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
늘 알게 모르게 셀레나를 주시하고 있었던 터라 에스타리온 백작가가 그녀의 근황을 알게 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당연하게도 백작가는 발칵 뒤집혀서 난리가 났다. 흥분한 루카스가 제 형에게 분노를 토해냈다.
“저러다 황태자가 셀레나를 영원히 가둬 놓고 착취하면 어쩐답니까. 공공연하게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연을 끊었다고 밝혔으니 우리 눈치도 보지 않고 아이를 성녀로 만들어 버릴 겁니다.”
“셀레나에게도 무슨 생각이 있을 거다. 우선은 기다려 보자꾸나. 문제가 생기면 그때 우리가 나서면 될 것 아니냐.”
“그 아이에게 무슨 힘이 있다고요! 레이온 제약이 대중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 해도 아직 황실을 혼자 감당할 정도는 아닙니다.”
“루카스. 나는 셀레나를 믿어 주고 싶다.”
알바로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는 매일 매 순간 셀레나를 믿어 주지 않았던 걸 후회했다.
평생 키운 딸을 믿어 주지 못해 딸을 저버렸다. 돌이킬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인정하기도 전에 받아들여야만 했다.
눈 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제 손으로 잘라냈다는 사실이 얼마나 괴로운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가슴이 사무치다 못 해 숨이 턱하니 막혀서, 어떤 날은 아침에 눈을 뜨는 게 사형대에 오르는 것 같았다. 오늘을 버텨도 내일이 올 테다. 오늘보다 더 후회하는 내일이…….
“필요하다면 칼립소 공작을 통하는 게 맞겠지.”
“형님…….”
“루카스. 자중해라.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알바로의 결정에 루카스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시에나 때문에…….”
“네 탓이 아니다.”
“하지만-.”
“루카스. 그 아이가 그렇게 큰 건 첫째로 그 어미의 탓이다. 둘째로는 그런 사람이 되길 택한 본인의 잘못이고.”
“…….”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 너는 아비로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더냐.”
“맞습니다… 줄리아의 도박 빚을 갚아 준 것도 수 번이고 당시엔 아이 양육권을 가져오려고 법적인 준비를 하고 있었죠. 맹세코 시에나가 그런 아이로 클 줄 몰랐습니다.”
스스로에게 소름 돋을 만큼 한순간 애정이 거두어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애정을 가졌던 만큼 실망도 컸다. 루카스는 시에나가 보고 싶지 않았다.
근황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셀레나가 시에나에게 복수하여도 외면하였다.
그 속을 어렴풋이 짐작한 알바로는 루카스의 등을 쓸며 그를 위로해 주었다.
그때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에스타리온 백작이 된 시온이 모습을 드러냈다.
궁에서 급하게 돌아왔던지 얼굴이 벌겋게 익어 있었다.
“아버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칼립소 공작이 보수 귀족들을 만나고 다니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보수 귀족들을? 노예제 폐지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냐?”
“신전을 무너트리는데 공헌한 게 셀레나인데 칼립소 공작은 황태자가 사제들의 축복을 거부한 것을 두고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렇잖아도 황태자가 사제들을 세우지 않는다 해서 논란이 되겠거니 했는데… 셀레나가 궁에 갇힌 이때에 칼립소 공작이 그렇게 나온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거겠지.”
“형님 말씀이 맞는 것 같다. 시온, 조용히 칼립소 공작을 도울 방법을 찾아야겠구나.”
칼립소 공작과 나쁘지 않은 관계였지만 그렇다 해서 아주 좋지도 않았다.
마주치면 약간 서먹한 가운데 인사를 나누는 게 시온과 에이든의 사이였다.
그러다 보니 시온은 셀레나의 상황을 공유받지 못 했다.
애초에 셀레나의 측근은 칼립소 공작 정도밖에 없었고, 일전에 고고학자 존에게 접근해 부탁하는 것도 굉장히 힘들게 이뤄낸 일이었다.
‘조용히 보수 귀족들과 접선해야겠군.’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대표적인 반신전파였다. 그러니 물 위에서 사제의 축복을 받도록 유도할 수 없는 노릇이다.
“조용히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시온은 머릿속으로 보수 귀족 가문의 리스트를 뽑으며 방을 빠져나왔다.
먼발치에서 동생의 의중을 파악해 그림자처럼 도와야 한다니… 혈육을 아끼는 것조차 마음처럼 할 수 없는 것. 이건 시온, 그가 스스로 만든 지옥이자 셀레나가 선사한 벌이었다.
* * *
시간을 확인하지 않아도 아침 출근 시간에 맞춰서 눈을 뜬 걸 알 수 있었다.
레이온 제약을 만든 지 일 년도 안 되었는데 매번 이런다.
‘드디어 오늘…….’
몇 시간 뒤 황제의 즉위 30주년 기념행사가 열린다.
건강이 몹시 좋지 않아 올해가 마지막 즉위 행사가 될 거라 여러모로 의미가 깊었다.
거기다 성배가 공개되는 만큼 내 인생을 건 승부가 이뤄지는 날이기도 하다.
“후우. 할 수 있어.”
어젯밤 하녀를 통해 에이든이 보낸 쪽지를 받았다. 모든 게 완벽하다는 짤막한 문장에 켜켜이 쌓여가던 불안이 눈 녹듯 녹아 없어졌다.
“그러니 이제 나만 잘하면 돼.”
얼른 씻고 행사 준비를 시작했다. 전날 받았던 드레스와 구두를 착용할 즈음 하녀가 먹을 것을 가지고 나타났다.
긴장감에 먹는 둥 마는 둥 대충 요기를 때운 뒤 행사가 이뤄지는 대관식장으로 향했다. 23주년 행사 때부터 매년 참석해 왔던 터라 길을 헤매는 일은 없었다.
‘대관식장부터 보고 싶은데…….’
사제들은 황태자보다 먼저 대관식장에 도착해 자리를 지키곤 한다.
마누엘 사제를 비롯해 미리 상황을 협의해 둔 이들이 왔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큰 행사엔 절차란 게 있는 터라 함부로 대관식장에 갈 수 없었다.
안쪽 대기실 문이 열리자 화려한 정복을 입은 황태자가 보였다. 그는 시종에게 행사 진행 사항을 전달받고 있었다.
“아…….”
시선이 마주치자 황태자가 시종을 물리고 내게 다가왔다.
반짝이는 은발을 이마 위로 넘긴 그는 근사하단 단어가 꼭 들어맞을 정도로 멋졌다.
“기분은 좀 어떤가? 난 성녀를 맞을 생각에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지.”
“제가 전하의 성녀로 사는 일은 없을 거예요.”
“글쎄. 그건 두고 보면 알겠지.”
황태자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자 표정관리가 되지 않았다.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치맛자락 사이에 감춰진 손에 힘이 들어갔다. 황태자는 여유롭게 나를 훑고는 뒤에 있던 시종에게 명령했다.
“시간이 되었다. 가서 아버님을 모셔 와라.”
그런 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관식장을 향해 문을 열고 나아갔다.
와아아. 군중들의 함성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무거운 압박감으로 다가와서 눈을 꼭 감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오늘 성배를 없애지 못 하면 성수를 만들어 내는 모습을 보였다는 이유로 평생 성녀로 살 수도 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야 해.’
문가로 가서 대관식장을 살피자 사제들이 보였다. 그중엔 마누엘 사제도 있었다. 그제야 한결 긴장이 풀렸다.
잠시 뒤 행사가 시작되었다. 음악이 울린 뒤 가장 먼저 붉은 융단을 밟은 건 황태자였다.
그는 융단 끝에서 오른쪽으로 빠져 황제를 맞을 준비를 했다.
곧 벨벳 망토에 황금빛 장식이 된 망토를 입은 황제가 나타났다.
황제가 장엄하게 장식된 황좌에 앉자 기사들의 열병식과 성가대의 축하공연이 열렸다.
대관식장의 주요 상석엔 귀족들이, 양옆과 뒤엔 끝도 없이 펼쳐진 구경꾼들이 자리해 있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이렇게까지 많은 이들이 몰리진 않았는데 올해는 30주년 행사인데다 성배가 보인단 말에 예년보다 몇 배는 더 많은 인파가 몰렸다.
“올해는 짐에게 아주 특별한 한 해가 되었다. 이 나라의 태양이 된 지 30년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랑스러운 내 아들 필립소가 전설처럼 알려진 성배를 찾았기 때문이지.”
“와아아아!”
황제의 눈짓에 황태자가 나섰다. 그는 대양처럼 펼쳐진 군중들을 둘러보곤 입을 열었다.
“우리는 사제들이 타락하고 신전이 부패하며, 신성이 저무는 이 시대에 성배가 나타난 게 어떤 뜻일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담담한 말투엔 성배를 찾았다는 자랑스러움보단 조심스러운 태도가 엿보였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성배가 살릴 사람이 많을지, 성배로 인해 죽어갈 사람이 많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신께서 우릴 시험하기 위해 성배를 내린 건지도 모르죠. 성배를 갖기 위해 분열과 다툼이 일어나 악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병마에 고통받는 이들을 돕고 사랑을 실천해야겠죠.”
황태자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하는 걸까.
12인의 귀족들에게 충성에 따라 성수를 나누겠노라 했으면서 전혀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
물론 군중에게 하는 말과 뒤에서 은밀히 나누는 대화는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저 소리는 꼭…….
“황실은 오늘 이 자리를 빌어 성배를 축복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제국의 백성들을 위해 은총을 구하는 자리로 만들어 폐하의 즉위 30주년을 기념할 것입니다.”
“허업!”
“와아아!”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흥분한 군중들 중 일부는 소리를 내질렀다.
멀리서 시종들이 성배를 꺼내왔다. 사내 둘이서 끙끙거리며 옮겨야 할 만큼 크고 무거운 호리병이었다.
다시 보아도 기이한 기운이 흘렀다. 나만이 그렇게 느낀 건 아닌지 가까운 귀족석에서 두려운 기색을 내비치는 이들이 보였다.
“성녀, 셀레나 레이온을 모셔 와라.”
황태자의 명령이 떨어졌다. 내가 나갈 시간이었다. 양옆에 선 기사들이 나를 에스코트했다.
또각. 또각. 내가 내는 구둣발 소리가 너무 선명하게 들렸다.
내가 나타나는 순간 사방이 숨소리 하나 없이 조용해졌다.
나를 보는 수천 쌍의 눈에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귀족석에 긴장한 얼굴을 한 에이든이 보였다.
입 안이 바짝 말랐다. 물이라도 한잔 마실걸.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사제석에 있던 마누엘 사제와 시선을 교환했다.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성배를 만져 공명하는 순간 사제들도 멀리서 신성력을 뿌려 함께 공명하기로 했다.
황태자가 내게 다가왔다. 그의 파란 눈은 평소처럼 뜻을 읽을 수 없도록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셀레나. 당신이 성배와 공명하는 때에, 다른 사제들 또한 성배와 이 자리를 축복할 것입니다.”
황태자가 살짝 고개를 낮춰 내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그때 말했던 대로 하면 될 거다.”
“그게 무슨…….”
“하던 대로, 내게 반하는 선택을 하면 된다.”
차가운 음성이 귓속에 내리꽂히는 순간 깨달았다. 황태자는 내 계획을 알고 있었단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