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황태자가 우리를 체스판 위의 패로 이용했다는 걸 전해 들은 에이든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겼다.
불쾌감을 느낄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는 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황태자다운 행동이었어.”
그와 달리 나는 이번 일로 제법 당황했던 터라 에이든이 설명해 주었다.
“전쟁터에서도 그랬어. 승리를 위해서 작은 희생은 필수불가결하단 걸 아는 사람이야. 그 희생을 헛되이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냉정하게 모든 걸 조정하곤 했지.”
황태자는 이곳보다 전쟁터에서 본래의 모습을 더 잘 보여 준 모양이다. 에이든은 바로 곁에서 그 모습을 봐 왔고.
“제 개인 감정보다는 대의가 우선인 만큼 필요하다면 그게 누구든 이용할 준비가 됐겠지. 정말 지휘관에 걸맞은 사람이야. 제대로 싸웠다면 아무래도 내가 졌겠지…….”
담담하게 말하는 에이든은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얼굴에 비치는 열망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어제 황태자와 대화하며 내가 가진 감정이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에이든의 손을 붙잡았다.
나와 달리 굳은살 가득한 감촉이 그가 살아온 길을 말해주었다.
“난 황태자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함께하고 싶다고 했어. 사실 황태자는 개혁의 방향을 정해서 기틀을 다지는 정도밖에 안 될 거야. 다음 세대에나 그런 세상을 볼 수 있겠지만… 아주 의미 있는 일이잖아?”
에이든과 나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황태자를 돕고 싶었다.
물론 이건 섣부른 말이라 입 밖에 낼 수는 없었다.
키스밖에 안 한 사이에 결혼과 2세를 상상하는 건 정말 민망한 일이다.
하지만 내가 평생 누군가와 함께한다면 그건 에이든 밖에 없다.
새까만 눈이 느릿하게 깜빡였다. 그가 내 마음을 어디까지 눈치챘을지는 모르겠다.
다만 황태자를 따라 새로운 시대를 만드는 걸 주저하지 않아도 된다는 건 확실하게 이해한 듯하다. 그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빠른 시일 내에 독대 신청을 해 놔야겠어. 우리 사이에 어떤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지 궁금하거든.”
에이든이 황태자와 어떻게 협력해나갈지 기대되는 건 지금 그가 반짝이는 눈으로 미래를 바라보고 있어서다.
성배와 크루커스가 부서지고 모든 게 끝났다.
앞으로 우리가 맞이하게 될 날들이 너무 기대되었다.
물론 에이든도 나도 당분간은 아주 바쁠 예정이다.
에이든은 노예제 폐지 문제로 동분서주 중이었고, 나는 즉위 기념 행사에서 보여 준 모습으로 레이온 제약의 인기가 함께 치솟으며 덩달아 바빠졌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정신없이 내일을 맞다 보니 금세 투표날이 다가왔다.
에이든은 아침 일찍 의회에 가 봐야 했고 나는 그런 그를 보려고 새벽부터 칼립소 저택으로 넘어왔다.
“그간 노력한 만큼 좋은 결과가 나올 거야.”
지금껏 봐 온 날 중 오늘이 에이든이 가장 긴장한 날이다.
그는 초조함을 숨기지 못 해서 아침 식사도 거른 채 손을 쥐었다 펴길 반복했다.
“이번이 아니라도 다른 때에 기회가 올 거야.”
“다른 때가 30년이 될지, 50년이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셀레나, 난 이번에 법안이 꼭 통과되면 좋겠어. 노예제 같은 게 사라져서…….”
목소리가 작아지고 발음이 부정확해져서 뒷말을 알아듣진 못 했다.
나 또한 노예제가 폐지되길 간절히 바라지만 에이든에 비할 바는 못 된다.
시계를 확인한 에이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다녀올게.”
저택을 나가는 에이든은 바짝 긴장하다 못 해 비장하기까지 했다.
나는 마차를 탄 에이든이 멀어져가는 걸 멍하니 바라보다 하루를 시작했다.
아무래도 에이든처럼 나도 온종일 긴장 상태일 듯했다.
* * *
마누엘 사제가 방문한 건 노예제 폐지 문제로 12인의 귀족 투표가 이뤄지던 시간이었다.
알버트에게 몸이 아프냐는 말을 들을 정도로 집중치 못 했는데 마침 손님이 와서 조금 기뻤다.
“마누엘 사제님. 여기까지 어쩐 일이세요?”
즉위 기념 행사에서 성배를 그렇게 만든 뒤 마누엘 사제를 포함한 세 명의 사제들은 신전 문을 걸어 잠그고 기도에 들어갔다.
떠들썩한 세상에 휩쓸려서 괜한 마음이 들까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아직도 신전에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게 되어 무척이나 반가웠다.
그날 인사도 못 하고 헤어진 게 아쉬웠기 때문이다.
“오늘 귀족 투표가 있는 날이잖습니까. 많이 떨리실 것 같아 근처에 지나던 길에 들렀습니다.”
“그 일을 사제님께서도 신경 쓰고 계신 줄은 몰랐어요.”
“칼립소 공작님의 일이니까요. 그간 저를 많이 도와주셨지 않습니까?”
“에이든…이요?”
“예. 저희 보육원에 일이 생길 때마다 직접 나서서 도와주셨습니다. 지붕과 상하수도관에 문제가 생겼을 때도 직접 와서 수리하고 부족한 부분은 직접 사람을 써서 해결해 주셨죠.”
전혀 몰랐던 일이었다. 내가 처음 듣는 얼굴을 하자 마누엘 사제야말로 정말 몰랐냐는 뉘앙스로 물었다.
“지난번엔 윌을 포함해서 학교에 가는 아이들 모두에게 장학금을 전달하셨잖습니까? 매달 아이들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사서 보내주시는데…….”
“전혀 몰랐어요.”
“셀레나 씨의 이단심문회를 위해서 제게 힘을 실어야 한다며… 아니, 아닙니다. 이건 못 들은 걸로 해 주시길 바랍니다.”
“네? 자세히 말씀해 주세요. 이단심문회라뇨?”
마누엘 사제는 묻지 말아 달라며 눈을 질끈 감고 손바닥을 펴 보였다.
하지만 그냥 지나칠 부분이 아니었다.
“사제님. 저도 알아야 해요. 이단심문회는 제 일이기도 하잖아요.”
“제가 말실수를 했습니다. 칼립소 공작님과 조용히 묻어두기로 한 일입니다. 부디 모른 척해 주세요.”
“마누엘 사제님.”
“…하아.”
마누엘 사제는 괴로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아주 조심스레 털어놓았다.
“제발 공작님께는 아는 척 말아 주세요. 비밀로 하고 싶어 하셨거든요.”
“모른 척할게요. 그러니 어서요.”
“심문회 때 제가 승진해야만 입김이 세진다며 기부금을 비롯해서 신전 내 많은 문제를 해결해 주셨습니다. 이 이상은 말해드릴 수 없으니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마누엘 사제가 너무 간절하게 부탁해서 더 캐물을 수가 없었다.
그는 상황을 어물쩍 넘기기 위해 얼른 화젯거리를 바꿨다.
“실은 칼립소 공작님을 위해 퓌셀 후작님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퓌셀 후작을요?”
퓌셀 후작이라면 에이든이 설득해야만 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모티조 자작과 퓌셀 후작이 이번 투표의 결과를 책임지다시피 했는데, 모티조 자작은 말이 통하는 데 반해 퓌셀 후작은 자기주장이 강해서 설득이 쉽지 않다고 들었다.
“퓌셀 후작가는 대대로 아주 신실한 신자 집안이지요. 이번 즉위 기념 행사에서 신의 현존을 경험했다며 저를 초대해 주시더군요.”
“사람을 잘 만나는 분이 아닌데 초대를 해 주었다고요?”
“예.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신전이 자정해나가면 신자들은 믿음과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게 주된 이야기였죠. 그러자 퓌셀 후작이 그러더군요.”
마누엘 사제가 숨을 들이마시는 짧은 시간 동안 바짝 긴장이 되었다.
“오늘 있을 투표에 노예제 폐지에 찬성하여 핍박받는 이들을 돕겠노라고.”
“그게… 정말인가요?”
그는 우리밖에 없는 사장실인데도 주위를 살핀 뒤 목소리를 낮춰 고백했다.
“실은 제가 다음 대 대신관으로 추대될 예정입니다. 퓌셀 후작님이 저를 부른 것도 그 사실을 미리 알았기 때문이죠. 그러니 거짓말이 아닙니다. 퓌셀 후작님이 빈말을 하는 분도 아니고요.”
“퓌셀 후작이 폐지 찬성에 손을 들더라도 다른 귀족들이 마음을 바꾸면 또 모르는걸요.”
“이제 곧 결과가 발표될 거예요. 셀레나 씨. 조금만 마음을 내려놓고 기다려 보도록 해요.”
마누엘 사제는 태연하게 웃으며 차를 홀짝였다.
그가 거짓말을 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안심되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아직도 에이든이 노예라 그의 해방을 두고 논하는 것도 아닌데 어찌나 초조한지, 중요한 시험을 앞둬도 지금처럼 속이 시끄럽진 않을 거 같다.
그런 내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마누엘 사제가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크루커스가 부서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날 내린 비를 맞자 재가 되었다고요.”
“네. 드디어요.”
“마음이 어떠한가요? 홀가분한가요?”
“모르겠어요. 기쁘긴 한데… 크루커스가 아니었다면, 시에나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떤 인생을 살았을까 생각하게 되어서 마음이 복잡해요.”
“지금의 모습이 싫으신가요?”
“그럴 리가요. 전 지금 상황에 만족해요. 제게 닥친 불행이 없었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변화죠.”
답답하던 성격도 바뀌었고 기억을 되찾았다. 꿈에 그리던 사업체를 꾸렸고, 에이든을 얻었다.
에이든. 그와 함께하게 된 것만으로도 내 모든 불행은 버틸 만한 것들이 된다.
끔찍하기만 했던 순간들에 가치가 부여될 수 있다는 걸 에이든을 만나고야 알게 되었다.
“에스타리온 백작가 사람들을 용서할 수는 없어요.”
“셀레나 씨에게 용서를 강요하려는 게 아닙니다. 상처입은 사람에게 용서를 강요하는 건 옳지 않은 짓이니까요. 모든 일이 끝난 지금 마음이 힘들진 않을까 해서 여쭌 겁니다.”
“전 괜찮아요. 그리고 더 괜찮아질 거예요. 미움을 내려놓고 제 삶을 살아갈 거니까요. 용서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얽매이지 않겠단 뜻이었어요.”
“그 길에 칼립소 공작님이 함께하면 좋겠네요. 언제고 좋은 일이 있다면 꼭 저를 불러주세요. 온 마음을 다해 축복해드리고 싶으니까요.”
마누엘 사제가 말한 ‘좋은 일’은 그냥 들어도 결혼식을 뜻했다.
에이든과 결혼하는 걸 단 한 번도 상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 제삼자의 입에서 듣는 건 또 다른 일이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때, 밖에서 우당탕탕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센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장님! 투표 결과가 발표됐다고 해요!”
알버트는 의회에서 결과를 듣자마자 뛰어온 터라 벌게진 얼굴로 거친 숨을 토해냈다.
“어, 어떻게 됐어요?”
손이 떨리고 심장이 내려앉을 것 같아서 막 입을 열려는 알버트에게 잠시만 시간을 달라고 신호했다.
다 식은 차를 쭉 들이켠 뒤 후하후하 심호흡을 한 뒤 말했다.
“이, 이, 이제 말해줘도 돼요.”
“그게…….”
“아, 알버트. 난 괜찮아요. 어서요.”
“…사장님…….”
알버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눈이 질끈 감겼다.
“축하드립니다. 노예제 폐지가 확정되었어요!”
헙! 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 때문에 입을 턱 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