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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33화 (외전 완결) (134/134)

<외전 05>

내가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는 동안 에이든은 마커스를 재우고 돌아왔다.

“아까 오후에 황실에서 온 서류가 쌓였던데, 이제 일하러 가야 하지 않아?”

“할 수 있는 데까진 최대한 재택으로 돌려 보려고.”

에이든이 옆에 나란히 앉았다. 그는 조금 피로한지 눈가를 꾹꾹 눌렀다.

원체 체력이 좋아 육아하는 걸 힘들어하진 않아도 고단한 건 어쩔 수 없었다. 마커스는 아직 대화가 가능한 나이가 아니니까.

그의 뒤로 가서 어깨를 꾹꾹 눌러 안마를 시작했다. 그가 조금 놀라 고개를 꺾어 나를 보려 했지만 멈추지 않았다.

“종일 마커스 보느라 힘들지?”

“힘들어도 할 만해. 피곤하면 하녀들에게 맡겨도 되니까. 일이랑 병행하는 네가 더 힘들지.”

“아냐. 난 안 힘들어.”

내가 마커스와 하는 거라곤 함께 놀아주는 것뿐이다. 피로하고 지치는 일은 에이든이나 유모가 다 해서 어려울 게 없었다.

“고생해서 낳은 것만으로도 네 할 일 다 한 거지 뭐.”

그렇게 중얼거린 에이든이 몸을 돌려 나를 마주 봤다. 밤이라 주변이 어둡다 보니 그의 얼굴에 짙은 음영이 져서 유난히 조각처럼 보였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다 보면 상대를 향한 마음이 조금 달라진다던데 나는 여전히 에이든을 보면 가슴이 두근거린다.

오히려 마커스가 생기며 더 애틋해진 면도 없잖아 있다.

방금 전까지 어깨를 꾹꾹 누르던 손이 허공에 떠서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곤 팔을 지지대 삼아 무릎을 꿇고 일어나 에이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에이든은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는 내 허리를 꼭 안은 채 입술을 열었다.

서로 상대의 입술을 머금고 입맞춤이 내밀해져 갔다. 에이든이 내게서 얼굴을 뗀 건 내가 그의 목덜미를 감싸 안을 즈음이었다.

“…에이든?”

에이든이 낮게 숨을 고르며 말했다. 뜨거워진 목소리엔 열기를 식히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너랑 끝까지 가지 않을 자신 없어.”

그러니 여기까지만 하자는 거였다.

“상관없어.”

에이든의 두 뺨을 감싸 내게로 끌어당기려 하자 그가 힘을 주어 내 손을 떼어냈다. 조금 충격이었다. 꼭 내가…….

“난 둘째 생겨도 괜찮아. 잠깐 힘들어서 마커스 같은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날 수 있었잖아. 그러니 출산 때 아팠던 거 또 할 수 있어.”

“네가 힘든 거, 내가 싫어.”

“당사자는 괜찮다니까?”

“안 돼. 난-”

“내가 잘못된 것도 아니잖아. 겁먹지 마.”

“만에 하나라도 네가 잘못될까 봐 그래. 만에 하나라도… 그렇게 되면 난 어쩌고 마커스는… 마커스는 어떻게 해.”

에이든이 울컥하고 숨을 삼켰다. 그제야 그가 걱정한 게 뭔지 깨달았다.

그건 아이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최악의 경우가 도래할 경우 혼자 남을 자신보다 아이가 엄마 없이 클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그가 나를 피하게 만든 거였다.

“나 건강해. 확실하지도 않을 미래 때문에 이럴 필요 없어. 그렇게 보면 난? 넌 노예제철폐반대자들에게 살해위협을 받고 있잖아. 어느 날 갑자기 널 잃을지도 모르는데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은 건 어리석은 행동 아냐?”

“그건…….”

에이든이 무어라 변명하려던 순간 두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간 에이든이 나를 피해서 알게 모르게 쌓인 서러움이 터진 거였다.

일부러 일거리를 만들어 밤을 새우고, 혹시 살갗이라도 스칠까 염려했더랬다.

그 순간순간마다 알게 모르게 상처가 되었고 그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이렇게 그 이유를 듣고 나니 저절로 마음이 북받쳤다.

“셀레나. 왜, 왜…….”

화들짝 놀란 에이든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의 손길을 쳐내며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내 반응에 에이든이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나를 만지지도 그렇다고 손을 거두지도 못한 채 잔뜩 당황했다.

“더 행복해지자고 한 결혼인데 자꾸 비참해져. 네가 자꾸 날 피하니까 내가 더 이상 여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단 말이야.”

“그럴 리가!”

펄쩍 뛰는 반응을 보지 않아도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절절히 안다. 하지만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이성적으로는 에이든이 그만큼 나를 위한다는 걸 알지만 그럼에도 에이든이 자제력이 좋다기보단 내가 여자로서 매력이 떨어진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든 날이 많았다.

출산 후 아내가 여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남자들이 있단 말을 듣기도 했거니와 마커스를 가지기 전엔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들더니 이젠 사제들처럼 수절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한 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끊이지 않고 터져 나왔다. 눈물을 닦고 진정하려 해도 주체되지 않았다.

에이든이 나를 달래려 다가왔지만 소용없었다. 나는 그를 거세게 밀쳐내곤 빤히 노려보았다.

“미안해.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었어.”

에이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그러고 보니 우린 결혼 이후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다. 일방적으로 화를 낸 일도 없어서 에이든은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우선 진정하자.’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씻고 눈물을 그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든이 자신을 지나치려는 내 옷자락을 꾹 붙들었다.

“가지 마. 내가 미안해.”

히끅. 히끅. 킁. 소매로 얼굴을 벅벅 닦았다. 내가 자신을 떼어놓지 않자 에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제 손으로 내 눈물을 훔쳤다.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도, 밀쳐내지도 못한 채 감정을 갈무리하려 애썼다.

에이든이 슬그머니 나를 끌어당겨 제 품에 꼭 안았다.

“내가 참는 게 널 위한 거라 생각했는데 네 입장에선 내가 널 밀어낸다고 느낄 수도 있단 걸 몰랐어. 상처 줘서 미안해. 어떻게 네가 나한테 여자가 아니겠어.”

다정한 음성에 다시 울음이 터졌다. 에이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채 끅끅거렸다.

커다란 손이 다정히 내 등을 쓸어내렸다. 그렇게 한참 동안 에이든의 품속에서 울고 나자 감정이 잦아들었다.

축축하게 젖은 가슴팍에서 슬그머니 얼굴을 들자 에이든이 흐릿하게 웃으며 제 소매로 얼굴을 슥슥 닦아 주었다.

“다 울었어?”

나직한 음성이 귓가에서 울리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기분 나빠서가 아니라 울림 좋은 음성이 자극적이라서다.

가슴이 쿵쿵 울렸다. 내 얼굴을 쓰다듬는 다정한 손길과 애정이 가득한 눈빛에 묘한 긴장감마저 들었다.

‘너무 우는 바람에 마음이 약해져서 그런가 봐.’

그렇지 않으면 이 상황에 에이든이 야릇하게 보일 리가 없다.

‘얼굴부터 씻고 오자.’

찬물로 세수하고 나면 정신이 들 테다. 그런 생각에 에이든에게서 벗어나려고 허리에 감긴 팔을 떼어내려 했다.

그러자 에이든이 팔에 힘을 주어 더 바짝 끌어당겼다. 아직도 내가 화났다고 생각하는지 얼굴이 심각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노라 말하려던 건 에이든의 입술 때문에 가로막혔다.

그제야 나는 나를 보던 에이든의 눈에 이제까지 스스로를 억제하던 인내심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읏.”

에이든이 집요하게 내 입술을 탐했다. 짧은 신음이 터지는 순간 그의 혀가 내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넌 모를 거야.”

“뭘?”

갈급한 키스에 숨을 헐떡이며 묻자 에이든이 꿰뚫을 듯 뜨거운 눈으로 나를 보며 대답했다.

“매일 밤 내가 얼마나 참았는지.”

더는 그럴 필요가 없다니 이젠…….

뒷말은 옷자락 속으로 파고드는 손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나보다 내 몸을 더 잘 아는 게 에이든이었다.

그간 참아온 것들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에이든은 뜨겁고 집요했다.

그 때문에 펑펑 울었던 게 미련하게 여겨질 정도로 나는 밤새 그의 아래에서 울고 또 울다, 해가 뜨고 나서야 간신히 잠들 수 있었다.

* * *

“네 체력이 조금만 더 강하면 좋겠어.”

기진맥진해서 쓰러지듯 눈을 감고 있자 에이든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나로선 에이든의 체력이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에이든은 낮에는 마커스를 보다가 틈틈이 황궁과 서재를 오가며 일했고, 밤이나 주말엔 해가 뜨도록 나를 안았다.

그러면서 항상 나보다 먼저 일어나 검술 연습을 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여자가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는 말은 실수였던 것 같아.’

나와 오해 아닌 오해를 푼 에이든은 그날부터 한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았다.

그간 어떻게 참았는지 의문일 만큼 정말로… 나는 슬금슬금 아래로 내려가는 에이든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에이든이 짧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터운 커튼을 걷자 환한 햇빛이 쏟아졌다.

내가 꾸물꾸물 이불 속으로 들어가자 그가 다시 커튼을 닫았다.

“뭐라도 먹고 자. 아침 먹을 시간이잖아.”

“해 뜨기 전엔 재웠어야지.”

“둘째 가지고 싶다며.”

“점점 능글맞아져.”

한때는 손만 잡아도 귀를 붉혔는데 이젠 어떻게 나를 함락시키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남자가 돼 버렸다.

대답 대신 이마에 입을 맞춘 에이든은 옷을 껴입었다. 군살이라곤 없는 탄탄한 몸이 보였다.

그러자 어젯밤, 아니, 방금 전까지의 일이 떠올라 얼굴이 홧홧해져 시선을 돌렸다.

에이든이 점점 능글맞아지는 데 비해 나는 여전히 쑥스러움을 탄다.

잠시 뒤, 에이든이 주스와 케이크를 가져왔다. 해가 뜰 때까지 괴롭힌 게 미안해서 특히 좋아하는 것들만 찾아온 것 같다.

“한 입만 먹고 자자.”

나를 일으켜 앉힌 에이든이 입에 케이크 조각을 밀어 넣었다.

“음?”

“목말라?”

“아니, 그게 아니라… 이게 원래 이런 맛이었었나?”

딸기 케이크에서 미묘한 맛이 났다. 평소보다 더 생생한 딸기향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내 안에 새로운 생명이 자리 잡았음을 깨달았다.

커튼 틈 사이로 스며든 햇빛처럼 우리에게 새로운 축복이 찾아들었다.

나와 에이든의 시선이 마주쳤다. 아주 잠시, 겁에 질린 듯하던 에이든은 두려움을 이겨내려 고개를 흔들곤 내게 말했다.

“마커스 동생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겠네.”

그 말에 나는 환하게 웃으며 에이든에게 안겨들었다.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 외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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