온이 손을 잡고 나를 독살하는 것으로, 이 거지 같고 허무맹랑한 소설은 끝이 난다.
‘내가 황제였다는 것 빼고는 맞는 말이 하나도 없잖아?’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게 거짓이라고 누구에게 말한단 말인가?
원통하고 억울해서 뒷골이 당길 지경이었다.
심호흡하며 겨우 분노를 억누르는데, 책의 맨 뒷장을 보자마자 다시 분노가 폭발하고 말았다.
[수치스러운 역사를 밝히려니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진실을 알아야 반복되지 않는 법. 하여 후대에게 이 글을 남긴다.
이라네 필로티메오마이 벨로아스와 같은 폭군이 다신 나타나지 않기를. -알리에 르그란드]
그 아래에는 황가의 인장이 찍혀 있었다.
나라에서 인정해 정사로 취급받는 내용이라는 뜻이었다.
고개를 홱 돌렸다. 책장 너머로 내가 죽은 뒤 왕위를 이었던 자들의 이름이 보였다. ‘치정의 여제’를 쓴 자의 이름도 그 사이에 섞여 있었다.
알리에 르그란드 벨로아스.
나를 희대의 폭군으로 만든 그는 3대 황제, 즉 내 손자 되는 놈이었다.
***
‘폭군? 내가 폭군이라고?’
나는 후계자로 태어나 후계자로 자랐다.
제왕이 되는 법을 배우는 것에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전부 바쳤다.
수많은 모략과 암살 위협에 두려움을 느꼈을 때도 도망치지 않고 자리를 지켰으며, 전쟁을 일으키고 손에 피를 묻히는 한이 있더라도 백성과 나라를 수호했다.
에피파네스를 풍요롭고 영광스럽게 하라는 숙명을 겸허히 받아들였다.
마음에 열망이 자랄 때면 외면했고, 애정이 고개를 들면 그 감정의 목을 베어 냈다. 필요에 의해 결혼하고 아이를 가졌다.
나를 배제한 채 살았다.
오직 에피파네스를 위해서.
에피파네스의 영광을 위해서!
그런데 남은 게 폭군이라는 오명뿐이라니. 그것도 다른 누구도 아니라 후손들에 의해서 왜곡된 거라니.
공허함과 배신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도대체 내 삶은 뭘 위한 것이었지?
분노가 들끓었다. 마음 같아서는 패악을 부리며 내 업적을 되돌려 놓으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들어줄 사람도 없었다. 미친 사람 취급이나 안 하면 다행이지. 일단 참자.
‘후대의 기록을 읽어 보면 뭐라도 나올 거야.’
왜 나와 율시안의 기록만 사라졌는지, 내가 왜 세상에 둘도 없는 폭군으로 기록되어 있는지.
나는 자리에 앉아 잠시 명상으로 뒤틀린 속을 다스렸다.
그런 뒤에 아버지의 서류를 훔쳐보던 실력으로 앉은 자리에서 100년간의 기록을 속독했다.
마음이 급했기에 누구에게 뭘 하사했다느니 누가 누구랑 결혼했다느니 하는 내용은 제대로 보지도 않고 넘겼다.
다른 나라와 체결한 조약은 가끔 눈여겨봤지만 사실 아는 이름을 찾기 위해 낱장을 넘기는 것에 불과했다.
‘뭐가 이래?’
엉덩이가 아플 정도로 오랜 시간 앉아서 확인해 보았지만 얻어 낸 것은 몇 개 없었다.
율시안이 자식 농사를 개같이 했다는 것과 라파일이나 펠리온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는 것.
그리고 나에 관한 내용 역시 없었다.
가장 최근 기록은 나를 구한 왕, 룩소르에 관한 것이었다.
그에 관한 것은 나름 공을 들여 읽었다.
룩소르는 자신이 왕족인지도 모르고 양이나 치며 살다가 15년 전 궁전으로 끌려왔다.
나라가 이미 기울대로 기울었기에 다들 왕위를 기피했던 탓이다. 덕분에 아무것도 모르는 그가 억지로 왕이 된 것이었다.
그 뒤엔 아직 기록이 없었다. 왕실의 가계도에 자식들의 이름만 올라와 있을 뿐이었다.
‘정말 나라 꼴 잘 돌아가는군.’
참담한 나락의 역사를 읽은 나는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좋아. 성불하자.’
나는 위대한 황제였던 전적이 있으니 노력만 한다면 위기를 헤쳐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뭐. 할 수 있다고 꼭 도와줘야 해?
인생을 바쳐도 오명만 뒤집어쓰는 것을!
핀 것이 지고, 차오른 것이 기우는 것은 자연의 섭리다.
나는 내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또한, 영광스러웠던 것과는 별개로 그 위태롭고 고독한 자리로 다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내 나라를 망치고 나를 폭군으로 만든 괘씸한 후손 놈들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더더욱 없었다.
이제 나와는 상관없는 이야기다. 내가 이놈의 집구석 돌보나 봐라.
‘신전으로 가자.’
신성력으로 샤워를 하든 성수를 한 사발 마시든, 속히 성불해야지.
그리고 지옥에 가서, 에피파네스를 망치고 내 이름을 더럽힌 놈들을 정의의 이름으로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다.
특히 나에 대해 엉망으로 써 놓은 손자놈을 집중적으로 조져야겠다.
그리고 후손들 꿈에라도 나타나 내 오명을 바로잡으라고 협박해야지.
이 부분이 중요하다.
꿈에 나타나 내 오명을 바로잡는 것!
평정심을 되찾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지 묻은 옷을 털고 머리를 막 정리했을 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리아! 너 괜찮니?”
안으로 뛰어 들어온 여자아이가 상냥하고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라파일과 많이 닮았다.
특히 생김새와 성스러운 분위기가 마치 라파일로 틀을 만들어 찍어 낸 것처럼 똑같았다.
눈을 마주치면 지은 죄를 전부 고하고 싶어질 정도였다.
아는 애는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다정하게 부르는 것이나 거지꼴이지만 제법 격식을 갖추려고 노력한 차림새로 보아 왕가의 후손일 가능성이 컸다.
나는 방금 본 가계도를 떠올렸다.
국왕 부부에게는 4명의 자녀가 있었다.
쌍둥이인 첫째와 둘째. 연년생인 셋째, 그리고 셋째와 세 살 터울인 막내.
이 중 둘째만 아들이고 나머지는 딸이었다.
나는 아무래도 막내의 몸에 들어온 것 같으니 저 애는 첫째나 셋째겠지.
대충 그녀를 훑어보다가 나이를 가늠하고 셋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플로레타?”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며 할 말이 있느냐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플로레타가 내 옷자락을 붙잡고 밖에다 소리쳤다.
“찾았어! 포넨트, 리아 여기 있어!”
곧 플로레타보다 조금 더 큰 남자애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저놈이 둘째, 포넨트로군.
눈이 마주치자 포넨트가 걱정스러워하는 기색을 지우더니 시비를 걸었다.
“어디 아프냐? 표정 멍청한 거 봐라.”
내 위엄 있는 얼굴에 대고 저런 말을 하다니! 보는 눈이 없는 놈이로군.
생긴 것도 내 아버지랑 비슷했다.
재수 없다는 뜻이다.
저 어린놈의 버르장머리를 고쳐 줄까 말까 고민하는데, 플로레타가 제 오빠를 만류하고 나섰다.
“포넨트. 하지마.”
그래. 성불이나 하자. 성불.
말대꾸해 봤자 대거리나 할 게 뻔하기에 무시하고 문으로 나갔다.
그러자 포넨트가 따라붙으며 깝죽거렸다.
“야. 너 때문에 궁전이 발칵 뒤집혔다고. 사과는 해야 하는 거 아냐?”
“궁전이?”
“그래, 이 멍청아! 어디 처박혀 있다가 기어 나온 거야? 다른 곳에 밤새 처박혀 있을 거면 부모님께 허락도 받고, 어? 야! 듣고 있어?”
저 안에서 밤을 새운 모양이다.
앉아서 백 년간의 기록을 전부 읽었으니 그럴 만도 하겠다.
어쩐지 배가 고프더라니만.
“아니면 잘못한 거라도 있냐? 그래서 여기에 숨어 있었어?”
“잘못은 무슨. 비키거, 흠! 비켜. 나는 신전에 가 봐야 하니까.”
“신전? 갑자기 거긴 왜 가는데?”
성불하러 간다, 후손 놈아!
포넨트를 옆으로 미뤄 두는데 플로레타가 내 손을 붙잡았다.
“리아. 일단 부모님께 말씀부터 드리자. 두 분 다 눈물까지 보이셨어.”
“울어?”
경악스럽게 되묻자 포넨트가 끼어들었다.
“그래. 이제 네 잘못을 알겠냐?”
내 잘못은 모르겠고, 국왕, 룩소르의 잘못은 알겠다.
울어도 혼자 울고, 초조해도 혼자 초조해하고, 걱정스러워도 혼자 걱정스러워해야지.
고작 애가 하루 안 보인 걸로 사람들 앞에서 울어? 왕이?
그런 정신머리로 외교는 어떻게 하고 정치는 어떻게 했대?
‘하긴. 못했으니까 아름다운 아네스 궁이 요 모양 요 꼴이 됐겠지.’
한숨을 푹 내쉬고 손을 내저었다.
“나는 안전하다고 전해 줘. 지금은 신전이 급해서.”
“신전이 화장실이냐? 급하긴 뭐가 급해? 아빠한테 먼저 가서 인사드리고 밥부터 먹으라고!”
저 나이에 국왕보고 아빠라니. 쯧쯧. 왕실의 기강이 이토록 혼잡하니 나라 꼴이 이 모양,
“악!”
누구야? 누가 감히 황제의 고귀한 귀를 잡아!
“당장 놓지 않으면 삼족을 멸할 것이다!”
“이 멍충아! 내 삼족이면 너도 포함이거든?”
포넨트, 이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 선조의 귀를, 그것도 뒤에서 잡아당겨?
귀를 잡힌 채로 몸을 숙여 뒤를 돌아 놈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그러자 포넨트가 속 시원한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얘들아, 그만 좀 싸워…….”
“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