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라사르에서 다녀온 뒤 존이 찾아왔었다.
존이 시온의 부탁을 들어주느라 성수를 빼돌린 탓에 상황이 꼬였던 터라 화가 나긴 했지만, 그가 진심 어린 사과를 건네어 넘어가기로 했다.
“성배를 없애고 싶어요. 방법이 없을까요?”
“기록에도 성배를 없애는 방법은 적혀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론상 방법이 없진 않습니다.”
“뭔가요?”
“성배가 견디지 못 할 정도의 강력한 공명입니다.”
“강력한… 공명이요?”
“예. 여러 사람이 동시에 공명하면 됩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걸요. 성녀를 어디서 찾는단 말인가요?”
“성녀는 찾기 힘들지만 성기사는 찾기 수월하죠. 대신관이 저리 되었어도 사제들은 여전히 신전에 자리하니까요.”
존은 상황을 쉽사리 이해하지 못 하는 내게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성기사들이 사라진 건 신성력을 타고난 이들이 아예 멸종했단 게 아닙니다. 당장 에스타리온 백작가만 보아도 전대 백작과 현 백작 모두 신성력을 타고 났잖습니까.”
“그렇다는 건…….”
“예. 신성력을 타고난 자들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다만 성기사들을 유지할 만큼이 되지 못 했을 뿐이죠. 신전에서 성기사 제도를 폐지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그들은 여전히 사제란 이름하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들이 한둘이 아닌데 어떻게 분별해 낸단 말인가요?”
“사제 서품을 받기 전 특이사항을 기록한 기록이 있을 겁니다. 아는 사제분이 계신다면 그분을 통하면 되겠죠.”
존의 말에 나는 곧장 마누엘 사제를 찾아갔다.
마누엘 사제는 믿을 만한 사람이었고, 그간 신전 내부에서 핍박받으면서까지 고통 받는 이들을 도왔단 사실이 드러나며 내외부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사제이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모든 걸 털어놓았다. 성배가 공명했다는 사실과 그것을 부수고 싶단 것까지.
“셀레나 씨. 저는 못 도와드립니다. 성배가 있으면 병마로 고통받는 이들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왜 부수나요?”
“왜냐면 성배가 혼란을 불러올 테니까요. 성배로 인해 부강하던 왕국이 멸망하고 제국이 세워졌어요. 그런데 지금은 성배와 크루커스가 동시에 공개되었죠.”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다른 법이죠. 이번에도 꼭 혼란스러우란 법은 없잖습니까.”
“황실에서 성배를 권력의 도구로 사용해서 힘을 휘두르면요? 그러다 여러 세력이 서로 성배를 가지겠다고 다투고, 만에 하나 타국에서 성배 때문에 전쟁이라도 일으키면요?”
마누엘 사제는 묵묵부답이었다. 그로선 성배가 사람을 도울 기적의 물건처럼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돌보는 아이들에 관한 말이 나오자 안색이 달라졌다.
“마누엘 사제님이 돌보는 아이들 중 절반이 전쟁고아인 걸로 알아요. 언제까지나 신께서 주신 축복에 기대어 살 수는 없어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우리 힘으로 일궈내야만 해요. 기도하되, 사람이 사람을 돕는 세상을 만들어야죠.”
내 말에 마누엘 사제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의 시선 끝에 보육원 마당에서 뛰노는 아이들이 담겼다.
“성배가 신의 축복이라 할지라도 우린 아직 성배를 가질 만큼 성숙하지 못했어요. 힘을 보태 주세요, 사제님. 이러다가 정복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알겠습니다. 알겠어요. 도울 테니 그만하십쇼.”
마누엘 사제는 전쟁이 일어나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한지 인상을 찡그렸다.
“타고나길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난 사제들이 몇 있긴 합니다. 제 선배 사제들이나 동기들을 비롯해서… 저 또한 그렇죠. 모두 긁어모으면 네다섯은 될 겁니다. 제가 해야 할 것을 알려 주세요. 돕겠습니다.”
“좋아요. 그러면 사제님께선…….”
마누엘 사제와 합의를 한 뒤 기자와 인터뷰를 해서 성배가 나와 공명한 사실을 폭로했다.
다른 사제들에게도 성배가 공명할 수 있다는 사실을 흘리자 사람들은 황궁으로 몰려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황태자는 황제 폐하의 즉위 30주년 기념행사에 공개적으로 성배를 내보일 수밖에 없다.
마냥 감추고 있다간 여론이 폭발할 게 뻔한 데다 황제의 즉위식에서 제 위세를 보여 권력의 누수 없이 황위를 이어받기 위해서다.
성배가 공명하여 성수를 만드는 쇼를 만들기 위해선 내가 필요하다.
신전에 다시 권력이 넘어가는 걸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마누엘 사제와 거리를 둬서 공명현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게 분명하다.
‘그러니 기회는 한 번뿐이야.’
30주년 행사에서 사제들이 황실을 축복하는 시간이 있다.
그들은 황제와 황태자에게 신성력을 축복의 형태로 내린다.
내가 노리는 건 그때다. 성배가 공명하는 건 신성력이니, 굳이 손을 올리지 않아도 신성력이 성배에 닿기만 하면 공명할 거다.
여러 사람의 신성력에 동시에 공명하다 보면 성배에 무리가 갈 테고 자연스레 파괴될 것이다.
그렇게만 되면 성배는 작정하고 부순 게 아닌, 사고로 인한 망가짐이 될 테다.
즉, 책임을 질 사람이 없으니 벌을 받을 사람도 없단 말이다.
그래서 당일 황실을 축복하러 나가는 사제들 중에 마누엘 사제와 성기사 자질이 있는 사제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손을 써두었다.
이제 모든 건 시간 싸움이다.
“초대가 갑작스러우시군요. 이렇게 황궁까지 막무가내로 끌고 올 줄은 몰랐는데.”
일을 하던 중 피터슨이 들이닥쳐서 막무가내로 나를 황궁에 끌고 왔다.
황태자는 내게 사과할 생각이 없었던지 다가와서 안색만 살폈다.
“이런 식으로 밑바닥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대가 자초한 것이지.”
“밑바닥을 보이고 말고를 결정하는 건 전하 본인이에요. 지금이라도 저를 강제로 끌고 오신 걸 사과하고 돌려보내 주세요.”
“그대는 며칠 뒤 있을 즉위 30주년 행사에서 성녀로 데뷔해야만 한다. 성녀를 보호하기 위함이니 그때까진 황궁에 머물도록.”
말을 마친 황태자가 턱짓을 하자 시녀들이 나를 손님방으로 끌고 갔다.
시녀들의 손아귀 힘이 어찌나 억센지 몸을 비틀어도 빠져나갈 수가 없었다.
“이것 놔요!”
나를 방안으로 밀어넣자마자 달칵, 하고 문이 잠겼다.
1층도 아니고 3층씩이나 되는 방이라 창문을 통해 벗어날 수도 없었다.
쾅!
문을 발로 차자 거친 소리가 들렸다. 금박으로 장식된데다 화장실과 거실이 딸려 있는 방이었지만 내겐 호화로운 감옥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렇게 끌려올 수 있다고 예상은 했지만 더 불쾌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모든 건 시간 싸움이었다. 시간 싸움.
* * *
“퓌셀 후작과 모티조 자작이 관건이겠네.”
노예제 폐지를 위해선 12인의 귀족 중 8인 이상의 동의가 필요하다.
그중 에스타리온 백작과 구즈만 백작은 노예제 폐지에 동의했다.
거기에 구즈만 백작가처럼 북부를 통치하는 에스테반 자작과 급진적인 개혁파인 라판 후작도 같은 의견을 밝혔다.
그렇다 해도 네 명의 동의가 더 필요한 상황이었다.
‘오필스 백작은 더 많은 세금을 거두고 싶어 하는 만큼 노예들을 시민으로 전환시키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 중이야.’
전쟁으로 큰 피해를 입었던 라니에 대공도 마찬가지다.
그는 당장 영지를 복구할 막대한 예산이 필요해서 황실에 큰돈을 빌리기까지 했다.
가치관이야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극보수라 해도 경제적 어려움 앞에선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다른 여섯 명은 다르다. 그들은 경제적인 부족함이 없는데다 노예들을 해방시켰다간 신분체계가 흔들려서 자신들에게 위협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중 그나마 설득의 여지가 있는 게 퓌셀 후작과 모티조 자작이었다.
그들은 전쟁을 경험한데다 12인의 귀족 중 가장 젊었다.
“구즈만 씨. 오늘 만남을 주선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입니다. 칼립소 공작. 부디 그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길 빕니다.”
에이든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황제 즉위 30주년 기념 행사가 끝나고 일주일 뒤 투표가 시작된다.
그 투표에서 8인 이상 동의를 얻으면 노예제가 폐지된다.
황태자를 뒤흔들기 위해 상정한 안건이지만 여론이 생각보다 우호적으로 들끓자 욕심이 났다.
달칵.
문을 열자 먼저 와 있던 귀족들이 보였다.
빈센트 구즈만이 그들에게 에이든을 소개시켜 주었다.
“칼립소 공작입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이번에 성배를 찾아내는 데 큰 공을 세운 영웅이죠.”
제국에서 가장 권세가 강한 그들은 에이든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거만한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에이든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적당한 주제들로 분위기를 띄우다가 본론을 꺼냈다.
“카르투시아와의 전쟁으로 피해가 크신 분들이 계시다 들었는데 괜찮으십니까?”
“피해가 없는 건 북부뿐일 겁니다. 다들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죠.”
“전쟁의 최전선에서 싸웠기에 여러분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대강 짐작이 가는군요. 쉽지 않은 싸움이었죠. 그렇지 않습니까?”
퓌셀 후작은 전쟁으로 작은아버지를, 모티조 자작은 형제들을 잃었다.
에이든은 두 사람의 얼굴이 무섭게 굳는 걸 확인하며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전쟁은 언제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평화는 겨울날 얼어버린 호숫물과 같으니까요.”
“칼립소 공작. 하고픈 말이 뭡니까?”
“제가 하고픈 말은, 만에 하나 다음 전쟁이 터질 때를 대비해 노예제 폐지에 힘을 실어 달라는 겁니다.”
“노예제 폐지와 전쟁이 무슨 연관이 있다고 그런 거죠?”
모티조 자작이 눈을 번뜩였다. 전쟁으로 형제들을 잃고 그 자신도 한쪽 팔을 못 쓰게 되었기 때문에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성배를 두고 어떤 약속을 하셨는지 몰라도 썩 좋은 일은 아닐 겁니다. 성배로 인해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가장 먼저 터질 게 내전이니까요. 내전이 터지면 자연스레 외세의 침략이 거세지겠죠.”
몇몇 귀족들이 작게 움찔거렸다. 에이든은 성이 난 모티조 자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노예였습니다. 그렇기에 그들의 사고방식과 생리를 누구보다 잘 알죠. 노예들에게 조국은 제 안위입니다. 이 나라는 단 한 번도 노예들에게 국가였던 적이 없으니까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 하니 책임과 의무가 존재치 않죠. 그러니 나라에 충성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고픈 말이 뭡니까?”
“한 달 전, 카르투시아가 국경지대 노예들에게 접근한 사실을 입수했습니다. 제국을 배신하는 대가로 자유를 약속했죠. 그 누가 이 제안을 거절할 수 있겠습니까?”
에이든가 보고서를 꺼내 귀족들에게 건네주었다.
증거를 확인하자 회의실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