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마누엘 사제가 옆에서 박수를 치며 진심으로 기뻐했다. 알버트가 활짝 웃으며 설명해 주었다.
“퓌셀 후작과 모티조 자작이 폐지에 표를 던졌어요. 12인의 귀족들이 폐지에 찬성표를 던진 터라 조만간 의회에서도 통과될 거라고 해요.”
“그게 정말이죠? 농담이 아닌 거 확실하죠?”
“네. 덕분에 지금 바깥은 난리통이에요.”
노예제 폐지 문제가 12인의 귀족들 투표까지 간 적도 손에 꼽지만 이렇게 투표에서 승리한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에이든을 만나러 가야겠어요.”
이 순간 가장 기뻐할 사람은 에이든이다. 그에게 직접 축하해 주고 싶었다.
“제가 의회를 나올 때 칼립소 공작님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서 한 발자국도 못 나오고 계셨어요. 의회에서 처리할 남은 일도 많으실 텐데 사무실에서 기다리는 건 어떠세요?”
“아… 그렇네요. 알버트, 당신 말이 맞아요. 내가 가 봤자 방해만 되겠죠. 그러니… 믿기지가 않아요. 제가 꿈을 꾸는 건 아니죠?”
“꿈 아니에요. 사장님, 진심으로 축하드려요!”
“축하합니다, 셀레나 씨.”
“마누엘 사제님. 덕분이에요. 퓌셀 후작을 설득해 주셨잖아요.”
이후에도 몇 번이나 인사를 거듭했지만 뭐라고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너무 떨리고 벅차서 아무 말이나 지껄이다가 마누엘 사제를 배웅하고 이후엔 직원들과 정신없이 회의를 했다.
회의 내내 집중이 되지 않아서 대충 일을 끝내고 집에 가서 에이든을 기다리기로 했다.
그렇게 짐을 챙길 무렵 에이든이 찾아왔다.
“사장님을 뵈러 왔는데 안에 있-.”
에이든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그를 확인한 직원들에게서 커다란 환호성과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휘파람까지 불며 투표에서 승리를 거머쥔 걸 축하했다.
몇몇 지역에선 노예제도 유지로 의견이 나뉘었지만 적어도 수도는 폐지에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그래서 직원들도 역사적인 변화를 이끈 에이든의 등장에 진심으로 환호할 수 있었다.
“역사적인 날 사장님 덕분에 주인공을 다 만나네요.”
“가시기 전에 사인 한 번만 해 주고 가세요!”
“공작님, 오늘 의회에서 진짜 멋있었어요! 악수 한 번만 해 주십쇼!”
직원들이 호들갑을 떨자 에이든이 얼굴을 붉혔다.
이런 반응을 생각지 못 했던지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찾아 도와 달란 눈빛을 보냈다.
“사인이랑 악수는 다른 날 하고, 오늘은 축하만 받을게요. 다들 제 일처럼 기뻐해 줘서 고마워요. 다들 퇴근 시간 됐으니 야근하지 말고 어서 집에 가요. 알았죠?”
얼른 인사를 나눈 뒤 에이든을 붙잡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탁. 마차 문이 닫히자마자 나는 꾹꾹 참았던 비명을 토해냈다.
“오늘 하루가 꿈같아. 이게 현실이란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야. 당사자인 넌 얼마나 떨릴까. 에이든, 정말 축하해. 대체 어떻게 축하를 건네야 할지 모르겠는데 투표 결과를 듣고 나니 눈물이 날 것처럼 기뻐. 그러니까-.”
“셀레나, 셀레나.”
숨도 쉬지 않고 속에 든 말을 토해내자 에이든이 내 어깨를 붙잡고 심호흡을 시켰다.
나도 이렇게 떨리고 기쁜데 에이든은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대체 어떻게 진정해야 할지 모르겠어.”
에이든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도 배를 잡고 웃다가 내 어깨에 기댈 만큼 크게.
“에이든?”
“하하. 셀레나, 네 덕분에 좀 진정이 돼.”
웃음이 잦아들자 에이든은 눈가에 맺힌 눈물을 슥슥 닦아냈다.
그가 보인 반응이 의아해서 물끄러미 바라보자 에이든이 설명했다.
“종일 얼떨떨해서 실감이 안 났거든. 기쁜 것보단 노예제가 폐지되며 일어날 사회 변화 때문에 두렵기도 했고. 근데 너를 보니까 이제 실감이 나.”
에이든이 조심스레 나를 껴안았다. 오늘 하루 그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여실히 전해졌다.
구즈만 씨나 에스타리온 백작이 조금씩 도움을 주었다지만 나머지는 모두 에이든의 몫이었다.
홀로 고군분투하며 많이 외롭고 힘들었을 테다.
나는 무거웠을 어깨를 쓰다듬었다. 근 몇 주간 그가 느꼈을 압박감을 생각한다면 기뻐하기보단 고생했단 말이 나오는 게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 어깨를 두드리는 순간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에이든이 울음소리를 내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흐으으. 끄흐윽.”
꼭 짐승의 울부짖음 같았다. 서러웠던 지난날이 섞여, 무겁다 못 해 눈가가 시큰해질 정도였다.
노예로 살아온 녹록찮은 세월을 제 손으로 끊어냈고 이젠 다른 이들을 해방시켰다.
그 속이 어떻게 한 마디 축하와 웃음으로 해소될까.
어깨를 적시는 눈물이 뜨거웠다. 시린 울음소리에 코가 시큰해졌다.
오늘 이룬 승리가 어린 에이든에게 위로가 되면 좋겠다.
그리고 그가 노예로 살며 받았을 상처가 해소되길 정말 간절히 바란다.
* * *
“노예제 폐지 투표에서 이긴 건 황금 비가 불러온 기적일지도 모르겠어.”
에이든이 빵에 버터를 바르며 툭 내뱉었다. 아침 햇살이 닿자 퉁퉁 부은 눈이 더 선명히 보였다.
밤늦게 짠 걸 먹고 자도 붓지 않던 게 에이든인지라 그가 저렇게 부은 눈을 한 걸 보게 될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부어올라 평소보다 두툼해진 입술에 시선이 가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왜 웃어?”
“아냐. 아무것도.”
“나만 부은 거 아냐. 셀레나 너도 많이 부었어.”
“너만큼은 아닐걸?”
“뭐어?”
어깨를 으쓱거리며 에이든에게 차가운 물수건을 건넸다.
눈에 문질러서 부기를 빼란 의미였다.
에이든은 조용히 나를 노려보다가 물수건을 받아 눈가를 꾹 눌렀다. 그가 내게 털어놓았다.
“사실 어제 투표가 끝난 뒤 황태자를 만났어.”
“황태자를?”
“황태자와 탁 터놓고 대화한 건 처음이었던 것 같아. 전쟁 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재수 없는 자식, 아니, 재수 없는 녀석이지만 탁월한 사람인 걸 부정할 수는 없지.”
힐끗. 에이든이 나를 살폈다.
“전략적 제휴 관계가 되기로 했어. 널 두고 얽힌 감정이 있긴 하지만 남자 대 남자로 풀었어.”
에이든도 황태자도 서로간에 감정이 꽤 안 좋았던 것 같은데 하루 만에 풀었다는 게 놀라웠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그에게 캐물었다.
“어떻게? 구체적으로 어떤 대화가 오간 거야?”
“아무것도.”
“아무것도라니. 뭔가 있는 거잖아.”
에이든은 됐다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럴수록 더 궁금해져서 식탁 위로 그를 향해 몸이 기울었다.
“뭐야. 솔직하게 말해.”
“우리끼리 일이야.”
“매일 으르렁대다가 하루아침에 깔끔하게 정리했다니 굉장히 수상해. 솔직하게 말해.”
“…….”
“에이든.”
그를 쭉 노려보자 에이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쩔 수 없어. 남자들끼리 비밀로 하기로 한 거라.”
“…혹시 황태자에게 한 대 맞아 준 거야?”
시온이 기사단에서 일했던 터라 남자들끼리 주먹다짐을 하고 푸는 경우를 알음알음 들었었다.
혹시나 해서 넘겨짚었는데 그게 맞았던지 에이든이 어깨를 움찔거렸다.
“얼굴을 때려? 넌 그걸 맞아 줬고?”
“얼굴은 아니고… 쌍방이야. 미쳤다고 나만 맞아? 아무튼 오늘 구즈만 씨 부부가 돌아가는 날인 거 알지? 오후에 호텔에 가 봐야 하는데 좀 일찍 출발할까?”
“가 봐야지. 그때까진 우리 눈이 가라앉아야 할 텐데.”
구즈만 씨 부부와 엠마뉴엘이 북부로 돌아가는 게 아쉽지만 애초에 그들이 수도에 온 건 세바스찬 전대신관을 처벌하기 위해서였다.
재판이 끝난 뒤에도 여태 수도에 머문 건 구즈만 씨가 12인의 귀족 투표에 참여해야만 하기 때문이었다.
엠마뉴엘도, 구즈만 부부도 얼른 북부에 가서 가족끼리 시간을 보내고 싶을 터라 조금 더 있다 가라고 만류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에바, 아니 엠마뉴엘이 사라져서 많이 아쉽겠어.”
“아쉽긴 해도 가족을 찾은 만큼 행복한 일만 가득하길 바라야지.”
엠마뉴엘과 난 서로 처지를 잘 알아 알게 모르게 의지해 왔다.
‘가장 힘들 때 만나서 동지애도 있었지…….’
둘 다 말수가 많은 편은 아니라 수다를 떨거나 단둘이 나가 노는 일은 잘 없었지만, 그녀는 아멜리아와 달랐다.
아멜리아는 친구라고 믿었지만 친구가 아니었다.
하지만 엠마뉴엘과 나는 진심으로 서로의 행복을 빌어줄 수 있는 관계였다.
‘그래도 엠마뉴엘 앞에서 우는 일은 없겠지.’
이별은 아쉽지만 응원하는 만큼 기쁘게 배웅해 줘야겠다.
그렇게 마음먹었건만 엠마뉴엘이 마차에 올라탈 시간이 되자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녀와 헤어지는 게 내 생각보다 더 아쉬웠나 보다.
“셀레나 씨. 울지 마요.”
엠마뉴엘이 나를 안아 달랬다. 코를 훌쩍이며 진정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셀레나 씨에겐 감사한 게 많아요. 저를 사채업자에게서 구해 준 것부터 빚을 해결할 수 있도록 값비싼 스카프도 주셨잖아요. 거기다 부모님도 찾아주시고…….”
“엠마뉴엘. 북부에 가서 행복하게 지내요.”
“여름 휴가마다 북부에 놀러 와요. 셀레나 씨와 칼립소 공작님은 언제나 환영이에요.”
“자주 편지할게요.”
내가 엠마뉴엘과 인사하는 동안 구즈만 부부는 에이든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러다 엠마뉴엘과 떨어지자 구즈만 부인이 다가와서 와락, 나를 껴안았다.
“딸을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셀레나 양은 신께서 보낸 축복이 분명해요. 매일 기도할게요. 셀레나 양의 하루에 좋은 일만 가득하도록요.”
숨이 막히도록 꽉 껴안는 품에서 진심 어린 감사와 축복이 전해졌다.
구즈만 부인이 보이는 따뜻한 마음에 괜스레 벅차올라 가슴이 뜨거워졌다.
“건강하세요. 늘 행복하시고요.”
나는 멀어져가는 마차를 보며 진심으로 기도했다. 엠마뉴엘과 구즈만 부부의 앞날에 행복한 일만 깃들길.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엠마뉴엘과 더 많은 걸 해 볼걸 그랬어.”
함께 수다도 떨고 놀러 가 볼걸. 너무 담백한 관계였던 게 많이 아쉽다.
마차가 사라진 도로 끝을 바라보던 내게 에이든이 어깨를 감싸왔다.
“엠마뉴엘이 떠나고 나니까 다 끝났다는 게 실감이 돼.”
모든 게 끝이 나서 홀가분해야 할 텐데 가슴 한편이 헛헛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만 했다. 친구를 만드는 것도, 복수가 빠진 삶에 적응하는 것도.
마음이 안 좋아서 박탈감에 무력감마저 몰려오던 순간이었다.
“이제 시작이야.”
“응?”
에이든이 나를 감싸서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는 고개를 숙여 나를 유심히 살피다 말했다.
“이게 끝은 아니야. 셀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