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2>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계단 오르는 게 힘들진 않아? 내가 업어 줄까? 아, 업으면 배가 눌리니까 안아 드는 게 좋겠다.”
“계단 정도는 혼자 오를 수 있어. 제발 진정해.”
병원에 다녀온 후부터 에이든의 극성이 시작되었다.
고작 2층에 올라가는 것뿐인데 그는 혹여 발이라도 삐끗해서 구르진 않을까, 계단을 타는 게 피로해서 문제가 되진 않을까 전전긍긍하며 쫓아다녔다.
그뿐만이 아니다. 식사 때도 내가 조금이라도 눈길을 준 음식은 모조리 내 앞으로 밀어넣어 제 앞엔 무엇 하나 제대로 둔 음식이 없을 정도였다.
결혼 후 제대로 된 입맞춤도 없이 나란히 누워만 잔 것도 거의 처음인 듯하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그는 두 손을 제 가슴팍 위에 가지런히 모은 채 잘 정도였다. 그래도 난 서로 손이라도 잡고 자고 싶은데 이건 정말…….
“네가 이렇게까지 아이를 바랄 줄은 몰랐어.”
조금 서운해져서 입술이 비죽 나왔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서 손을 떼어내 내 허리에 감았다. 그러자 에이든이 펄쩍 뛰며 팔을 거둬들였다.
“안 돼. 출산 후에 네 몸이 완벽하게 회복되기 전까진 손도 안 댈 거야. 널 껴안고 자다가 실수로 힘이라도 주면 어떡해. 숨이라도 막히면 큰일인걸.”
그렇게 말한 그는 가슴팍에 팔짱을 낀 채 선을 그었다.
에이든이 보이는 극성맞은 행동에 황당하다 못해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난 네가 아이를 바라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부담스러워해서?”
“응. 아이를 바라는 만큼 바라지 않는 것도 같았거든.”
“막상 아이가 생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런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졌어. 그냥… 너한테 의사를 찾아가자고 말하던 그 순간 앞으로 뭐든 더 노력해야겠단 생각밖에 안 들어.”
에이든이 푹 한숨을 내쉬곤 말을 이어나갔다.
“난 더 멋진 어른이 되고, 더 많은 걸 알아야 해. 부모가 될 준비를 하려면… 좋은 아버지가 못 되면 어떡해.”
“걱정되는구나.”
“조금. …아니, 꽤 많이. 아주 많이…….”
에이든이 나를 향해 옆으로 돌아누웠다. 남자답게 잘생긴 얼굴에 복잡하고 예민한 속내가 투명하게 비춰졌다.
제 마음을 숨길 수도 없을 만큼 마음이 복잡하고 벅찬 모양이었다.
“내가 윽박지르는 아버지는 되지 않을까 걱정이 돼. 잘못을 저지르면 매질을 할 수도 있고, 안 좋은 습관만 물려줄 수도 있잖아. 내가 자라면서 본 건 그런 것뿐인걸. 노예 감독관들은 다들 그러니까.”
“넌 노예 감독관이 아니잖아. 안 그럴 거야.”
“무엇보다 보통의 아버지들은 어떤지 몰라. 정상적인 가정이 어떤 건지, 가족 안에서 아버지는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도 몰라.”
“그건 나도 그런걸. 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이 없으니까.”
나는 에이든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자 그가 커다란 몸을 움찔거렸다.
절대안정이 아무것도 닿지 않은 채 누워만 있으란 뜻은 아닌데 이렇게 겁을 낸다.
“나도 무서워. 보통 엄마들이 뭘 해 주는지 모르거든. 그래서 주변에 많이 물어보려고.”
“…우리 다 노력해야겠네. 특히 난 더…….”
“네가 좋은 아버지가 될 거라고 확신해. 그러니까 너무 겁먹지 마.”
에이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불안함을 감추려 흐릿한 미소를 짓곤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우리 둘 다 복잡한 마음으로 출산을 기다릴 듯했다.
* * *
임신 소식이 알려지자 주변에서 축하인사가 물밀듯 밀려들었다.
대신관이 된 마누엘 사제는 출산 전까지 매일 산모와 아이를 위한 기도를 드리겠노라 했고, 엠마뉴엘은 임신부들을 위해 북부에만 나는 약초를 다량으로 구입해 내게 보냈다.
황태자, 아니, 황제 폐하는 첫 아이의 대부가 되어 주겠다는 약속편지를 보내왔다.
그와 나는 가끔 마주치면 반갑게 인사하는 정도가 되었다.
물론 속을 알 수 없고 무뚝뚝한 황제의 성격상 나만 반가운 듯 보였지만, 측근들은 그가 나를 꽤 편한 친구로 여긴단 걸 알 수 있었다.
사적인 감정이 지워지자 오랜 세월 쌓아온 신뢰 관계와 서로에 대해 잘 아는 점이 남아 괜찮은 조력 관계가 될 수 있었던 덕분이다.
‘의외로 에이든도 그러려니 했지.’
나와 황제가 친구가 된 일로 질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워낙 담백한데다 적당한 거리까지 둔 친구라 그런지 에이든은 별반 신경 쓰지 않았다.
사실 우리 사이가 그만큼 단단하기 때문에 황제는 사소한 존재에 불과하기도 했다.
그리고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모르겠다.
나는 더 이상 그들을 미워하지 않는다. 내 삶에 더는 중요하지 않은 인물들이니까. 하지만 그게 용서했단 의미는 못 된다.
내가 나아가는 삶에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완전히 사라졌다. 가끔 작은아버지와 교류하긴 하지만 그조차 어느 시점부터 뜸해졌다.
작은아버지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긴밀한 만큼 언젠가는 이렇게 될 일이었기 때문에 아쉽진 않았다. 지난 시간 동안 내겐 많은 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에이든이 있다. 아이의 탄생을 누구보다 기뻐하고 누구보다 반기는 아이 아버지가.
* * *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자 극성맞은 성격도 아닌데 에이든은 나날이 예민해지기 시작했다.
주로 내 안전이나 휴식, 내가 먹는 것에 관한 거였다.
“저택 담벼락을 더 높이는 게 좋을 것 같아. 내가 없는 사이 강도라도 들면 어떡해?”
우리 집은 수도에서 황궁 다음으로 안전한 저택이었다. 신혼집을 구할 때 에이든이 가장 우선시한 게 안전이었기 때문이다.
담벼락도 황궁 못잖게 높아 더 높였다간 그건 담이 아니라 성곽이 될 수준이다.
“이것도 먹어 봐. 남부에서 산모들이 먹는 보양식이래.”
사흘 전엔 북부 보양식, 이틀 전엔 서부 보양식, 어제는 동부 보양식. 그리고 오늘은 남부 보양식을 권했다.
영양제도 꼬박꼬박 먹었고 다른 임신부들과 달리 입덧 대신 먹덧을 한 덕분에 보양식을 먹을 필요도 없이 고생 없이 영양을 섭취 중이다.
그런데도 에이든은 어디서 듣고 오는 건지 하루가 멀다고 몸에 좋단 걸 사 나른다.
“편하게 누워 있어. 보고서는 내가 읽어 줄 테니까 넌 듣기만 해.”
내 일까지 이렇게 돕고 나면 대체 에이든은 제 일은 언제 처리하는 걸까?
그는 출근 땐 회사 앞까지 나를 바래다주고 퇴근 때가 오면 데리러 왔다. 그리고 집에 있으면 온종일 내 곁에 붙어 있었다.
부은 발을 안마해 주거나 부푼 배에 대고 동화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나와 아이를 위해 할 만한 것들을 찾아 만들어 내가 만류할 정도였다.
“아냐. 서류는 더 안 봐도 될 것 같아.”
말려도 저 극성을 어쩔 수 없단 걸 알아, 나는 서류를 내려놓고 소파에 앉아 배를 문질렀다.
그러자 에이든도 자리에서 일어나 소파로 따라와 꼭 붙어 앉았다.
“아이 낳고 백 일만 쉬고 바로 업무 복귀하려고.”
“몸 회복되는 것 보고 복귀하는 게 좋지 않을까? 아이 때문에 장기도 틀어지는데 고작 백 일 쉬는 걸로 몸이 온전히 회복될 것 같진 않은데…….”
그간 배가 꽤 많이 부풀었다. 출산 후 곧장 회사에 복귀하기도 힘들 것 같아 업무 공백을 대비해 최선을 다해 일을 끌어다 처리하는 중이었다.
내 어깨를 감싼 에이든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임신 기간 동안 나를 만지지 못하는 게 아쉬운지 언젠가부터 내 머리카락을 그렇게 쓰다듬곤 했다.
“베키 말이 아들일 가능성이 높대.”
“아들?”
“배 모양이 둥글면 아들이래.”
“아들이면 좋겠어?”
“글쎄.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어.”
아이를 하나만 낳을 것도 아니고 우리 둘 다 외롭게 자라 아이에게 복작복작한 가족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그 순간이었다.
“어? 아!”
“왜 그래?”
내지른 탄성에 깜짝 놀란 에이든이 벌떡 일어나 내 안색을 살폈다. 나는 손으로 부푼 배를 쓰다듬었다.
“아…….”
“셀레나. 무슨 일 있어?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거야?”
“아냐. 그게 아니라… 태동이야.”
“태…동?”
나보다 출산 서적을 많이 읽어 태동이 뭔지 모를 리도 없는데, 에이든은 반쯤 얼이 빠져 나를 보았다.
푸시시 웃음이 새어 나와 그의 손을 붙들어 내 배 위에 얹었다. 그간 뱃속이 꼬르륵하고 기포가 새는 것 같은 느낌의 태동은 몇 번 있었지만 이렇게 배를 툭툭 찬 건 처음이다.
아이가 배를 툭 차자 에이든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헙.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영웅이면서 아이 태동에 이렇게 놀라 숨을 삼키는 게 얼마나 웃긴지 모르겠다.
“느껴져?”
“어, 어어. 그게… 아!”
배가 툭 튀어나오는 게 보이도록 크게 태동을 보이자 에이든은 더 벌어지지도 못할 만큼 입을 쩍 벌렸다.
“세, 셀레나. 방금 봤어? 배가… 아, 아가…야?”
에이든이 배에 대고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신기하긴 나도 마찬가지인데 에이든의 반응 덕분에 웃음부터 터졌다.
그때 또 눈에 보일 정도로 태동이 느껴졌다.
헉!
숨을 들이켠 에이든이 나를 바라봤다. 어떻게 해야 하냐는 의미였다.
황궁에선 다른 귀족들과 잘만 다투면서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에겐 어쩔 줄을 몰라 안절부절못한다.
“내 목소리를 아나 봐. 앞으로 더 열심히 동화책을 읽어 줘야겠어. 참. 배가 아프진 않아? 숨이 차거나 힘이 들진 않고?”
“괜찮아. 아기가 건강해서 태동도 하는 것 같아서 기분 좋아.”
“먹고 싶은 건 없어? 포도, 포도가 먹고 싶진 않고?”
태동을 확인한 에이든이 호들갑을 떨며 내게 이것저것 먹이려 시도한 탓에 그를 진정시키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그럼에도 결국 나는 에이든이 가져온 주스를 홀짝여야 했는데, 흥분해서 발갛게 상기된 에이든을 보니 웃음이 터져서 배가 부른 줄도 모르고 잔을 비웠다.
그렇게 하루하루, 에이든의 극성을 말리며 지내다 보니 출산일이 임박했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랐고 에이든은 언제 출산이 시작될지 모른다며 긴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