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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23화 (124/134)

<123>

심장이 쿵 떨어지다 못 해 몸이 떨렸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다. 대체 언제부터? 어떻게…….

“저런. 긴장을 풀도록.”

황태자의 입가에 나른한 미소가 내걸렸다.

그가 내 손을 붙잡아 느릿하게 성배 앞으로 끌어당겼다.

우리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면 어쩌지?

평소라면 빠르게 계산기를 두드렸을 텐데 너무 놀라서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사이 나는 성배 바로 앞에 세워졌다.

근처에 있는 것만으로 성배에 흐르는 기운과 내 안의 기운이 은근하게 공명해 기이한 감각이 들었다.

이곳의 모두가 기대감을 갖고 나를 주목하는 중이었다.

내가 무슨 수를 짜내건 저들의 의견이 모여 여론이 되는 순간, 버둥거리는 것조차 불가능해질 테다.

“셀레나.”

황태자가 나를 압박했다. 그가 얼른 하라며 눈짓했다.

몸을 살짝 틀어 고개를 돌리자 하얗게 질린 에이든과 시선이 마주쳤다.

‘에이든…….’

에이든은 나를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저 남자 마음의 중심에 있단 건 확신한다.

세상 모두가 나를 버려도 에이든은 나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마지막 날까지 내 곁을 지키고 나만을 위할 테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떨림이 잦아들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이겨낼 수 있으리란 막연한 확신이 들었다.

용기를 내어 손을 들었다. 손을 성배 가까이 가져다 대는 것만으로도 오싹하리만치 마음이 가라앉고 홀린 듯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리고.

“헉!”

놀라 숨을 삼키는 소리가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성배가 내게 공명하며 에너지가 소용돌이쳤다.

쿠우웅. 쿵! 빈 호리병 안에서 굉음이 울려 퍼졌다.

좌중의 겁에 질린 감정이 공기를 통해 전해졌다.

안에서부터 물줄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호리병 가득 담긴 성수는 햇빛에 황금빛 물줄기를 반짝이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경악 어린 비명이,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이, 누군가의 놀란 숨소리가, 신을 부르짖는 혼잣말… 갖가지 반응 속에서 나는 마누엘 사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이 나서기 전, 황태자가 내 앞을 가로막더니 사제들에게 말했다.

“이 자리를, 기적을 일으키는 성배를 축복해 주길 바랍니다.”

그 말에 사제들은 기다렸단 듯 두 손을 뻗어 신성력을 뿜어냈다.

잘 훈련된 사제들의 신성력은 나와는 차원이 달랐다.

나와 공명하는 게 두 손을 모아 폭포수 속에 물을 쏟아붓는 정도라면 사제들의 공명은 물줄기와 물줄기가 만나는 수준이었다.

성배가 뿜어내는 성수의 양이 차원이 달라졌다.

이제까지 졸졸 흐르던 물줄기는 폭포수를 토해내듯 거세어졌다.

사방으로 튀는 성수에 옷이 흠뻑 젖었다.

황금빛 색이 더 진해져서 순도 높은 금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성수가 대관식 바닥에 퍼져나갔다.

사제들의 얼굴이 겁에 질렸다. 실제로 성배를 보자 이것을 없애는 게 두려워진 눈치였다. 하지만 마누엘 사제만은 달랐다.

성배의 힘이 강할수록 분란이 될 여지도 컸다.

아무리 의도가 선해도 사용자가 타락하면 소용없는 법이다.

“잘하고 있다.”

옆에 있던 황태자가 작게 속삭였다.

흠칫 놀라 그를 올려다보자 황태자가 담담한 표정을 한 채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황태자의 의도를 이해하기 힘들어서, 아니, 믿을 수가 없어서 그 얼굴을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하지만 그는 내 기색 따윈 신경 쓰지 않고 성배 표면을 확인했다.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에너지에 성배에 무리가 가는 게 전해졌다.

그 증거로 표면에 아주 미세한 금이 가 있었다.

“계속. 계속해라.”

“당신은 대체…….”

성배 내부에 소용돌이치는 기운이 호리병 이곳저곳에 부딪혀 달그락거리기 시작했다.

성수는 하늘에 닿을 듯 솟아올라 주변에 있던 귀족들까지 물에 빠진 생쥐 꼴로 만들었다.

그러다 성배 안 아주 작은 틈 사이에서부터 달그락거리며 작은 문제가 터졌다.

미세한 금에 압력이 가해지며 성수보다 더 환한 빛이 금 사이로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엄청난 양의 성수가 괴이한 소리를 내며 용솟음쳤다.

대관식장 천장에 부딪친 성수가 식장 내부에 비처럼 쏟아졌다. 그와 함께 성배가 강력한 빛을 뿜어냈다.

고개를 옆으로 틀고 눈을 가늘게 뜬 채 성배를 확인했다.

손에서 이상한 느낌이 들어서다. 분명 성배는 딱딱한 고체인데 꼭 얼음이 녹듯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기이한 광경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러다 펑! 하는 폭발음에 깜짝 놀라 두 손으로 귀를 콱 막았다.

“하아. 하아.”

사위가 고요했다. 톡. 톡. 천장까지 솟구친 성수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이곳에 있는 유일한 소리였다.

성수를 뒤집어쓴 채 굳은 턱을 돌렸다. 눈을 뜨자 황금빛 물 범벅이 된 상황이 보였다.

죄를 지은 듯 가슴이 떨렸다. 내가 의도했지만 생각 이상으로 놀라서 두려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온전히 겁에 질리기도 전, 바닥에 흩뿌려진 성수에서 은은한 빛이 나기 시작했다.

성수가 저들끼리 공명했다. 바닥에 흩뿌려진 물에서 성배에서 나던 기운이 느껴졌다.

그것들은 소리 없이 공명하더니 비눗방울이 되어 허공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비현실적인 일련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수천수만 개의 비눗방울이 두둥실 두둥실 떠올라 하늘로 올라갔다.

벽에 부딪혀도 톡하고 터지지 않았다. 신의 부름이라도 받은 것처럼 대관식 기둥을 스쳐 위로, 저 위로 향했다.

‘…아름다워…….’

비눗방울은 성수와 달리 황금빛으로만 이뤄지지 않았다.

무지갯빛으로 영롱하게 반짝이며 하늘에서 쏟아지는 태양빛을 굴절시켰다.

이에 지상은 햇빛에 반짝이는 물 표면처럼 아름답게 반짝였다.

나도, 황태자도 사제들도. 그리고 이곳에 자리한 모두가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비눗방울이 하늘을 메웠다. 이쪽 하늘뿐만이 아니라 우리가 볼 수 있는 하늘 끝까지, 그리고 그 너머 하늘 저편까지.

하늘도 지상도 끝없이 빛났다. 이것이야말로 신의 축복이 아닐까 할 정도로.

‘신께서 현시한다면 이런 모습이겠지.’

세상이 이처럼 빛나는 날이 또 올까. 하늘이 저토록 아름다울 수 있었던가.

뜨겁고도 평화로운 감정이 온몸 가득 차올랐다.

내 몸과 정신을 가득히 잠식해 신의 일부가 되어 가장 완벽한 평화를 찾은 것만 같았다.

정신을 차린 건, 조그만 빗방울 소리가 들리면서부터다.

톡. 툭. 토톡. 토도독. 투툭.

빗방울이 흘렀다. 아니, 그것은 빛방울이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황금빛 빗줄기가 세상에 쏟아졌다. 우리 살갗과 흙바닥, 나뭇잎, 지붕… 지상에 자리한 모든 것이 빗줄기에 젖어갔다.

그 신성하기까지 한 황홀함 속에 30주년 기념 행사가 끝났다. 누구도 잊을 수 없는, 신의 강림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 * *

“그날, 그 비는 정말… 환상적이었어요. 살아서 그런 광경을 보다니…….”

행사가 일어난 지 일주일이 되었지만 직원들은 여전히 30주년 기념 행사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직원들이 이상한 게 아니었다. 그날 일로 세상이 떠들썩했다.

제국 전역에 내린 황금빛 비는 국경 너머 다른 나라에도 내렸다고 한다.

신문은 벌써 몇 주 째 그날 일을 떠들었다.

성배의 기원과 마지막, 황금빛 비가 가져온 기적, 신전이 해석한 신의 뜻, 황실의 의도까지.

황금빛 비로 인해 전쟁이 멈추고 질병이 사라지며 새로운 세상이 오진 않았다.

그 비를 보고 맞은 모두가 믿기 힘든 고취 현상을 겪긴 했지만 기적은 다른 문제였다.

그렇다 한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건 아니다.

불치병을 앓으며 죽어가던 환자가 건강하게 일어나거나, 앞 못 보던 맹인이 눈을 뜨고, 흑마법으로 몸이 썩어가던 이가 정화되는 사례가 전국 각지에서 보고되었다.

타락한 사제들은 회개하였고 악마 숭배자들은 그들의 신앙을 변절하여 빛 아래로 나왔다.

감옥 속에서 빗줄기를 본 대신관과 세바스찬은 울며 자신의 죄를 뉘우쳤다고 한다.

“평생 다시 걸을 일 없다고 생각한 제 동생이 일어나 두 발로 걸을 땐… 맙소사. 전 신의 존재를 느꼈어요.”

회계부 담당 그레이스가 결국 눈물을 쏟아냈다. 나는 흐릿하게 웃으며 마저 차를 마셨다.

“사장님. 정말 감사드려요. 성녀님을 사장님으로 둘 줄은 몰랐는데… 신께도 사장님께도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런 말 말아요. 그날 성배가 진짜 공명한 건 사제분들이에요.”

“그래도요. 사장님께도 기적이 일어났으면 좋았을 텐데.”

모두가 내게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믿었다.

나는 그레이스의 동생처럼 신체적인 문제가 있는 건 아니라 눈에 띄는 기적이 일어나진 않았다.

조현병과 우울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된 것처럼 짠하고 상처받은 마음이 건강해진 것도 아니다.

이단심문소에서 얼어붙은 쇠사슬로 인해 동상에 걸려 난 흉터가 사라진 게 내게 일어난 유일한 기적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굉장히 만족했다.

흉터를 볼 때마다 과거가 떠올라서 마음이 안 좋았는데 손목과 발목이 말끔해지니 더는 일상 속에서 과거가 떠오르지 않았다.

똑똑.

점심 식사 후 수다 시간에 불쑥 나타난 손님은 바로 에이든이었다.

“셀레나.”

문이 열리더니 에이든이 밝은 얼굴로 나타났다.

직원들에게 특유의 무뚝뚝한 얼굴로 인사한 그가 내게 다가왔다.

“어머, 칼립소 공작님. 어서 오세요! 오늘 사장님이랑 황궁에 가신다고 하셨죠?”

“앗, 네. 그런데 그걸 어떻게…….”

“우린 사장님 공식 스케줄은 다 알아요. 기적을 일으킨 성녀님이잖아요!”

“공작님은 일어난 기적 없으세요? 저희 동네엔 맹인이 눈을 떴는데, 성녀님의 남자친구인 만큼 공작님께도 기적이 일어났을 것 같거든요!”

흥분한 직원들의 기세에 당황한 에이든이 데구루루 눈을 굴렸다.

의회에서 귀족들과 부대낄 땐 사나운 호랑이 같았는데 이렇게 사적인 곳에서 보면 그는 참 숫기 없는 남자였다.

에이든을 빙 둘러싼 직원들에게서 그를 구해주기 위해 가방을 챙겨 얼른 인사했다.

“먼저 가 볼게요. 다들 시간 되면 바로 퇴근해요. 알았죠?”

“내일 봬요!”

사무실을 나오자 에이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예제 폐지로 동분서주하는 칼립소 공작이 이런 모습을 할 줄 누가 알까.

고작 오 분 만에 질린 얼굴을 한 게 재밌어 웃음이 빵 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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