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에이든은 평소 무척이나 쑥스러움을 타던 것과 달리 저돌적으로 내 입술을 머금었다.
내 아랫입술이 사탕이라도 되는 양 물고 빠는 감각이 낯설었다.
남자와 입을 맞춘 건 태어나 처음이었다. 그건 에이든도 마찬가지일 텐데 어설픈 나와 달리 그는 몹시도 자연스러웠다.
에이든은 본능적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한 손으로는 내 볼을, 다른 손으로는 팔을 붙들어 나를 단단히 고정시켰다.
어찌할 바를 몰라 꼭 감은 눈에 힘을 주자 그에게서 나직한 웃음소리 같은 게 느껴졌다.
퍽 여유로운 태도에 얼굴이 화끈해졌다. 나만 부끄러운 걸까.
술기운에 머리가 몽롱했다. 속에서부터 열이 올라서 그런지 내뱉는 숨이 뜨거운 것 같았다.
그건 에이든에게 기대느라 가슴팍에 올려진 손도 마찬가지였다.
손바닥도 손가락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손을 통해 전해지는 탄탄한 근육과 거센 박동 때문이다.
손가락을 까딱하는 순간 우리 사이의 묘한 긴장이 걷잡을 수 없어질 것 같아서다.
‘뜨거워…….’
손 아래 에이든의 체온이 뜨거웠다. 그가 내뱉는 나직한 숨과 내 폐부를 오가는 공기까지 모든 게 더웠다.
“아.”
에이든이 이를 세워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자 깜짝 놀라서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입술이 벌어진 순간 에이든의 혀가 파고들었다.
낯선 감촉에 몸이 움찔거렸다. 내 안으로 침범한 혀가 이빨을 쓸고 입천장을 훑었다.
민망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간질간질하고 찌릿찌릿한 감각에 나도 모르게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손끝이 에이든의 피부를 꾹 눌렀다. 옷이 내 손 안에서 구겨졌다.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가슴이 더 선명하게 전해진다.
내 손이 에이든을 자극시켰는지 입맞춤이 더 깊어졌다.
뱃속에 소용돌이가 쳤다. 자극인지 감각인지, 그도 아니면 감정인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눅진하게 쌓여갔다.
더불어 내 팔을 붙든 에이든의 손에도 힘이 들어갔다.
“하아.”
달뜬 숨이 흘러나왔지만 에이든이 삼켜내어 조용히 묻혔다.
내 안을 휘젓는 에이든은 혀뿌리까지 삼킬 듯한 기세였다.
그럼에도 그가 굉장히 참고 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가 내 입술을 부드러이 빨다 제 혀로 내 혀를 감던 순간, 팔을 붙들던 손이 옆구리를 스쳤다.
“읏.”
내가 내뱉어 놓고도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 뜨였다. 그러자 에이든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제껏 눈을 감고 있어서 제대로 보지 못 했던 새까만 눈엔 정염이 가득했다.
이대로 입맞춤을 이어나가면 멈출 수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에게 비치는 내 눈은 어떠할지 궁금해졌다. 모든 걸 뒤덮을 듯 검은 눈인데도 폭발할 듯한 열기가 엿보이는데, 노란 내 눈은 지금 어떤 빛깔을 하고 있을까.
그때, 에이든이 내게서 입술을 뗐다.
손가락 한 마디도 되지 않는 거리 속에 타액이 그와 내 입술을 연결했다.
숨결이 서로에게 전해졌다. 쿵쾅쿵쾅, 정신없는 내 박동처럼 에이든의 가슴도 사납게 날뛰었다.
서로를 향해 타오르는 열기는 잠재워지지 않은 상태였다.
초여름밤보다 더운 체온에 어찌할 바를 모르는 때에 에이든이 굳은살 가득한 엄지로 내 입술을 문질렀다.
그가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쑥스러움을 탈 때면 보이는 미소는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의 에이든은 사냥의 즐거움을 위해 사냥감을 일부러 놔준 사냥꾼처럼 자신만만했다.
‘눈을 똑바로 못 보겠어.’
쑥스럽고 민망한 건 내 쪽이었다. 얼굴이 벌겋게 익어가는 걸 숨기려고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깜빡했던 건 우리 사이의 거리가 얼마 되지 않았단 거다.
에이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모양새가 되었다. 그가 소리 없이 웃으며 내 등을 쓸어주었다. 투박한 손길이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귀 뒤로 꽂아주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뭘 해야 할지 몰라 숨을 골랐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에이든이었다.
“널 두고 돌아가고 싶지 않아.”
에이든이 나를 결박하듯 감쌌다. 내 정수리에 그가 가볍게 입을 맞췄다.
제 감정을 온전히 드러내지 않던 에이든인데 약간의 선을 넘나든 것만으로 주체할 수 없는 눈치였다.
그래서인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절절한 애정이 온몸에 전해졌다.
“하지만 가야겠지.”
“부탁해. 날 도울 사람은 너밖에 없어.”
“하아…….”
에이든이 내뱉은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나 또한 에이든과 떨어지기 싫었다.
머리를 몽롱하게 만들던 술기운은 사라졌지만 술기운이 불러온 뜨거운 감정은 여전하다.
“내가 어떻게 네 말을 거역하겠어.”
눈을 질끈 감은 에이든이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괴로운 얼굴로 머리를 벅벅 헤집었다.
“이 문제는 나 혼자 건의한다고 해결할 수 없단 거 알 거야. 신앙심 투철한 귀족들을 자극해서 사제들을 참여시킬 테니 너무 염려 마.”
“응. 네가 잘 해낼 거라 믿어.”
에이든은 창밖을 확인하며 자신이 어떤 루트로 내려가야 할지 확인했다.
어느새 어둠에 노을마저 밀려나 하늘 끄트머리에 붉은 흔적만 남았다.
“위험한데 문을 열어서 살짝 나갈 수는 없을까?”
“복도 끝마다 기사를 배치해 놔서 눈을 피할 수가 없어. 이쪽이 더 편하기도 하고.”
“조심해서 가. 다치지 말고.”
내 인사에 에이든이 손끝으로 내 볼을 쓰다듬었다.
힘을 주고 싶은 걸 꾹 참느라 손끝이 덜덜 떨리는 게 전해졌다.
그가 기다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귀 뒤로 꽂아주었다.
“조만간 다시 볼 테니 인사는 안 할래.”
이마에 부드러운 입술 감촉이 느껴졌다.
짧게 입을 맞춘 에이든은 내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창문 너머로 사라졌다.
순식간의 일이라 놀라서 창밖을 확인했지만 에이든은 보이지 않았다.
방금 전까지 에이든이 있던 자리가 썰렁하게 느껴졌다.
끼이익.
문 경첩 소리에 헙하고 숨을 삼켰다.
휙, 몸을 돌리자 열린 문 사이로 황태자가 가라앉은 얼굴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무 기척도 못 느꼈는데 대체 언제 들어온 걸까. 그보다.
‘에이든을 봤을까?’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황태자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게 고정된 시선엔 서슬 퍼런 상처가 엿보였다.
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황태자가 낯설었다.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 건 황태자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저벅, 저벅. 황태자가 어딘가 휘청이는 걸음걸이로 다가왔다.
가까이서 보니 그는 툭 건드리면 터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재밌군.”
“…….”
“아주 재밌어. 황궁 깊숙이 숨겨놔도 이럴 수 있단 게 말이야.”
에이든을 좋아하는 것도, 그와 함께한 것, 입을 맞춘 것까지 내가 잘못한 건 없다.
그럼에도 마음이 안 좋은 건 황태자가 벌게진 눈을 해서 그럴 테다.
내 감정이 누군가를 상처 줄 수 있다는 아이러니가 불편했다.
그가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흠칫해서 얼굴을 돌렸다. 그러자 허공에서 손이 멈췄다.
“…입술이…….”
마디가 굵은 에이든과 달리 매끈한 손이 느릿하게 내 뺨에 닿았다.
엄지손가락이 부은 입술에 닿았다.
조심스러운 손길처럼 나 또한 이 상황이 조심스러웠다.
자칫 잘못하면 황태자의 인내심을 자극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다.
한때 열렬히 원했던 벽안의 시선이 내 입술에 못 박혔다.
여린 피부에 손끝이 닿자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황태자의 눈가가 은근히 떨리고 다물린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곤 손이 거두어졌다.
“내가 악역이 된 것 같군. 그저 애정을 갈구했을 뿐인데.”
“어떤 역할을 맡을지는 전하께서 정하실 수 있어요.”
“그대의 마음을 사는 주인공은 될 수 없나 보군.”
“…….”
허탈한 숨을 내쉰 황태자가 뒤에 있던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는 인상을 쓴 채 눈가를 꾹꾹 눌렀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황태자는 어떤 말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앉아 홀로 감정을 다스렸다. 그러다 한참 시간이 지나자 툭하고 내뱉었다.
“내가 처음부터 솔직했더라면… 그랬다면 칼립소 공작이 아닌 나를 선택했을까?”
푸른 눈이 나를 주시했다. 늘 차갑게 벼뤄진 저 눈이 저토록 연약해 보이긴 처음이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그가 다시금 물었다.
“질문을 바꾸지. 그대가 납치당하지 않았다면 나를 사랑했을까?”
“…어쩌면요. 하지만 결국엔 칼립소 공작을… 에이든이란 남자를 사랑했을 것 같아요.”
“결국 그를 사랑했을 거다… 그대와 전혀 다른 사람인데도?”
“다른 사람이니까요. 저와 다른 사람이라 좋아요.”
가끔 껄렁거리고, 때론 거칠어도 에이든은 용기 있는 사람이었다.
과거에 목숨을 걸고 나를 구한 것뿐만 아니라, 수도 귀족 사회에 제대로 안착하지도 못한 채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척을 질 각오까지 하고 나를 거뒀다.
무엇보다 그는 나를 위해 제 모든 걸 걸 수도 있다.
나약해서 기억까지 지웠던 나로선 보이기 힘든 모습이다.
에이든이 나와 다른 사람이라 나는 그런 그를 보며 배운다. 언제, 어떻게 용기를 내야 하는지 말이다.
“다른 사람이라……”
황태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는 무어라 대꾸하려고 입을 열었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래. 인정하지.”
“무엇…을요?”
“더는 그대의 마음을 바라지 않겠다.”
그 말이 꼭 나를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단 뜻 같아 불안감이 치솟았다.
내 기색을 살핀 황태자가 묘한 얼굴을 했다. 만족한 것도, 화가 난 것도 아닌… 느껴 본 적이 없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를 그런 표정이었다.
“제게서 뭘 바라시나요? 성녀가 되는 것? 아니면-.”
“지금처럼 해.”
“예?”
“지금처럼 지내도록.”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이번엔 내가 황태자를 살피게 되었다.
뜻 모를 말을 내뱉는 황태자의 고약한 습관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속뜻을 바로 파악하기 힘들었다.
“계속 그렇게 칼립소 공작을 사랑하고, 내게 반(反)하는 행동을 하는 게 좋을 거다.”
그가 목구멍 뒤로 삼킨 말이 뭘까. 꾹 다물린 입이 두려워서 아까보다 더 긴장되었다.
그래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입을 열었다. 하지만 황태자가 더 빨랐다.
“이곳은 황궁이다. 칼립소 공작이 다시 한번 오늘과 같은 짓을 한다면 그땐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야.”
“…주의하겠습니다.”
“그럼 셀레나.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보도록 하지.”
흐릿하게 내걸리는 미소, 차갑게 식었지만 미처 꺼지지 못 한 불씨가 내보이는 눈. 그리고 아까보다 서늘해진 여름밤 공기.
이 모든 게 복선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 못 이루는 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