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24화 (125/134)

<124>

“점점 너희 사무실에 갈 용기가 사라지는 것 같아.”

“이해해. 지난번엔 알버트가 널 2시간 동안 붙잡아두고 떠들었잖아.”

창립멤버인 알버트는 집안이 병원을 하다 보니 가장 많은 기적을 목도한 직원이었다.

그는 잠시 들른 에이든을 붙잡고는 2시간 동안 흥분을 쏟아냈다.

그날 에이든은 반쯤 마른 육포가 되어 외근을 떠났다 돌아온 나를 맞았다.

“근데 정말 왜 너한텐 아무런 기적도 안 일어난 걸까? 내 흉터가 사라졌듯이 너도 사라졌을 거라 생각했는데.”

에이든의 얼굴엔 여전히 흉터가 자리한다.

그 점이 무척 아쉬운 나와 달리 에이든은 별다른 감상이 없는지 어깨를 으쓱거렸다.

“내가 그 흉터를 미워하지 않아서 그런가 보지.”

“대체 왜?”

“널 구했다는 증거잖아. 상처가 난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랑스럽지 않았던 날이 없어. 이 흉터가 생기지 않았다면 평생 널 구하지 못한 걸 후회했겠지.”

이러면 또 뭐라 할 수가 없다. 코끝이 찡해지고 가슴에 깊은 감동이 너울졌다. 에이든이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확실히 넌 기적이 일어난 것 같아.”

“흉터가 사라졌잖아.”

“아니, 그것 말고. 감정이 많이 풍부해졌어. 상처받은 적 없는 사람처럼.”

에이든의 말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네 얼굴을 보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걸? 많이 편안해 보여.”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그래? 네가 옆에 있어서 그런가 보네.”

“그런 말을 그렇게 던지는 것만 봐도 그래.”

에이든은 내가 상처받은 적 없는 사람처럼 편안해 보인다고 했지만 그건 그도 마찬가지였다.

노예로 핍박받고 고통받은 시절이 온전히 지워진 건 아니지만 그에겐 알게 모르게 변화가 일어났다.

제 과거에서 오는 열등감이나 분노, 슬픔 따위가 은근하게 녹아 없어지고 예전보다 더 단단한 자신감을 보였다.

고작 일주일이라 얼마나 어떻게 변화했는지 상세히 알 수는 없어도 연인인 나는 어렴풋이 인지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성배가 사라졌는데 아무도 그걸 문제 삼지 않아. 신기하지 않아?”

“성배가 사라졌지만 세상엔 아직도 기적이 들려오고 있잖아. 눈에 띄는 기적 이외에도 사실 다들 느끼고 있을 거야. 제 안에 무언가가 변화했다는 걸.”

“맞아. 모든 게 변했어. 이단심문소에 들어간 뒤 신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인정해. 신께선 존재한다고.”

신께서 존재하기에 성배가 존재했고, 성배가 존재하기에 성인성녀가 존재했다.

그리고 나는 진짜 성녀였다.

진짜인 줄 알았던 가짜가 아니라, 진짜 성녀.

모두가 그렇게 떠든다. 세상의 마지막 성녀가 성배를 통해 기적을 일으켰다고.

사제들의 역할이 컸기 때문에 마누엘 사제를 포함한 모두가 조명받고 있지만, 나는 황태자가 나를 성녀라 소개한 터라 주목도가 남달랐다.

그렇다 해서 성녀랍시고 들뜨거나 인생이 달라지진 않았다. 나는 행사가 끝나고 바로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리고 황태자는 그런 나를 붙잡지 않았다. 쓸모를 다 해서 필요가 없단 듯이.

“그래서 오늘 황태자가 뭐라고 할지 궁금해. 앞으로 그 사람이 어떤 행보를 보일지도 기대되고.”

“성배가 사라진 일이 귀족 투표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 같아.”

“다음 주지?”

“응. 열심히 설득한 만큼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할 텐데.”

사실 12인의 귀족 투표는 30주년 행사가 끝나고 일주일 뒤 열릴 예정이었지만 즉위 기념 행사 때 있었던 역사적 사건으로 일자가 밀려났다.

그로 인해 에이든은 지난 일주일간 몹시 바쁘게 움직였다.

그들을 만나 설득하고, 물밑에서 작업을 했다.

그런 와중에 나를 찾아온 건 한 시간 뒤 내가 황태자와 독대할 예정이라서다.

독대자리다 보니 에이든은 참석할 수 없었지만 내가 염려된다며 황궁까지 함께 가는 거였다.

우리는 황궁으로 가는 마차에서 갖은 이야기를 나눴다.

노예제 폐지에 관한 일부터 이번 주 데이트 일정까지.

마차가 멈추고 황태자 궁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턴 나 혼자 들어가야 했다.

“얘기 잘 나누고 와. 난 신전 수사 건으로 에스타리온 백작을 만나서 수사 공유를 하고 올게. 만약 황태자가 이상한 소리를 하면 주먹이라도 날리고.”

“걱정 말고 다녀와.”

웃으며 그에게 손을 흔든 뒤 응접실로 향했다.

달칵.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먼저 와서 기다리던 황태자가 보였다.

일주일 만에 보는 황태자는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차갑게 벼뤄진 눈빛이 많이 부드러워진데다 고요하게 침잠한 표정엔 생전 처음 편안함이 드리웠다.

“왔는가.”

물론 건조한 말투는 여전했다. 그도 나도 하녀가 가져온 차를 홀짝이며 서로를 확인했다.

“얼굴이 많이 좋아 보이는군.”

“전하께서도요.”

황태자는 꺼질 듯 흐릿한 미소로 대답을 대신했다.

즉위 기념 행사 이후 그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많이 생각했다. 그날 그가 내게 했던 말에 관해서.

‘잘하고 있다.’

성배를 부수려던 내게 그리 말했더랬다.

엄청난 양의 성수를 만들어 내어 제 권위를 드높여서 할 수도 있지만 황태자는 그런 이유로 칭찬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간 수고했다.”

“…역시 저를 이용하셨던 거군요.”

“그래. 모두 성배를 없애기 위해서였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요?”

“그대를 협박한 것부터 귀족들에게 성배를 이용해 충성심을 증명해 보이라 한 것까지 모두.”

동요를 감추기 힘들었다. 황태자가 차갑고 이성적인 사람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지략을 펼칠 줄은 예상하지 못 했다.

“성배를 찾은 건 신전을 완전히 끝내기 위함이었다. 물론 황권 강화도 그 목적이긴 했지. 그렇다 한들 성배를 오래 가지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란의 씨앗이 되기 때문이군요.”

“작게는 내분, 크게는 침략전쟁의 원인이 될 수도 있기에 존재를 알리고 공개적으로 없앨 계획을 짜야만 했지.”

“제가 성배의 존재를 증명해 내면 안 되는 거였어요. 안 그런가요?”

“아니. 어차피 한 번은 공개했어야 했다. 황실이 성배를 찾았단 사실은 알게 모르게 새어나갈 테고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모두 확실히 해야만 했지. 그래서 그대를 건드렸던 거다.”

“혼인으로 말이죠?”

“그래. 그리고 성배를 없앤 뒤 세가 강한 귀족들에게서 반발이 일어나지 않도록 일부러 성수를 대가로 그들을 줄 세우려고 했다. 분란을 예상하고 미리 경계할 수 있기 때문이지.”

“제가 성배를 없앨 방법을 안다는 것도 알고 계셨군요?”

“존 콕스에게 살짝 정보를 흘리라고 명령해 두었으니까.”

나와 에이든, 신전과 귀족들까지 모두 체스판 위에 올려놓고 마음대로 휘저은 게 굉장히 놀라웠다.

원체 영민한 사람이라 녹록찮다곤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이런 사람과 맞설 생각을 한 스스로가 어리석게 느껴질 정도였다.

허탈함에 힘이 쭉 빠진 내게 그가 차분한 말씨로 쐐기를 박았다.

“그대는 그대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주었다.”

“하… 사제들의 축복을 생략하려고 한 건 왜 그러신 건가요?”

“귀족들에게 내가 가려는 길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아버님께도 미리 언질을 드렸었지.”

황태자는 무대를 기획한 총괄이었고 나는 그 무대에서 노니는 배우였다.

그는 홀로 기획한 무대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황제에게서 황위를 물려받을 때 권력이 분해되어 황권이 약해지는 것을 경계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노예제도 폐지도… 의도하신 건가요?”

“내 대에 대두되어 끝날 일이라 생각했지만 이렇게 일찍 문제가 터질 거라곤 예상하지 못 했다. 그래서 칼립소 공작에게 허를 찔렸단 생각이 들더군.”

“허를요?”

“그 문제를 도마 위에 올린다면 내가 하게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하지만, 칼립소 공작이 주도하기에 역사적으로 아주 의미 있는 걸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전하께선… 노예제 폐지를 반대하시던 것 아니었나요?”

“바람 한 점 없는 바다에서 배를 움직이려면 선원들을 채찍질할 악당이 필요한 법이지. 제국이 세워진 지 500년이 넘었다. 세상이 변화하기에 발맞춰 변화해야만 하는데 이 나라를 이끌어가야 하는 귀족들은 타성에 젖은 지 오래지. 나는 그걸 전쟁 때 깨달았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은 채 황태자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내가 노예제 폐지를 찬성하는 순간 귀족들은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려 들 거란 걸 모르진 않을 테지.”

“그들은 황권을 가장 경계하니까요.”

“그래.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만 했고 그러기 위해 노예제를 없애야만 했다. 그것이야말로 구시대의 유물 그 자체니까.”

“…제게 모든 걸 솔직히 이야기하셨더라면 더 수월하게 끝냈을지도 몰라요.”

“그대에게 진실되지 못 한 건 역설적으로 그대를 좋아한 마음이 진짜였기 때문이다.”

찻잔을 든 손이 허공에서 멈췄다. 한때 동경했던 벽안 가득 내가 담겼다. 그가 담담하게 진심을 표현했다.

“그대를 좋아한 감정엔 한 치의 거짓도 섞이지 않았어. 내가 해야 하는 일과는 별개로 진심으로 분노했었지.”

많은 문장이 입 안을 맴돌았지만 고르고 고르다 보니 짧은 단어 하나도 내뱉을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남자의 진심을, 조금의 포장도 없는 날것 그대로의 마음을 알았다는 생각에 전율이 흘렀다.

“혼인을 강제한 데엔 대의를 위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것이 원하는 대로 풀리지 않아도 괜찮다 여겼다. 대의쯤 미뤄두고 그대를 가지고 싶은 마음은 진짜였으니까.”

“…….”

“하지만 나는 제국의 황태자다. 곧 다음 대 황제가 될 몸이지. 감정보다는 이성이 앞서야만 하고, 내 개인의 영예보다는 이 나라의 영광이 먼저지. 무엇보다…….”

“무엇, 보다?”

“셀레나. 그대를 진심으로 아끼기에 그대가 행복해지길 바란다. 그 행복에 내 욕심이 방해된다는 걸 깨달았기에 잘라낼 수 있었다.”

그날이었다. 에이든과 내가 처음으로 입을 맞췄던 날.

“칼립소 공작은 떠나고 없었지만 그를 그리는 그대는 내가 보지 못한 얼굴을 하고 있더군. 사랑에 빠진 여인들은 그런 얼굴을 한다는 걸 그날 처음 알았지.”

“…….”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으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건 욕심이란 걸 안다. 이미 한 가지를 가졌으니 다른 한 가지는 내려놓을 줄 알아야겠지.”

“…죄송하다, 감사하다곤 하지 않을게요.”

“그래. 그 말을 들으면 비참했을 테니 하지 마.”

단호하게 선을 그어 주어서 고마웠다. 서로에게 부담 없이 담백하게 상황을 넘길 수 있어서다.

그럼에도 황태자는 지금 우리가 나누는 화젯거리가 마음에 안 드는지 말을 돌렸다.

“참. 이 소식을 전하지 않았군. 크루커스가 부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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