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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32화 (133/134)

<외전 04>

“아이, 잘 먹는다. 이것도 먹자.”

에이든이 마커스의 입에 이유식을 넣어 주었다.

마커스를 낳고 반쯤 실신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일 년이나 흘렀다.

에이든은 마커스가 태어나자마자 당분간 공무를 보지 못한다며 못 박아 두곤 제 손으로 육아에 전념했다.

유모나 하녀들을 쓰면 되는 일이지만 방치되어 자란 기억 때문인지 꼭 스스로 키우고 싶다며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열 달 동안 고생해서 아이를 낳은 만큼 남은 양육은 제 몫이라 여기는 경향도 있었다.

“누구 닮아서 이렇게 이쁠까.”

에이든이 마커스의 정수리에 입을 꾹 맞췄다. 직접 끼고 앉아 간식을 먹이는 모습이 어지간한 보모들보다 능숙해 보였다.

“누구 닮았긴. 아빠 닮았지. 누가 보면 혼자 낳은 줄 알 만큼 닮았는걸.”

마커스는 무섭도록 제 아빠를 쏙 빼닮았다. 검은 머리카락부터 손가락, 발가락 모양까지 모든 게 똑같았다.

한 가지 나를 닮은 게 있다면 바로 눈이었다. 태어나고 2주쯤 지나 처음 눈을 떴을 때 우린 마커스가 내 눈을 닮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눈매는 아빠인데 눈 색만 나라니. 에이든은 그 모습이 무척 신기한지 그 순간 아이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러다 그는 나처럼 마커스도 눈에 태양이 담긴 것 같다며 푸시시 웃었다.

“맘마 다 먹었으면 아빠랑 산책 갈까? 눈 위에 발자국 찍으러 가자.”

에이든은 누구보다 아이를 돌보는 일에 열성이었다. 그는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보상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이를 안고 정원을 산책하고, 동화책을 읽어 주고, 온갖 놀이를 다 해 주었다.

덕분에 나는 출산 후 몸을 추스르자마자 업무에 복귀할 수 있었다.

며칠 전 황제 폐하께서 칼립소 공작은 정계에서 은퇴하고 주부가 되려는 거냐며, 일에 더 집중해 달라 표현할 정도였다.

“마마! 마!”

“엄마도 같이 가자는 거야?”

“마! 마! 마마! 파파!”

마커스가 내 옷자락을 붙잡고 꺅꺅 웃었다.

아직은 빠빠, 마마밖에 못 하지만, 나로선 언제 이렇게 컸는지 기특할 따름이다.

나는 마커스의 양 뺨과 이마에 뽀뽀를 퍼부었다. 그러자 에이든이 은근슬쩍 내게 다가왔다.

내색하진 않지만 제게도 애정을 표현해 달라는 나름의 신호란 걸 이젠 안다. 연인부터 결혼생활까지 해서 함께한 지 벌써 몇 년이나 되었으니까.

나는 에이든의 입술에도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마커스가 까르륵 웃음을 터트렸다.

“애가 일어나서 조금씩 걷기 시작하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어. 테이블에 부딪히지 않도록 모서리마다 쿠션을 달아야 할 것 같아. 근데 그거 알아? 오늘 의사에게 다녀왔는데 마커스가 또래보다 발육도 빠르고 걷는 것도 이른 편이래.”

에이든은 자랑스런 웃음을 숨기지 못했다.

“우리 아들은 발육 빠른 것도 아빠를 닮았나 보네.”

“날 닮았다고?”

“난 작게 태어나서 발육이 느린 편이었다고 들었거든. 그러니 아빠를 닮은 거지. 조만간 잡고 일어나는 게 없어도 혼자 걷고 뛰겠네, 우리 아들. 그럼 같이 놀 친구가 있어야 하는데…….”

나는 에이든을 힐끗 확인하곤 말을 꺼냈다.

“동생이 있으면 덜 심심하겠지?”

“둘째는 없어, 셀레나.”

에이든이 고개를 내저으며 선을 그었다. 그는 출산 때 내가 내지른 비명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며, 마커스를 낳은 이후 스스로 우리가 함께할 수 있는 날짜를 체크하곤 했다.

분명 결혼 전후로 아이를 셋은 낳자고 했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둘째에 관해 운을 띄우면 에이든은 마커스만으로도 충분하다며 이렇게 딱딱하게 굴곤 한다.

“아들이 있으니 이제 딸도 낳고 싶어.”

결혼 초엔 한시도 내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했으면서 그는 혹여나 둘째가 생길까 봐 긴장한 얼굴로 다가간 만큼 뒷걸음질을 쳤다.

그게 서운할 법도 하지만 사실 진짜 참는 쪽은 에이든이란 걸 잘 알아서, 오히려 그만큼 내가 힘든 걸 경계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도 그럴게 지금도 에이든은 뒷걸음질 치는 행동과 달리 열락이 담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에이든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게 나다.

에이든의 기준으로 아이가 생길지도 몰라 ‘위험한 날’엔 혹시 손끝이라도 닿았다가 일을 치를까 봐 일부러 밤새 서류를 뒤적거리곤 할 정도다.

그러다 ‘안전한 날’엔… 에이든 때문에 밤새 울고 또 울어서 오후에 일어나면 목이 쉬었을 정도다.

그러니 지금 그가 경계하는 건 아이가 생길까 봐 경계하는 게 아닌, 유혹에 넘어갈지도 모르는 스스로였다.

“에이든. 혼자 육아하는 게 힘들어서 그런 거면 이제 나도 많이 참여할 수 있어. 회사 시스템이 아주 정교해져서 대표이사가 신경 쓸 게 예전처럼 많지 않거든.”

“육아야 보모도 있고 유모도 있으니 괜찮아. 난 정말로 네가 아픈 게 싫어서 그래.”

“잘 버텼는걸. 그리고 아팠지만 그 덕에 마커스를 만났잖아.”

“만에 하나 네가 잘못되면?”

에이든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가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런 일 없어.”

“그날 영영 너를 잃어버리진 않을까 얼마나 무서웠는지 몰라. 그러니 셀레나, 제발…….”

그가 간절하게 애원했다. ‘제발’이란 말 뒤엔 나를 더 자극하지 말라는 말이 생략되었다.

에이든은 아직 젊고 아주 건강한 남자였다. 건강하다 못해 에너지가 넘치는 남자였고 나를 몹시 사랑했다.

뜨겁게 타오르는 눈빛과 토해내는 한숨만으로도 온 힘을 다해 참고 있는 게 전해졌다.

그를 설득하려고 다시 다가가자 에이든이 눈을 질끈 감더니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갔다.

“언제까지 저러고 지낼 거야…….”

나를 위하는 것도 좋지만 매번 저런 식으로 회피하고 도망치는 걸 보는 것도 맥이 빠지는 일이다.

그만큼 겁에 질려서 그런 걸 테니 내가 이해하고, 하나 있는 마커스만 잘 키우는 게 맞는 걸까?

“하아.”

한숨을 푹 내쉰 나는 저녁을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에이든은 내 얼굴을 보면 몸이 달아오를까 도망가서 식사도 거르기로 한 모양이었다.

정말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험처럼 정답이 있는 문제라면 명쾌해서 좋을 텐데.

* * *

“여기 어딘가에 있을 텐데…….”

주말 오후, 점심 식사를 마친 에이든은 마커스와 함께 정원을 산책했고 나는 찾아야 할 자료가 있어서 서재를 뒤졌다.

책장을 확인하다가도 창문 너머로 꼭 닮은 부자가 정원 바닥에 앉아 꽃을 톡톡 건드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오면 하던 일을 멈추고 둘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세상에 태어나 가장 잘한 일은 마커스를 낳았단 거다. 두 번째가 에이든과 결혼한 일이고.

‘어쩜 저렇게 닮았을까.’

체형도, 앉은 자세나 뒤통수까지 제 아빠를 쏙 빼닮았다. 나를 닮은 구석이라곤 황금빛 눈밖에 없었다. 성격은 우리 둘을 반반씩 닮은 것 같고.

“아. 여기 있었네.”

멍하니 둘을 살피다 뒤늦게 자료를 찾아냈다. 거침없이 빼 들어 휘리릭 책을 넘기던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에이든의 일기장이었다. 책꽂이에 꽂아 놓으면 누가 볼 수도 있어서 일부러 책장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은 듯했다.

남의 일기를 함부로 읽는 게 아니라 얼른 덮어야 하는데, 자료인 줄 알고 넘기다 펼친 페이지에서 하필이면 마커스의 이름이 보여 나도 모르게 내용을 확인해 버렸다.

[노예로 자라며 내게 이렇게 이상적인 가정이 허락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아직도 셀레나와 결혼한 게 믿기지 않는데, 마커스처럼 사랑스러운 아이가 내 아들로 태어난 건 매일 아침저녁으로 기도해도 부족함이 없도록 감사할 따름이다.]

에이든이 내게 말하지 않은 속내라 여기서 덮는 게 맞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문장 때문에 그럴 수가 없었다.

[마커스가 처음 눈을 떠 나와 시선이 마주친 순간 맹세했다. 이 아이에게 단단한 뿌리가 되어 주자고.]

헙하고 숨을 삼켰다. 심장이 두근거려 왔다.

[뿌리 없이 세상을 살아가는 게 어떤 건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마커스만큼은 나와 같은 설움을 겪지 않았으면 한다. 물론 지금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하다. 심장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셀레나에게 뿌리내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랑의 결실도 맺었다.]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어나갈 때마다 가슴이 아려왔다. 에이든이 행복해서 다행이었다. 그리고 더 행복해지면 좋겠다.

[그렇다 한들 마커스가 나처럼 살아도 된단 건 아니다. 나는 내 아들의 뿌리가 되어 줄 것이고, 비바람을 막아 주는 지붕이 되고, 폭풍 부는 밤 등대가 될 것이다.]

나는 에이든이 적은 마지막 문장을 작게 읊었다.

“그럼 완벽한 아버지는 되지 못해도 좋은 아버지는 될 수 있겠지…….”

* * *

“울었어?”

마커스와 놀고 들어온 에이든이 내 얼굴을 확인하자 인상을 굳혔다.

아까 에이든의 일기를 보고 감정을 주체하기 힘들어 조금 울긴 했지만 잘 추슬렀기 때문에 티가 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데 예리하게 눈치챘다.

“아니. 아까 눈에 뭐가 들어가서 비볐더니 조금 부었나 봐.”

“정말 운 건 아니지?”

“아냐. 걱정하지 마.”

괜찮다는 말에도 에이든은 한참 동안 걱정스런 얼굴로 나를 살폈다.

마침 그의 품에 있던 마커스가 애애앵하고 울자 나는 재빨리 마커스를 받아 안았다.

“밥 먹을 시간이네, 마커스. 엄마랑 밥 먹으러 가자.”

나는 마커스를 식사시키는 내내 복잡한 마음을 추스르려 안간힘을 썼다.

‘완벽한 아버지는 되지 못해도 좋은 아버지는 될 수 있겠지.’

나는 내가 완벽한 엄마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애초에 완벽하다는 단어 자체가 상대적인 거라 그저 최선을 다하자고만 생각했는데 에이든은 달랐나 보다.

“이미 완벽한 아빠인데…….”

세상 어느 아빠가 에이든처럼 제 아들을 살뜰히 돌보고 사랑할까.

마커스가 다 자라서 어른이 되면 제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을 키웠는지 알게 될까.

다시 속이 울컥하는 바람에 나는 울지 않으려 한참 눈을 부릅뜨고 있어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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