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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29화 (외전) (130/134)

<외전 01>

눈이 번쩍 떠졌다. 아직 새벽이라 커튼 너머로 어슴푸레한 빛만 들어왔다.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근육이 단단히 짜인 가슴과 잠든 에이든의 얼굴이 보였다.

이렇게 그가 자는 모습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다. 보통은 내가 깨어날 때까지 에이든이 잠든 나를 구경하거나, 먼저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기 때문이다.

내가 게으름을 피워서가 아니다. 결혼 이후 매일 새벽까지 잠 못 들게 괴롭혀서 나는 기진맥진한 채 기절해 잤고, 에이든은 괴물 같은 체력으로 한두 시간만 잔 채 하루를 시작한 거다.

지금도 시계를 확인하니 잠이 든 지 두어 시간밖에 안 된 상태였다.

‘오늘은 좀 일찍 잤었지.’

근래에 내가 너무 피곤해한 탓에 에이든도 밤새 나를 괴롭힐 수가 없었다.

“더 자.”

에이든이 팔에 힘을 주어 나를 제게 바짝 끌어당겼다. 그가 다른 팔로 내 등을 토닥였다.

결혼식을 올린 지 반년이나 되었지만, 에이든이 이렇게 팔다리로 나를 꽁꽁 가둔 채 잠든 걸 볼 때면 우리가 결혼했단 게 새삼스레 실감되곤 했다.

황금비가 내리고 한 달 뒤 병마에 시달리던 황제는 큰 축복을 받은 듯 아주 편안하게 승하했다.

황태자가 뒤를 이어 황좌에 올랐고, 마침 노예제도 철폐가 시작되었기에 제국은 온몸으로 진통을 앓았다.

에이든은 그 진통을 최전선에서 처리하는 실무자가 되어 아주 정신없는 생활을 보내야 했다. 나는 나대로 레이온 제약을 이끄느라 바빴다.

그렇게 3년이 훌쩍 지나자, 에이든은 새 황제와 함께 새로운 제국을 이끄는 정치인이 되었고 나는 다국적 대기업이 된 레이온 제약의 대표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우린 결혼했다. 에이든은 더 이상 결혼을 미루기 싫다 했고 나는 나대로 가정을 꾸리고 싶어서, 결혼식을 올리자고 마음먹은 지 한 달 뒤 곧장 예식을 올렸다.

대신관이 된 마누엘 사제가 와서 직접 축복해 주었고, 황제가 참석해서 자리를 빛냈으며, 구즈만 부부를 비롯해 유명인사는 다 모인 자리가 되었다.

아, 당연하게도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초대하지 않았다. 더 이상 그들을 증오하지 않는다. 다만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내 일상과 미래에 존재하지 않았다. 작은아버지와는 나쁜 감정이 없어서 초대하긴 했지만 그는 잠시 자리만 지키다가 떠났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내 접점은 딱 거기까지였다.

‘아. 이게 아닌데…….’

어찌나 거세게 붙잡았던지 에이든의 품 안에서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가슴팍을 밀어내려 하자 숨을 못 쉬도록 끌어당겨서 팔을 툭툭 치며 에이든에게 놓으라 신호했다.

물론 그는 잠이 든 상태지만 내가 자다가 깬 건 다 이유가 있어서다.

“에이든. 좀 놔 봐.”

“으응. 왜 그래.”

에이든을 거세게 흔들자 그가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졸음이 가득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한 주제에 아주 당연하다는 듯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 씩 미소 지었다.

밖에선 무시무시하단 평을 받지만, 단둘이 있으면 에이든은 이렇게 긴장이 풀어져 부드러운 모습만 보인다.

몇 년 사이 그는 노련해진 정치 실력만큼이나 차갑고 매서운 사람이 되었고, 그만큼 더 능숙한 연인이 되었다.

“나 배고파. 밥 먹으러 갈 거니까 이것 좀 놔.”

“아직 식당 하녀들도 잘 시간이야. 조금만 참아.”

“상관없어. 내가 차려 먹으면 돼.”

에이든의 팔에 힘이 느슨해진 틈을 타서 그에게서 벗어났다. 하지만 그건 찰나의 일이었다.

옆으로 빙그르르 굴러 침대를 나오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그가 내 위에 올라와 나를 두 팔 안에 가두고 있었다.

제법 졸음이 가신 눈이 뜨겁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빙그레 비소 지으며 내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하녀들이 깰 때까지만이야.”

“으음.”

자잘한 입맞춤이 목에서 쇄골에 퍼부어졌다. 이 익숙하고도 뜨거운 전개에 제법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에이든이 내게 열기를 선사할 때면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안 돼애. 나 정말 배가 너무 고파. 진심이야.”

내 말에 에이든이 아쉬운 듯 일어나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다. 숄을 걸치고 주방으로 가며 그에게 설명했다.

“꿈에서 잘 익은 포도가 가득한 밭이 나온 거야. 너무 먹음직스러워서 따먹으려고 손에 쥐는 순간 꿈에서 깼지 뭐야. 그래서인지 눈을 뜨는 순간 뭐라도 먹어야겠단 생각이 들었어.”

“포도라고?”

“곧 여름이라 그런가 봐. 포도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닌데, 희한하지?”

꿈 이야기를 들은 에이든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부엌에서 직접 빵과 치즈, 그리고 과일을 꺼내 온 에이든이 내 얼굴을 살폈다.

평소처럼 내가 좋아서 빤히 바라보는 정도가 아니었다. 아주 세심하게, 꼭 나 달라진 것 없어? 라는 질문에 뭐가 달라졌는지 알아내기 위해 확인하듯 꼼꼼히 확인했다.

“뭐야?”

에이든은 대답 대신 생각에 잠겼다. 그가 표정을 시시각각 바꾸는 건 잘 없는 일이었다.

조금 들뜨는가 싶더니 실망한 듯 인상을 찡그렸다가, 한숨을 삼켰다가 묘한 웃음을 짓더니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뭔데 그래.”

“어… 오해하지 말고 들어, 셀레나.”

정신없이 빵에 치즈를 발라 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른 새벽에 이렇게 음식이 맛있었던 적이 몇 번 없는 것 같은데 허기가 져서 그런지 정말 너무 맛있었다. 분명 아는 맛인데 모르는 맛처럼 말이다.

에이든은 그런 내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다 복잡한 얼굴을 했다.

“마침 오늘 주말이니 식사 끝내고 의사부터 찾아가자.”

“의사?”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에이든이 입가에 묻은 치즈를 닦아주었다. 그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혹시 몰라서 그래.”

“의사는 왜? 자다가 일어나서 먹는 게 그렇게 이상한 건 아니잖…….”

생각 없이 말하던 나는 뒤늦게 그의 의도를 깨닫곤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 보니 지난 세 달간 소식이 없었다.

바쁘고 피로하면 자주 달거리를 건너뛰곤 했는데, 기혼인 이상 그냥 넘어갈 일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에이든은 결혼한 이후 거의 매일 밤 나를 탐했다. 삼 년간 입만 맞추고 헤어져서 해소하지 못한 열기를 이제야 다 뿜어내듯, 식을 올린 날부터 어제까지 나를 가지지 않은 날이 한 손으로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도 에이든도 건강한 성인남녀고 아직 한참 젊으니 임신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지난번에 구즈만 씨에게서 들었는데 과일이나 물고기가 나오는 생생한 꿈을 꾸면 임신이래. 하지만 아닐 수도 있으니까 그냥 가볍게 검진만 받아 보자.”

나도 모르게 먹고 있던 빵을 내려놓았다. 배를 내려다봤지만 부풀기는커녕 다름없이 납작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아이를 바라지 않는다고 생각해서일까. 에이든이 심각해진 얼굴로 말했다.

“꼭 임신이란 건 아니고 아닐 수도 있으니까-”

“난 임신이면 좋겠어.”

내 말에 에이든이 눈을 크게 떴다. 배를 만지작거리자 괜한 기분이 몰려와서 눈가가 시려졌다.

에이든과 결혼 전 아이를 갖는 문제로 많이 이야기했었다.

나는 레이온 제약 일만으로도 너무 바빠 당장 임신과 출산을 감당하기 힘들단 입장이었고, 에이든은 에이든대로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아이를 부담스러워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가 더 많은 가족을 바란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결혼 후 단 하루도 조심하지 않고 매일 밤 서로를 알아갔던 것도 그래서다.

직접적인 언급은 피했지만 나는 아이가 생기면 두 명이든 세 명이든 유모와 보모를 써서 일과 육아를 병행할 생각이었고, 에이든은…….

‘방금 반응을 보니 내심 아이를 바랐던 것 같아.’

모르긴 몰라도 아이가 생기면 누구보다 기뻐할 준비가 된 것 같다.

“넌 아이가 싫어?”

“아니. 그럴 리가 없잖아!”

예상대로 에이든은 펄쩍 뛰며 고개를 내저었다. 나는 다시 빵에 치즈를 바르며 말했다.

“밥 먹고 알버트 부모님네 병원에 가 봐야겠어. 같이 갈 거지?”

“당연하지. 아,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우유 가져올까?”

먼저 물어놓고 에이든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주방으로 들어가 마실 걸 한가득 내어왔다.

우유, 주스, 요거트까지… 묘하게 상기된 얼굴이 그가 지금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말해 주는 듯했다.

나는 납작한 배를 힐끗 확인하곤 기대감을 참으려 안간힘을 썼다.

이렇게 입맛이 도는 게 제발 새 가족을 맞이한단 신호길 간절히 바랐다.

***

“축하드립니다. 임신입니다.”

통속 소설에서나 보던 문장을 직접 체험하는 게 이렇게 좋을 수도 있을 줄은 몰랐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배를 내려다보았다. 이 안에 에이든과 나, 우리 아이가 있단 게 믿어지지 않았다.

옆에서 에이든이 숨을 들이켰다. 내 임신을 먼저 알아차린 게 자신이면서 정작 임신 판정을 받으니 놀라서 온몸을 덜덜 떨며 입을 틀어막았다.

“저, 정말입니까?”

“예. 임신부에게 좋은 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꼬박꼬박 드시고 절대 무리하시면 안 됩니다. 무조건 안정, 또 안정하셔야 해요.”

“무, 물론이죠. 그러니까 그, 제가, 아, 아, 아…….”

“아?”

“아버…지가 된다는 말씀 아닙니까?”

“예. 예정일은 올겨울 혹은 내년 초가 되겠군요.”

“신이시여.”

단 한 번도 신을 찾아본 적이 없던 에이든이 신을 부르짖으며 제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그가 감격에 젖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꼭 안고 싶은 눈치였지만 절대안정이란 말에 손끝도 못 대는 눈치였다.

그래서 병원을 나와 마차에 올라타자마자 내가 먼저 에이든에게 안겨들었다.

에이든은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때처럼 어색하게 뚝딱거리며 내 등을 쓸었다.

조금도 힘이 가해지지 않도록 팔을 떨며 손끝으로 토도독 쓰다듬는 정도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셀레나, 어쩌지? 나 울 것 같아.”

“맙소사. 에이든!”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너무 기뻐. 부모가 되는 거잖아. 아이라니… 나한테 아이라니…….”

그렇게 말한 에이든은 결국 내 어깨에 얼굴을 파묻은 채 한참 동안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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