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이라네리아!”
문이 벌컥 열렸다. 안으로 거대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내 키의 두 배 정도 될 것 같았다.
남자는 팔을 휘저어 연기를 치우더니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해 냈다.
“아가!”
황제에게 아가라니!
불경스럽다 호통을 치려는데 남자가 불길을 뛰어넘어 나에게 왔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대하듯 나를 안아 올렸다.
“무사했구나.”
발버둥 치려다가 문 크기를 보고 움직임을 멈췄다.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지만 밖에서 남자가 들어왔다면 그쪽에 나가는 길도 있을 것이다.
‘늦장 부리면 그마저도 사라지겠지만.’
잠깐이지만 살펴본 결과, 이곳은 뭐든 크고 무거운 것 같았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이니 내 발로 나가는 것보다는 남자를 타고 나가는 게 효율적이다.
자세한 건 일단 이 불길을 피하고 난 뒤에 들어야겠다.
나는 화병을 들어 남자의 머리에 쏟아붓고 남은 물은 내 머리와 어깨에 묻혔다.
그런 뒤 얼빠진 남자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남자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손가락으로 열린 문을 가리켰다.
“어서. 움직이거라.”
남자는 잠깐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팔로 내 머리를 감싸 안은 채 뛰기 시작했다.
간혹 주변에서 쿵, 하고 뭔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정수리 위로 기침이 쏟아졌다. 나는 남자의 멱살을 잡아 아래로 끌어당겼다.
“몸을 최대한 숙이거라. 연기를 마시면 위험하니.”
남자는 혼란스럽고 당황한 것처럼 보였으나 순순히 내 말에 따랐다.
계단을 내려오자 다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하! 어디 계십니까?!”
“여기 있소!”
남자가 커다랗게 소리쳐 대답했다.
전하? 전하면 왕일 텐데. 나는 고개를 빼 남자를 올려다봤다.
본 적 없는 얼굴이다. 제국의 황제인 나와 안면이 없다니.
아마 먼 나라의 왕이거나 상대할 가치가 없을 정도로 약소한 국가의 지배자겠지. 혹은 다른 대륙의 왕이라든가.
그것도 아니면 신화 속에나 나오는 거인족의 왕일 수도 있고.
나는 남자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축하하네.”
어느 나라의 왕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가 구한 것은 대 에피파네스 제국의 황제이다.
그리고 나는 내 목숨과 지위를 절대 가벼이 여기지 않는다.
그러니 상황을 파악하고 원래 자리로 돌아가면 적당한 보상을 할 예정이다.
남자의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만일 신화 속의 종족이라고 하더라도 에피파네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서 나쁠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민망한 자세에서는 벗어나야 했기에 몸을 비틀었다.
왕이 나를 내려놓으며 자애롭고도 떨떠름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말하시오.”
“아빠에게 왜 자꾸 그런 말투를 쓰는 거니, 우리 공주?”
……응? 아빠?
내 아빠는 하늘나라 갔는데?
***
자신이 내 아빠라고 주장한 국왕은 얼마 지나지 않아 픽 쓰러져 버렸다.
뭘 더 물어보기도 전에 그는 실려 갔고, 나는 넓은 방에 방치되었다.
“여긴 안전하니까 가만히 계셔야 해요. 어디 가시면 안 돼요!”
이런 당부와 함께 말이다.
나는 한동안 멍하니 소파에 앉아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그러다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 섰다.
거울 속에는 위엄 넘치는 황제가 아니라 유순한 눈매와 통통한 볼을 가진, 천사 같은 외모의 소녀가 서 있었다.
원래 내 머리카락은 회색이었으나 거울 너머 소녀의 머리카락은 푸른 광택이 도는, 검은색에 가까운 감청색이었다.
눈동자가 금색인 건 같았으나 눈매는 전혀 달랐다.
‘거인국에 온 게 아니라…….’
내가 작아진 거였어?
아니. 이건 작아졌다는 말로 표현할 만한 게 아니다.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으니까.
혹시 신의 품에 안기기 전에 꿈을 꾸는 건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몸으로 들어온 건가?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괜찮아. 당황하지 말자.’
황제는 갑작스러운 상황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는 법.
일단 상황 파악부터 하는 거야.
문을 살짝 열어 밖을 살폈다. 여기가 어디인지, 지금이 몇 월 며칠인지, 이 몸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봐야 한다.
사람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빠르지만, 화재 때문에 다들 정신이 없어 보였다.
국제 문서를 보면 대략적인 위치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을 텐데. 보통 그런 게 보관된 곳은 국왕의 허락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었다.
‘차라리 잘됐어.’
마침 방으로 오는 길에 집무실처럼 보이는 곳 앞을 스치듯 지나왔었다.
그곳으로 가면 누굴 만나든 문서를 훔쳐볼 수 있든 하겠지.
길을 외우기 위해 주변을 꼼꼼히 살피며 걸었다. 그런데 궁 내부가 아주 가관이었다.
벽에는 금이 가 있고, 촛대의 금칠은 벗겨진 데다가 샹들리에는 보이지도 않았다. 벽 장식은 지워지거나 뜯겨 나간 곳이 수두룩했다.
복도에 늘어서 있어야 할 석고상들은 살아나 도망이라도 갔는지 발목이나 발자국만 남아 있었다.
‘나라가 기울어도 궁전만큼은 번지르르하게 해 놓기 마련인데. 도대체 어떤 모지리가 궁전을 이렇게 벗겨 먹은 거야? 쯧쯧.’
혀를 차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미리 봐 두었던 곳으로 들어갔다.
기밀문서를 발견할지도 모르니 다른 사람에게는 들키지 말아야겠다. 문을 걸어 잠그고 뒤를 돌자 책장으로 둘러싸인 방이 보였다.
‘집무실이 아니라 서재였나 보네.’
책만 봐도 이곳이 어디인지는 어느 정도 파악할 순 있으니 상관없다.
……물론 책이 있다면 말이다.
이 망할 왕국은 기어이 장서나 고서까지 다 팔아먹었는지 책이 거의 없었다.
‘저게 책장인지 거미줄 진열장인지. 쯧쯧.’
속으로 혀를 차며 듬성듬성 꽂힌 책을 바라보았다.
쓰러진 책 위로 먼지가 봉분처럼 쌓여 있었다. 소매로 코와 입을 막고 책등을 손가락으로 쓱 훑었다.
먼지에 묻혀 있던 제목이 드러났다.
[치정의 여제]
국왕의 서재인 것 같은데, 책 꼬락서니하고는. 아주 가관이다.
다시 혀를 쯧쯧 차며 주변을 둘러봤다. 몇 개의 책장을 더 지나자 깊숙한 곳에 굳게 잠긴 문 하나가 보였다.
내가 살던 아네스 궁에서는 저런 곳에 왕실 기록을 보관해 두곤 했다. 그리고 다른 왕국의 궁전들도 대다수 발길이 잘 닿지 않는 안쪽에 왕실 기록을 보관했다.
그러니 내 추측이 맞는다면 아마 저곳이 왕실 보관실일 것이다.
강한 예감이 들어 다가가 자물쇠를 들여다봤다.
순간, 등골이 오싹했다. 불길한 예감이 내 어깨를 어루만졌다.
자물쇠의 생김새가 아네스 궁 왕실 기록 보관실 문에 달린 것과 똑같다.
‘이럴 리가 없는데.’
일반 자물쇠면 그러려니 하겠지만, 저 자물쇠는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물건이었다.
황제와 황제의 피를 이은 자만이 열 수 있도록, 펠리온이 특수 제작한 마법 자물쇠니까. 그리고 그의 마법과 세공술은 아무나 따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섬세하고 복잡하다.
“설마…….”
에이, 설마는 무슨!
여기가 에피파네스일 리 없지.
웅장하고, 찬란하고, 세련되고, 아름다운 나의 아네스 궁전이 이런 거지소굴이 됐을 리가! 모양만 따라 한 걸 거야, 모양만!
가끔 에피파네스에 초청받아 왔다가 아네스 궁전의 아름다움에 깊이 감동하고 가는 왕족들이 있었다.
그들은 제 나라로 돌아가 자신들의 궁전을 에피파네스 풍으로 꾸미곤 했다.
그러니까 이 자물쇠도 모조품일 것이다. 그냥 비슷하게 만든, 마법이 깃들지 않은 모조품.
내가 손을 대는 것 정도로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제발. 열리지 말아라.’
태양의 신 샤마흐에게 빌고, 겸사겸사 믿지도 않는 달의 신 레바나에게까지 빌었다.
하지만 야속하게도 내 손이 닿자마자 자물쇠가 철컥 열렸다.
‘궁전을 벗겨 먹은 모지리가 에피파네스 사람이었어?’
눈앞이 아찔하다. 내 후손 중에 어쩌다 그런 놈이 났는지 코가 시큰거리고 눈시울이 뜨거웠다.
하지만 황제는 쉽게 눈물을 보이지 않는 법.
고개를 뒤로 젖히자 샹들리에가 보였다.
크리스탈은 죄 팔아먹고 뼈대만 앙상하게 남은 꼴을 보자 더 열불이 뻗쳤다.
‘진정하자. 상황 파악부터 해야지. 상황 파악.’
마음을 가다듬고 서고 문을 열어젖혔다. 다행히 역사서 관리는 잘했는지 왕실 기록실은 꽉 들어차 있었다.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일단 제일 앞에 있는 책장의 표지를 들여다봤다.
[룩소르 다이달로 벨로아스. 샤마흐력 1739년 즉위~]
샤마흐력 1739년이면, 내가 죽은 지 못해도 85년은 지났다는 거잖아.
아까 나를 구한 왕이 내 후손이라고? 그런데 왜 왕이야? 황제가 아니라?
빠른 걸음으로 수십 개의 책장을 지났다.
율시안에 대한 기록은 텅 비어 있었다.
그 뒤에, 나에 대한 기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책장 역시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율시는 그렇다 쳐. 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하지만 내 기록은?
내가 이룩한 찬란한 역사는?!
후대에 길이길이 전해져야 하는 위대한 업적!
길고 고단했던 내 삶의 흔적이, 다 어디로 갔냔 말이야?!
‘이럴 순 없어.’
분명, 분명 어딘가에 내 기록이 있을 것이다.
내 위대한 업적을 기록해 놓은 게 있을 거야. 정사가 없다면 야사에라도 남아 있겠지.
서고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시선 끝에 쓰러져 있는 책이 툭 걸렸다.
그곳에는 내가 만졌던 제목 부분만 휑하니 드러낸 채 뽀얀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책 한 권이 있었다.
[치정의 여제]
아무리 떠올려봐도 에피파네스에 황제라고 불렸던 여자는 나 하나뿐이었다.
불길한 기운이 목덜미에서 손장난을 치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