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20화 (121/134)

<120>

“그렇다 해서 노예들을 해방시킬 수는 없습니다. 노예들을 잘 감시하면 될 일이지, 사회 경제적인 파급을 감안할 정도로 중요하진 않아요.”

“맞습니다. 카르투시아의 제안을 받아들인 놈들을 참수시켜서 본보기를 보여야 합니다. 또 압니까? 노예들을 제대로 교육시켜 놓으면 칼립소 공작 같은 놈이 또 나올지!”

서류를 쥔 에이든의 손에 힘이 꽉 들어갔다. 그는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지금은 감정적으로 굴 때가 아니었다.

“인구의 20퍼센트가 노예입니다. 그들을 모두 통제할 수 있다고요? 이 이상 억압했다가 그들이 무슨 마음을 품을지 안답니까.”

“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게 그리 중요합니까? 채찍으로 다스려서 공포감을 심어 주면 해결될 일 아닙니까?”

“공포요? 주인들의 채찍에 공포에 질린 노예들이 마침 기습한 카르투시아에게 성문을 열어 줬던 건 잊었습니까? 제 주인들이 전쟁으로 죽으면 채찍을 맞지 않으리라 믿어 일어난 참사였습니다. 그로 인해 초기 방어에 실패해 전쟁이 장기전으로 갈 뻔했지요.”

에이든의 반박이 맞았다. 그 문제로 지식인들 사이에선 노예제도에 대한 회의감이 번져갔었다.

“세상은 변화하고 있고 노예들의 해방 운동은 점점 더 거세어져 가고 있습니다. 그러니 저 같은 놈이 다시 나오겠죠. 하지만.”

번뜩이는 검은 눈이 회의실에 자리한 귀족들을 한 명 한 명 주시했다.

먹이를 탐색하는 동물처럼 사나워서 몇몇 귀족들은 조용히 침을 삼켰다.

“그자가 제국에 충성할지 카르투시아에 충성할지는 두고 봐야 알 겁니다. 노예에겐 나라가 없으니까요.”

무거운 긴장과 침묵이 내려앉았다.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리자 차가운 미소가 지어지며 에이든의 볼에 흉터가 선명히 드러났다.

셀레나에게 보이던 다정함은 온데간데없었다.

그건 과거 노예였던 경험에서 우러난 신랄한 비웃음이었다.

퍽 건방진 태도였지만 누구보다 거친 현실을 잘 아는 그이기에 귀족들은 무어라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에이든이 꾸벅 인사한 뒤 자리를 벗어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 * *

매일 정신없이 일하다 강제적으로 황궁에 갇히니 묘한 탄력감이 느껴졌다.

바깥일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니다. 레이온 제약의 경우 나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서 내가 없으면 일이 돌아가지 않는 상황이었고, 에이든은 내 납치 상황을 들으면 잔뜩 흥분할 게 뻔했다.

‘알버트가 에이든에게 잘 말해 두겠지만…….’

창밖을 보니 궁정인들이 바삐 오가는 게 보였다.

곧 있을 행사 때문에 정신이 없는 걸 테다.

방 안에 갇혀 있다 보니 내가 할 수 있는 건 책을 읽거나 바깥을 구경하는 것밖에 없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철컥하고 열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하녀가 먹을 것을 가져왔다.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황태자의 약혼녀이던 때 황궁을 오가며 얼굴을 익혀 두었던 하녀였다.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요?”

“네? 저를… 아시겠어요?”

“그럼요. 이름이 사라라고 했잖아요.”

사라가 감동 어린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를 거들어 접시를 트레이에서 테이블로 옮겼다.

“양이 많은데 같이 먹어요.”

“제가 어떻게 그러겠어요.”

“하루 종일 혼자 있으려니 심심해서 그래요. 부탁 좀 할게요.”

“아… 그러시다면…….”

그렇게 나는 사라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다.

황궁 요리사가 자랑하는 송어요리에 와인까지 마시자 사라는 금세 긴장을 풀었다.

“30주년 행사 때문에 많이 바쁘죠?”

“말도 마세요. 어찌나 할 일이 많은지 하녀장님께서 저흴 잡아먹으려 든다니까요.”

“신전과 그런 일이 있어서 더 힘들겠어요. 사제분들의 축복을 받아야 하는데 신전에서 순순히 응할 것 같진 않거든요.”

“마침 그 문제로 말이 많았는데 사제분들을 초청하지 않는 걸로 마무리됐어요.”

“…네?”

사제들을 초청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신전과 적대한들 제국은 신성국가였다.

사제의 축복 없이 행사를 진행하는 건 나라의 근간을 흔드는 것과 같았다.

목이 타서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고 와인으로 입술을 적셨다. 황태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에이든에게 알려야 해. 사제들이 참석해야만 성배를 부술 수 있어.’

시간이 없었다. 당장 사흘 뒤가 행사였다.

“셀레나 님?”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좀 피곤한가 봐요.”

“그럼 푹 쉬셔야죠. 마침 식사도 끝났는데 일찍 누우세요.”

“그래야겠어요. 혹시 편지를 전해 줄 수 있을까요?”

“전하께요?”

“아뇨. 제 회사 직원에게요. 진행하던 프로젝트가 있는데 이렇게 궁에 오게 되어서 걱정되어서요. 부탁 좀 할게요.”

“어… 죄송해요. 전하께서 신신당부를 하셨어요. 걸리기라도 하면 매질을 당할지도 몰라요.”

사라는 내가 조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헐레벌떡 테이블을 치우곤 떠나갔다. 문을 잠그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문고리를 돌렸지만 잠겨진 탓에 문고리가 반도 돌아가지 않았다.

일이 이상하게 돌아간단 생각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초조하게 방 이쪽저쪽을 걸어다니다가 창문 밖을 내려다보길 몇 번. 내 힘으로는 이 호화로운 감옥에서 벗어날 수 없단 생각에 절망감이 들 때였다.

톡.

톡. 톡.

톡. 톡. 톡.

쥐가 지붕을 갉아 먹듯 작고 희미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사라가 빠져나간 방문은 아니었다.

방 이곳저곳을 뒤지다 저 소리가 화장실에서 나는 거란 걸 깨달았다.

‘대체 누군 거지?’

나를 죽이러 온 암살자일까? 그게 아니고서야 은밀히 화장실로 드나들 필요가 없다.

당장 사람을 불러야 할까. 아니면 옷장 안에라도 숨을까.

갖은 생각이 다 들었지만 내 선택은 화병을 붙드는 거였다.

손에 묵직한 화병을 꼭 들고 화장실 문을 쾅 찼다.

그러자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끼이익. 안에서부터 문이 열렸다.

“헙!”

눈을 질끈 감고 화병을 높이 들었다. 그 순간 억센 힘이 내 손을 꽉 붙들었다.

“꺄악!”

꽥 비명이 터지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셀레나, 나야, 에이든.”

“…에이든?”

몸을 비틀며 저항하다가 눈을 번쩍 떴다. 헛웃음 지은 에이든이 보였다. 그가 내게서 화병을 빼앗아가 탁자 위에 올렸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이 차차 가라앉았다.

에이든이 진정하란 의미로 내 등을 쓸어주었다.

“여, 여긴 어떻게 온 거야?”

“황궁에 일이 있어서 왔다가 네가 잡혀들어왔단 말을 듣고 몰래 잠입했지. 경비가 삼엄하더라. 1층 벽을 타고 올랐더니 화장실이 나오길래 네가 놀랄까 봐 노크했어.”

“벽을 타고 올랐다고?”

“응. 어렵지 않았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다칠 수도 있었다고 한 소리 하려고 하자 에이든이 나를 끌어안아 입을 막았다.

에이든의 품에선 초여름의 후덥지근한 열기가 느껴졌다.

약간의 땀냄새와 풀내음이 초조한 마음을 진정시켜 주었다.

“다친 곳은 없어 보여서 다행이야.”

“그냥 가둬만 둔 거야.”

“황태자 자식, 돌아버린 게 분명해. 전쟁 땐 이렇게 비상식적인 놈이 아니었는데. 나가자. 이유 없는 강제 구금은 황제가 와도 안 되는 일이야.”

“내가 나가면 더 큰 문제가 생길 거야. 불법으로 침입한 걸 문제 삼아서 너도 처벌받을 수 있어.”

“하지만-.”

“에이든. 행사에 사제들을 초대하지 않을 거래. 사제들이 초대받아야만 성배를 부술 수 있는데 이렇게 되면 나만 이용당하고 끝날 거야. 네가 이 문제를 해결해 줬으면 해.”

에이든은 내가 스스로의 안위보다 일을 앞세우려 하는 게 마음에 안 드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그리곤 내게 한 소리 하려고 입술을 달싹이다 벅벅 마른세수를 했다.

“네가 황궁에 있는 게 마음에 안 들지만 성녀가 되는 건 더 싫어. 넌 성녀보다는 회사 대표가 더 어울려. 그러니 이번 일은 나한테 맡겨. 내가 다 해결할게.”

“이해해 줘서 고마워.”

“어쩌겠어. 너만 한 여자를 쟁취해 내려면 다 이해하고 내조해야지.”

빙그레 짓는 미소가 개구장이 소년 같았다. 그가 긴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내가 으스러질까 힘을 꽉 주지 못 해 몸을 부르르 떨더니 목덜미에 숨을 토해냈다.

목을 타고 어깨, 허리까지 정전기가 튀었다.

간지러움과 전율 같은 게 뒤섞여서 기묘한 감각이 전해졌다.

괜스레 얼굴이 익었다. 내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에이든이 툴툴거렸다.

“모든 원흉인 존 콕스 자식을 반쯤 죽여 놨어야 하는데.”

그가 말을 하자 살갗이 간지러워져 참을 수가 없었다.

에이든의 숨결과 온도,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선명했다.

아까 와인을 몇 모금 마셔서일까. 아니면 에이든의 체온이 뜨거워서일까. 입안이 바짝 말랐다.

‘에이든’하고 그를 부르려 했지만 열린 입술 사이로 나온 건 이름이 아닌 입술을 적시는 혀끝이었다.

평소엔 인지하지 못 했는데 왜 갑자기 에이든이 의식되는지 모르겠다.

물론 에이든은 언제나 의식되는 상대였다.

내가 말하는 건… 나를 감싼 팔과 가슴팍의 탄탄한 근육이었다.

잘 짜여진 근육 형태가 셔츠 위로 느껴졌다.

울림 좋은 목소리는 나와 달리 낮고 단단했다.

호흡의 깊이도, 눈높이도, 살갗의 감촉도… 우린 모든 게 달랐다.

그 당연하고도 별것 아닌 사실이 이상하게 발끝까지 털이 쭈뼛 서도록 만들었다.

“셀레나?”

“어, 으응.”

“더워? 얼굴이 붉은데.”

“아, 아냐.”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정말 왜 이러지.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쑥스러워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에이든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굳은살 박힌 손이 이마를 확인하더니 곧 그의 이마가 내 이마에 맞닿았다.

“열은 없는데.”

너무 가까웠다. 그와 나 사이엔 아주 작은 틈밖에 없었다.

허공에서 호흡이 얽혀들었다. 코끝이 닿을락 말락 했다.

그의 입술에 시선이 닿았다.

남자치고 도톰하지만 날카로운 얼굴선이 더해져서 오히려 색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방금에야 깨달았고.

입술에 시선을 빼앗긴 바람에 그가 어떤 눈길로 나를 지켜보는지 깨닫지 못했다. 그가 띤 열기를 확인한 건 그 뒤였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우리 두 사람은 동시에 숨을 멈췄다.

폭발할 듯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감이 우리 사이의 열기를 더했다.

체온을 머금은 날숨이 맞닿는 찰나,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상대의 입술을 탐했다. 그렇게 서로의 호흡이 얽혀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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