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커다란 손이 부드럽게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한여름이 가까워져서 햇빛이 뜨거웠다.
에이든이 역광을 지고 있어 눈이 부시는 바람에 눈이 떠지질 않았다.
그러자 그가 내 이마 위로 손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복수는 끝이 났지만 네 인생은 이제부터 시작이야.”
“맞아. 이제 시작이지. 그런데 레이온 대표가 아닌 셀레나 레이온이란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잘 모르겠어.”
나는 혼란을 숨기지 않았다. 에이든은 내가 믿고 의지하는 데다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복수가 사라진 자리에 다른 것들로 삶을 채워나가야 하는데 이단심문소에 가게 되며 모든 기반이 무너졌잖아. 그전에도 취미랄 게 없었는데 이젠 친구도 사라졌어.”
아멜리아는 내 친구가 아니었고 엠마뉴엘은 북부로 떠났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레이디로 지낼 때 알고 지내던 사람들과는 연락이 끊겼다.
그렇다고 셀레나 레이온으로 살면서 주변에 많은 관계를 만들었냐고 하면 그건 아니다.
공적으로 얽힌 사람은 많아도 사적으로 아는 이들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갓 태어난 아이처럼 처음부터 시작해야 해. 그게 아득하게 여겨져.”
괴로운 마음에 나도 모르게 두 손으로 볼을 쓸었다. 에이든은 그런 내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마디가 툭 불거진 커다란 손이 손과 볼을 동시에 감쌌다. 살짝 무게가 실리자 볼이 뭉개졌다.
“나도 마찬가지야. 시궁창 같던 노예 생활을 청산한 뒤 모든 게 처음이었어. 자유도, 글도, 낮잠을 자는 것도. 내가 처음이 아니었던 건…….”
후우. 에이든은 깊은숨을 내쉰 뒤 쐐기를 박았다.
“너를 사랑하는 것밖에 없었어.”
짧은 문장이었지만 나만을 담은 두 눈엔 진심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서인지 더운 여름 공기가 몸 안에서부터 훅하고 불어왔다.
가슴을 중심으로 무언가가 퍼져나갔다.
“먹는 것, 입는 것, 하다 못 해 자는 것까지 전에는 허락되지 않은 것들이 가득했어. 내게 처음을 선물한 건 너야. 셀레나.”
“내…가?”
“끔찍하던 어린 시절 태어나 처음 본 태양이 너였어. 내가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느낀 것도, 누군가 내게 친절을 베풀 수 있단 걸 가르쳐 준 것도 너였지. 내 이름을 쓰는 법을 가르쳐 준 것도 너였고, 예법을 가르쳐 준 것도, 사람 노릇을 하도록 처음부터 고쳐준 것도 너였어. 셀레나. 넌 내 모든 처음이었어.”
부끄러워서 얼굴에 열이 오를 법도 한데 심장이 정신없이 뛰는 탓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뱃속에서 찌르르 찌르르하는 감각이 요동쳤다.
탄성이 목구멍까지 나오고 전율 같은 게 목을 타고 척추 끝까지 흘렀다.
내가 누군가의 처음이 될 수 있다는 게 영광이었다.
에이든이 전하는 사랑 고백이 나를 향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 사소한 진실이 너무도 거대하게 여겨졌다. 부담스러워서가 아니다.
신실하게까지 느껴지는 저 사랑을, 다름 아닌 내가 받고 있단 게 놀라워서다.
“내가 네 처음이 될 수 있다곤 생각 안 해. 나와 달리 넌 이미 많은 걸 경험했으니까. 하지만 두 번째는 내가 함께하고 싶어. 친구를 사귀는 것도, 취미를 만드는 것도… 그래 줄 수 있을까?”
거친 눈빛과 다듬어지지 않은 말투, 정제되지 않은 행동을 보이면서 저토록 간절한 목소리를 하는 건 반칙이다.
세상 모든 걸 삼킬 듯 새까만 눈에 애틋한 열기가 들끓는 것도 반칙이다.
저렇게 말하면 하늘 아래 어떤 여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고백한 당사자도 아닌데 내 숨이 가빠질 지경이었다.
내가 얼른 대답하지 않자 에이든이 숨죽인 채 내 눈치를 보았다.
축 처지는 눈썹과 초조해서 지그시 깨무는 아랫입술에 시선이 갔다.
황태자 앞에서도 기죽지 않는 이 남자가 내 앞에선 순한 양이 된다는 게 새삼스러웠다.
나는 손을 비틀어 내 볼을 꾹 누른 에이든의 손을 치웠다.
“볼을 눌러서… 말을 못 하겠어…….”
“아…….”
“…에이든. 넌 두 번째가 아냐. 적어도 …에서는…….”
“미안. 잘 안 들렸어. 뭐라고 한 거야?”
에이든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하고자 하는 말을 입에 담기도 전에 얼굴이 달아올라 고개가 푹 수그려졌다.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한 건 네가 처음이야…….”
사랑에 있어선 에이든이 처음이었다.
손을 잡은 것도, 입맞춤을 한 것도, 설레다 못 해 가슴이 벅차오르고 함께 하는 것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지도록 애틋한 것도, 전부 에이든이 처음이었다.
‘왜 대답이 없는 거지?’
내 고백이 부담스러운 걸까? 그에게선 아무런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 반응을 살피려는데, 에이든은 내 반응을 볼 수 없도록 제 품에 가두었다.
나를 붙잡는 힘이 어찌나 거센지 고개를 들기는커녕 팔을 뺄 수도 없었다.
“에이든?
“잠시만. 셀레나, 잠시만.”
에이든의 음성이 거세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내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저절로 넓은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게 되었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박동이 느껴졌다. 그제야 그의 몸이 잘게 떨리는 중이란 걸 깨달았다.
억지로 팔을 들어 나도 그를 안아주었다.
흉통이 두터워 에이든처럼 두 팔로 다 감싸안는 게 불가능했지만 그걸로도 충분했다.
쿵. 쿵. 쿵.
귓가에 울리는 심장박동에 막연히 힘들던 마음이 진정되었다.
그래. 내겐 에이든이 있었다. 이 사람만 함께하면 어떤 불행이 닥쳐도 그게 최악으로 여겨지진 않을 테다.
‘어릴 때나 지금이나 받기만 한 것 같아.’
부모도 가족도 아닌데 이렇게 맹목적인 애정을 받아도 되는 걸까. 애초에 그게 가능이나 한 걸까.
아직은 내가 준 사랑보다 받은 사랑이 더 커서 에이든의 마음이 온전히 이해가지 않았다.
아. 내 삶의 1막이 끝나고 2막이 시작되는 만큼 이제 뭘 해야 하는지 알 것 같다.
취미도, 친구도 좋지만 내가 해야 할 건…….
“에이든. 항상 내 옆에 있어. 내 옆에서, 이젠 주기만 하지 말고 내가 주는 사랑을 받는 것도 경험해 봐.”
탄탄한 근육이 잡힌 가슴이 요동쳤다. 그가 놀라서 숨을 들이켠 탓이다.
차가운 외모와 어울리지 않게 정말 솔직한 반응이었다.
에이든 칼립소가 이토록 귀여운 사람이란 걸 알면 다들 탐을 낼 텐데.
검술대회부터 성배를 찾는 일, 노예제 폐지 문제까지 여태 활약한 게 많다 보니 앞으로 에이든에게 많은 관심이 쏠릴 테다.
그가 허튼 유혹에 넘어갈 사람이 아니란 건 알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않고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생각이 뻗어가자 괜히 마음이 급해진다.
그때였다. 에이든이 품에서 나를 놓고는 갑자기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시선이 모여서 주변을 둘러보며 에이든에게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에이든, 얼른 일어나. 왜 그래?”
“지금이 네게 고백할 때란 생각이 들어서.”
“고백?”
에이든이 품에서 조그만 상자를 꺼냈다. 상자를 열자 반지가 나왔다.
반지에 박힌 다이아몬드가 햇빛에 반짝반짝거렸다.
사람들 시선이 부끄러워서 두 손에 얼굴을 묻으려다 깜짝 놀라 입을 벌린 채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결혼이 이르다는 건 알아. 이건 약혼반지야. 네가 하고플 때 결혼해도 좋아. 그래도 약혼한 상태면 좋겠어.”
손만 잡아도 귀까지 붉히며 부끄러워하던 에이든인데 지금의 그는 쑥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아주 진지했다.
그는 제 모든 걸 걸고 전쟁에 임하는 장군 같았다.
패배할까 두려워하되 전투에 나서는 것에 망설이진 않았다.
“너는 아름답고, 똑똑하고, 아주 멋진 여자잖아. 그에 비해 난 부족한 점이 많지만… 스스로를 비하하는 게 아니야. 객관적인 사실이 그런 거니까. 내가 모자람 많다고 해서 널 포기할 생각은 없어. 셀레나 레이온이 아깝다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노력할 거니까.”
“…….”
“최선을 다해서 네가 원하는 남자가 될게. 셀레나, 네 처음과 마지막이 되는 걸 허락해 줄 수 있을까?”
얼굴에 열이 오르다 못 해 터질 것 같았다.
반지가 빛 조각을 모아 담은 듯 반짝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떨리는 손으로 손을 내밀었다. 에이든이 침을 삼키자 목덜미가 움직였다.
그가 느릿하게 내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주었다.
대체 어떻게 안 건지 반지 사이즈가 꼭 맞았다.
반지를 낀 건 처음이라 낯설고 어색한데 싫지는 않았다. 환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에이든의 손을 잡아 그를 일으켜 세웠다. 검은 눈이 내 손에 못 박혔다.
흐읍. 그는 내가 반지를 낀 사실이 벅차는지 아랫입술을 콱 깨문 채 숨을 삼켰다.
“에이든?”
일어난 에이든이 나를 안아 줄 거라 생각했는데 반대였다.
그는 북받치는 감정을 이기지 못 해 눈가를 꾹 누른 채 감정을 삼켰다.
웃음이 터진 건 나였다. 에이든이 이렇게까지 감동할 줄은 몰랐던 터라 깔깔 웃으며 등을 쓸며 그를 달래주었다.
“결혼 날짜가 나온 것도 아니고 무기한 약혼인데 왜 그래.”
“…넌 모를 거야. 나한테 네가 어떤 존재인지.”
그는 다른 고백 없이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헐떡였다.
노예로 태어나 밑바닥을 헤매다 스스로 이곳까지 올라온 남자다.
그런 남자가 오래전부터 사랑했던 게 나다.
에이든이 느낄 감정을 짐작할 수 없어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곁을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건 내일도, 모레도, 아주 먼 미래에도 유효할 테다.
가슴이 저릿하도록 사랑하는 이 남자를, 한때 나를 위해 제 모든 걸 바쳤고 앞으로도 그럴 이 남자를 온 마음을 다해 힘주어 안았다.
“사랑해. 에이든.”
에이든도 자신이 내게 어떤 의미인지 모를 테다.
지옥에 떨어질 때마다 나를 구원해 준 구원자.
한 치 온기도 없는 곳에서 빛이 되어 준 태양. 먼 미래에 나와 가족이 되어 가정을 일굴 남자.
그리고 내 첫 남자이자 마지막이 될 남자, 에이든.
모든 게 끝났다. 복수를 이뤘고 행복해지는 결말도 맞았다. 하지만 이게 진짜 끝은 아니다.
해야 할 게 너무 많았다. 에이든과 사랑을 키워나가는 것, 함께 행복해지는 것. 그리고 그 행복을 평생 가꾸어나가는 것.
지옥에서도 빛이 되어 준 에이든이 있기에, 앞으로의 나날이 자신 있었다.
나는 행복할 것이다. 에이든 칼립소와 함께.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