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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31화 (132/134)

<외전 03>

“베키 말대로 아들 아닐까?”

“아들?”

만삭이 되자 숨을 쉬는 것도 힘들었다.

초산이라 배가 많이 나온 편도 아닌데 조금만 먹어도 배가 나오고, 밤에 잘 땐 옆으로 밖에 못 자는 상황이었다.

“아주 활동적인 게 말괄량이 아가씨거나 에너지 넘치는 아들이 분명해.”

마침 아이가 발길질을 했다. 순간 윽 하고 갈비뼈가 아팠다. 처음 태동을 확인했을 때 숨을 쉬지 못했던 에이든은 이제 능숙하게 태동을 알아차리곤 내 배를 쓰다듬었다.

신기하게도 아이는 제 아버지를 알아보기라도 하는지 에이든의 손길을 확인하면 아프지 않은 쪽으로만 발길질을 하곤 했다.

“에이든. 아들이면 좋겠어, 딸이면 좋겠어?”

“난…….”

에이든이 슬쩍 내 눈치를 봤다. 아무래도 내 앞에서 원하는 성별이 있다고 말하는 게 조심스러울 테다.

“딸도 좋지만 아들이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긴 해.”

“하긴. 작위는 아들에게만 상속되니까.”

“아니, 그게 아냐. 작위 상속이야 상관 안 써. 내가 잘난 조상이 있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집안도 아닌걸. 다만 딸은…….”

그가 얼굴을 붉히며 고백했다.

“딸은 겁이 나. 분명히 굉장히 작고 여릴 텐데 내가 조금만 힘 조절을 못 하면 상처 입힐지도 모르잖아.”

에이든의 고백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불안한 듯 제 볼을 쓸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들은 내가 남자니까 이 정도는 힘줘도 되겠단 가늠이 될 거 같은데 딸은… 그리고 난 내 딸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 만큼 섬세할 자신이 없어.”

당사자는 무척 심각한데 내 입장에선 사랑스러운 고민이라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에이든이 원망스레 나를 흘겨보았다.

“넌 여자라 내 마음 모를 거야.”

“이러다 배 속 아이가 딸이면 정말 큰일 나겠어. 일도 안 나가고 네가 업어 키우는 건 아닌가 몰라.”

“그럴 가능성이 없잖아 있지.”

에이든이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를 적어도 세 명은 낳을 예정인데 셋 다 딸이면 정말 어쩌려는지 모르겠다.

나는 기분 좋게 웃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기대었다. 딸이건 아들이건 다 좋으니 그냥 건강하게만 태어나면 좋겠다. 내가 바라는 건 그것 하나다.

“건강하게 만나자. 아가야.”

이미 일주일 전 출산 예정일을 넘겼기 때문에 당장 오늘이라도 진통이 시작될 수 있다.

얼른 내 아이가 딸인지 아들인지, 생김새는 누굴 닮았으며 어떤 성격인지 알고 싶었다.

우유를 마신 나는 산책을 가기 위해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에이든이 함께 벌떡 일어나며 물었다.

“앉아서 쉬는 게 어때? 언제 진통이 올지 모르잖아.”

“진통이 올까 봐 벌써 사흘째 방 안에만 있었는걸. 갑갑해서 나가서 바람이라도 쐐야겠어.”

그러자 에이든은 겨울이라 춥다며 외투부터 귀를 덮는 모자, 목도리, 장갑까지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내게 입혔다.

배가 부르다 보니 신발을 신는 게 가장 힘들었는데 에이든은 직접 털신을 신겨 주며 주의를 주었다.

“힘들면 바로 말해. 알았지?”

“나 그렇게 체력 없지 않아.”

“주변에 물어보니까 진통이 시작되면 체력이 좋아도 지쳐서 많이 힘들어진대. 차라리 내가 대신 아플 수 있으면 좋은데.”

만삭이 되자 에이든은 A부터 Z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이를 만날 거란 기대감도 크지만 날이 갈수록 두려움이 더 커지는 듯했다.

며칠 전엔 출산 경험이 있는 하녀들에게 이런저런 말을 듣고 와서는 최악의 경우를 상상했는지 겁에 질려 나를 꼭 붙들기도 했다.

그때 에이든은 잘게 떨고 있었다. 그가 두려움에 질린 목소리로 부탁했다.

‘셀레나. 힘들어도 잘 이겨내 줘.’

겁먹지 마라, 다 잘될 거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라 무작정 그를 안심시킬 수가 없었다.

사실 레이온 제약이 산모들이 산욕열로 죽는 원인에 대해 조사하는 중이라 나도 심란한 게 없잖아 있었다.

“에이든. 최악의 경우에, 만약 나와 아이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하면-”

“그런 말 하지 마.”

순식간에 새파래진 얼굴을 한 에이든이 입술을 떨었다. 커다란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그는 완전에 겁에 질려 있었다.

“만약이야. 만약.”

“만약은 없어. 셀레나. 넌 무사히 출산할 거야. 내가 하려던 말은 그거였어. 많이 고통스럽겠지만 그래도 잘… 젠장.”

욕지거리를 내뱉은 에이든은 아차 싶은지 입술을 깨물었다.

연애 시절부터 욕설을 줄이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결혼 전후로는 욕을 내뱉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만큼 그도 초조한 걸 테다.

“난 널 선택할 거야. 아이는 다시 가져도 되지만 넌… 난 너 없인 못 살아. 나 혼자서 못 키워. 자신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아. 네가 없는데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그렇게 단호하게 선을 그은 에이든은 내게서 앞서나갔다. 그럼에도 내가 걱정되어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는지 딱 세 걸음만큼 앞서나갈 뿐이다.

그때였다.

“아…….”

출산이 처음이라 진통이 정확하게 어떤 느낌인지 모르는데도 직감적으로 진통이 시작됐단 걸 알 수 있었다.

“에, 에이든.”

놀란 내 음성에 그가 휙 몸을 돌렸다. 놀란 에이든이 내게 다가왔다. 나는 두꺼운 장갑 때문에 둔탁해진 손으로 그의 팔을 붙잡았다.

“지, 집에 들어가자. 준비해야 할 것 같아.”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에이든이 나를 안아 들었다.

* * *

진통이 온다고 해서 바로 출산이 시작되는 건 아니었다.

미리 대기 중인 산파와 출산도우미들이 분주하게 출산 준비를 하는 동안 에이든은 내 옆을 지켰다.

점점 진통 주기가 빨라져 갔다. 후우. 후우. 배웠던 대로 숨을 마셨다 내뱉었지만 고통을 참는 게 점점 힘들어졌다.

진통이 심해질수록 평정심이 깨지고 두려움이 몰려왔다. 나는 에이든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심호흡을 했다.

“셀레나. 괜찮아. 괜찮을 거야.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마.”

나를 안심시키려 담담한 태도를 해 보였지만 그도 긴장했는지 아까부터 내 손을 잡은 손이 축축했다.

그러면서 태연한 척 땀 때문에 얼굴에 붙은 머리를 떼어 주었다.

와중에 착실하게 진통이 찾아와 나도 모르게 비명이 터져 나왔다. 더는 끙끙 앓으며 참을 수준이 못 되었다.

“공작님. 이제 나가셔야 해요.”

산파의 말에 에이든이 주인 잃은 개처럼 나를 보았다. 산파가 에이든에게 단호하게 외쳤다.

“나가셔야 해요! 산모와 산파, 출산도우미 이외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어요!”

“셀레나, 제발 날 위해서 잘 이겨내 줘.”

그 말을 끝으로 에이든은 방에서 내쫓겼다. 진통이 점점 거세어졌다.

“힘주셔야 해요! 조금만 더 힘을 내세요!”

“아아악!”

세상의 모든 출산서적을 불태워야만 한다. 출산서적에 적힌 고통은 진짜 고통의 반의반의 반도 못 표현했다. 그 책들은 모두 엉터리가 분명하다.

맹세코 이단심문소에서 몸이 아팠을 때도 이렇게 힘들진 않았다.

내가 비명을 지르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힘을 줘야 한다는 산파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인지되지 않았다.

“누가 공작님 좀 말려!”

“마님은 괜찮으실 거예요, 그러니 제발 진정하세요!”

밖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내가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그 소리조차 짜증스러웠다.

“흐으윽! 으윽!”

“머리가 보여요! 조금만 참고 힘내요!”

산파가 위에서 배를 눌렀다. 더 소리를 지를 힘도 없어서 나는 숨을 헐떡이며 마지막 힘을 짜냈다. 그리고.

“응애! 응애!”

우렁찬 울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기진맥진해 죽은 듯 누워 있는 내게 산파가 말했다.

“21시 43분. 손, 발 모두 멀쩡해요. 아주 건강한 아들이에요. 축하드립니다.”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어서 눈을 굴리자 산파가 내 얼굴 옆으로 아이를 가져다 댔다.

신생아는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작고 빨갰다. 가장 먼저 아이의 검은 머리카락이 보였다. 산파가 호들갑을 떨었다.

“갓 태어난 아이가 이렇게 머리숱이 많은 건 처음 봐요.”

“아빠를 닮아서 그래요.”

양수 때문에 퉁퉁 부었는데도 아이가 누굴 닮았는지 알 수 있었다.

이마와 코, 입술선… 어떻게 이렇게까지 에이든을 닮았나 싶을 정도로 제 아버지를 쏙 빼닮았다.

아이를 보자 눈물이 터졌다. 너무 고단해서 기운이 하나도 없는데 울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엄마가 되었다. 우리 가정에 아이가 찾아왔다. 우리 둘, 에이든과 나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였다.

“셀레나!”

문이 열리더니 에이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산모와 아이, 두 분 다 아주 건강합니다.”

“에이든, 아들이래. 널 닮았어.”

에이든은 창백하다 못해 하얗게 질린 안색을 하고선 아이보단 내 얼굴부터 살피는 중이었다.

그가 충혈된 눈과 축축하게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는 안 낳을래. 네가 잘못되는 줄 알았어.”

에이든은 내가 끼어들 새도 없이 넋이나가 말했다.

“생각해 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야. 낳으려면 너보다 체력이 좋은 내가 낳아야지, 어떻게 너처럼 마른 애가 열 달 동안 아이를 품고 출산을 한단 건지… 차라리 내가 여자면 좋을걸.”

“에이든. 나 피곤해. 조금만 잘게. 아이 좀 보고 있어.”

너무 지쳐서 눈이 스르륵 감겼다. 마지막에 산파에게서 아이를 받아 안은 에이든이 얼떨떨한 얼굴로 아기를 확인하는 게 보였다.

‘아이 이름은 뭐가 좋을까.’

미리 생각해 둔 이름이 많은데도 얼굴을 보니 그 모든 이름이 내가 원하는 것만큼 특별하게 여겨지지 않았다.

무거운 눈꺼풀이 닫히자 의식이 넘어갔다. 너무 피로해서 더는 버티지 못한 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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