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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보고 폭군이래?-1화 (1/151)

<1화>

내 목숨을 촛불에 비유하자면, 심지 끝을 발긋하게 밝히는 잔불과 같다.

즉, 뒈지기 일보 직전이라는 뜻이다.

연기를 내뿜으며 희미한 빛으로 점멸하는, 저 샹들리에의 초처럼.

숨이 끊어질락 말락.

붙을락, 말락.

“폐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 힘겹게 눈을 굴렸다.

색이 옅은 금발과 푸른 보랏빛 눈동자. 온몸에 흐르는 은은한 광채. 신의 형상을 그대로 빚어 놓은 것만 같은 성스러운 외모의 남자가 보였다.

라파일.

신의 사랑을 받는, 나의 훌륭한 정치적 동반자.

오늘도 그를 보고 있으려니 어디선가 성가대의 합창이 들리는 듯했다.

……아닌가? 아니네.

아무래도 갈 때가 되어 들리는 소리인가 보다.

라파일 뒤에 있는 율시안과 눈을 맞춰도 성스러운 노랫소리가 멎지 않으니 말이다.

라파일의 금발과 내 금안을 물려받은 10살짜리 아이는 울음을 꾹 참고 있었다.

제국의 유일한 황자로서 위엄을 지켜야 한다는 자각은 있는 모양이었다.

‘내 새끼. 장하다. 강하다. 곧 황제가 될 텐데 사람들 앞에서 질질 짜면 안 되지.’

기특함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라파일이 눈물을 흘리며 내 손을 잡았다.

‘너 말고 내 아들.’

마지막으로 내 후계자 얼굴이나 쓰다듬어 보려고 했는데, 왜 네가 끼어드니.

평소 성질 같으면 비키라고 했을 텐데, 주변에 황제의 임종을 지키겠다고 모인 사람이 너무 많았다.

형식적이긴 해도 결혼한 사이인데. 뭐라고 하면 그의 체면이 살지 않지.

라파일의 눈동자는 아름다우니 인생의 대미를 장식하기에 더할 나위 없을 것 같기도 하고. 유종의 미도 거둬야 하니까 멋진 척이나 하자.

나는 그의 손을 뿌리치지 않고 맞잡아 주었다.

“라파일. 신의 뜻이 이토록 완고하고 두렵구나. 수 개의 왕국을 통일한 내 목숨조차 병마를 이기지 못하니.”

“털고 일어나셔야 합니다. 아직 황자가 어리지 않습니까.”

죽는 게 신의 뜻인데 털고 일어나라니. 그게 성자라는 놈이 할 말이냐.

“그대와 펠리온이 있으니 괜찮겠지.”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겨 내실 수 있습니다.”

말은 저렇게 하지만 라파일도 잘 알 것이다.

내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가 들이붓는 신성력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담기지 못하고 새어 나갔다.

그래도 신성력 덕분에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죽음을 앞둔 순간에도 위엄을 지킬 수 있는 거겠지.

“율시안.”

“예, 폐하.”

“에피파네스 제국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네 것이다. 내가 죽으면 바로 즉위해 황위를 이으렴.”

율시안이 통통한 입술을 꾹 깨물고 눈에 힘을 주었다.

어떻게 해서든 내 앞에서는 울지 않으려는 게 눈에 보였다.

나는 유모에게 손짓해 율시를 데리고 나가게 했다. 기어이 문밖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장성하고 나서 부모님을 잃은 나도 두렵고 막막했는데 어린 율시는 오죽할까.’

미어지는 가슴을 외면하기 위해 눈을 지그시 감았다. 곧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라파일이 사람들을 다 내보낸 모양이었다.

한동안 적막감이 유령처럼 방 안을 떠돌았다.

그러다 몸 옆이 움푹 꺼졌다. 어깨에 무게감이 느껴지더니 얇은 침의가 젖어 들었다.

“축축하잖아.”

힘없는 목소리로 투덜거리자 라파일이 희미하게 웃었다.

“이라네. 당신은 이런 상황에서도 참, 한결같군요.”

“그게 내 매력이지. 펠리온은?”

“마지막까지 그를 찾으시는 겁니까?”

보라색 눈동자가 눈물에 젖어 번들거린다.

표정 봐라. 불손하기는. 손가락 들 힘만 있었으면 딱밤을 때려 주는 건데.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눈깔을…….”

그렇게 뜨냐는 말은 완성되지 못했다.

문을 벌컥 열고 한 남자가 뛰어 들어온 탓이었다.

그는 라파일과 내가 나란히 누워 있는 것을 보고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성큼성큼 침대로 걸어왔다.

발이 땅을 내디딜 때마다 긴 은발이 흔들렸다. 맑은 하늘색 눈동자는 내게 고정되어 있었다.

현존하는 최고의 마법사이자 내 오랜 친우이며 충성스러운 신하, 펠리온 리베든.

그에게는 미안한 게 많…….

“폐하! 이렇게 가실 순 없습니다!”

미안한 게 많,

“눈을 뜨십시오, 폐하!”

“뜨고 있어.”

“벌써 돌아가시면 안 됩니다. 제발 일어나세요!”

“아직 안 죽었어.”

“폐하아!”

“안 죽었다고.”

펠리온은 오열하는 척하며 내 위로 쓰러지듯 엎드리려 했다. 그런 그를 라파일이 막아 냈다.

언제나 그렇듯 펠리온과 라파일 사이에 냉기가 감돌았다.

조금만 더 두면 둘이 싸울 것 같지만……, 이젠 나도 모르겠다. 싸울 테면 싸워라. 어차피 막을 힘도 없다.

그러고 보니 숨도 조금 가쁜 것 같다.

숨을 헐떡이며 조금이라도 더 공기를 들이켜 보려 했으나 허사였다.

내가 고군분투하는 소리를 들었는지 주변이 조용해졌다.

두 사람은 충격 받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어 그들을 향해 미소 지었다.

“라파일, 펠리온. 율시를 부탁해.”

펠리온은 여전히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 손을 붙잡았다.

나를 좋아한다면서, 쟤는 어떻게 이런 순간에 웃음이 나올까?

“즐겁냐?”

“그럴 리가. 그래도 최악은 아니니까.”

펠리온이 평소처럼 편한 어투로 대답하며 씩 웃었다.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거지? 그는 충성스러운 신하이자 제일 가까운 친구였으나 가끔 감당 안 되는 일을 저지르곤 했다.

‘이거 영 불안한데.’

라파일한테 저놈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아보라고 해야겠…….

-쾅!

다시 문이 벌컥 열렸다.

아무래도 저 문은 오늘 나와 함께 유명을 달리할 팔자인가 보다.

박력 있게 들어온 것과 달리 붉은 머리의 남자, 렘브로스는 나를 빤히 바라보며 그 자리에 못 박힌 듯 서 있었다.

문을 지키던 기사들이 뒤늦게 들어와 그의 앞을 막아섰다.

“레튜니아의 왕이시여. 들어오시면 안 됩니다.”

그는 한 손으로 내 기사들을 밀어내고 침대로 다가왔다. 펠리온까지 치워 낸 그가 떨리는 손으로 내 이마를 쓸어 넘겼다.

“죽어 가고 있군.”

그걸 말로 해야 아냐.

이젠 정말 시간이 다 된 것인지 목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내 왕비가 되었으면 이렇게 빨리 가진 않았을 것을.”

너는 왕이고, 나는 황제야.

되려면 네가 황비가 되었어야지. 어딜, 확 그냥! 정말, 손 들 힘만 있었으면 딱밤이라도 때려 주는 건데.

점점 몸에 힘이 빠진다.

렘브로스가 내 손을 잡고 속삭였다.

“나는 너를 잊을 것이다.”

그러시든가.

짧은 생각을 마지막으로 숨을 깊게 내쉬었다.

온몸에 있는 산소가 전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라네!”

내 이름을 부르는 게 들린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샹들리에의 촛불이 훅 꺼지는 게 보였다.

연기가 해방된 영혼처럼 춤추며 느리게 흩어진다.

그게 내 마지막 기억이었다.

모든 감각이 꺼졌다. 이내 몸이 부유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했다.

뒤이어 시간의 흐름이 무색해졌다.

무거운 옷을 벗어 던진 것처럼 가슴이 트이고 자유로웠다.

평생 단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평화를 비로소 느끼고 있었다.

어린 아들을 두고 가는 것이 마음에 걸리지만 차라리 잘 되었다.

골골대며 짐이 되느니 일찍 가는 게 낫지. 내가 살아 있어 봤자 좋은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와 내 아버지가 그러했듯이 말이다.

미련 같은 것은 없다.

내 통치 아래 왕국은 제국이 되었고, 백성들 역시 풍족하고 안전하게 살고 있었다.

나, 이라네 필로티메오마이 벨로아스.

후인들에게 에피파네스 제국의 초대 황제로서 다신 없을 태평성대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듣겠지.

아마 역사에 길이길이 남으리라.

‘그걸 못 보고 가는 건 아쉽네.’

하지만 자신에 대한 평가를 보고 가는 사람은 없을 테니 욕심내지 말아야지.

나는 이제 그만 신의 품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야겠다.

……고 생각했는데 문득 물 위로 쑥 끄집어 올려지는 듯한 기분이 들며 의식이 깨어났다.

이게 무슨 감각이지?

드디어 신의 품에 안긴 건가?

그런데……. 신의 품이 왜 이렇게 뜨겁지?

“이라……리아!”

누군가의 고함이 희미하게 들렸다.

주변이 점점 뜨거워진다. 콧속으로 들어오는 공기도 매캐했다. 이내 강한 탄내가 느껴졌다.

여기 설마 지옥인가?

나 지옥에 떨어진 거야?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지옥에 떨구기 전에 변명할 기회는 줘야지!

“이라네……!”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보니 지금이 변명할 기회인가 보다.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커튼을 타고 올라가는 불길이 보였다.

본능적으로 입을 가리며 침대에서 내려왔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열린 테라스를 통해 불길이 들어오고 있었으므로 밖을 살필 수는 없었다.

방 안에도 시뻘건 화염이 가득했다.

혹시 모르니 몸에 물을 뿌려 열기를 조금이라도 막아야겠다. 주변을 둘러보다가 화병이 있기에 손을 뻗었다.

그런데…….

화병이 이렇게 크고 무거웠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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