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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18화 (119/134)

<118>

오랜만에 느끼는 여유였다.

평소 이 시간엔 식후 나른함을 이겨내며 서류를 붙들고 있었는데, 오늘은 잠시 시간이 떠서 카페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렇게 에이든과 나란히 앉아서 케이크를 먹고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건 거의 처음 있는 일 같았다.

그래서인지 햇살 따듯한 오후 시간이 유독 평화롭게 느껴졌다. 이 순간이 폭풍전야임을 앎에도 말이다.

“왜 자꾸 내 눈치를 봐.”

내가 에이든을 힐끗 훔쳐보자 그가 픽 웃으며 물었다.

황태자와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려니 아무래도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시일이 꽤 되었음에도 이제야 고백하는 거라 그렇다.

“셀레나. 할 말 있으면 눈치 보지 말고 말해. 뭐든 괜찮아.”

“네가 불쾌해할까 봐 그래.”

“황태자가 너한테 청혼한 것 때문에 그래?”

케이크를 자르던 손이 멈췄다. 에이든에게 말한 적 없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알고 있었어?”

에이든은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가 제 포크로 케이크를 잘라 내 입에 밀어넣어 주었다.

애매한 관계를 끝내고 연인이 된 뒤 에이든이 언제부턴가 하게 된 모습 중 하나였다.

“네가 언제 말해 줄지 기다리고 있었어.”

“…화 안 나? 여태 비밀로 한 거잖아.”

“처음엔 내가 못 미더워서 그런 건 아닐까 하는 못난 생각이 들었는데 이젠 아냐. 내가 너라도 숨겼을 것 같거든. 널 못 믿어서가 아니라 사랑해서.”

“…의회에 노예해방 건을 올린 것도 그것 때문이었어?”

“맞아. 황태자에게 내 것을 건드리면 내가 무슨 짓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주고 싶었거든. 그 문제로 귀족사회에서 퇴출되겠지만 무슨 상관이야. 내가 바라는 건 넌데. 너만 있으면 되거든.”

나만 있으면 된다는 말을 에이든은 당연하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지만 나는 쑥스러워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가 평소처럼 부끄러움을 타지 않는 건 그게 그에겐 해가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진다는 것처럼 상식적인 일이라 그런 걸 테다.

얼른 식은 차를 머금어 얼굴에 오른 열을 식혔다. 그사이 에이든이 말을 이어나갔다.

“되도록 조용히 처리하고 싶었던 거 알아.”

“맞아. 되도록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는데, 이젠 본격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따뜻하고 평화로운 때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게 아쉬웠다.

새로 온 하녀 이야기나 유행하는 디저트 가게 같은 사소한 것들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 일 이야기는 그만하고 싶다.

‘연인이 아니라 사업 파트너 같잖아.’

입 안에 케이크 조각을 밀어넣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황태자는 날 못 건드려. 이번에 네가 노예제 폐지를 건드렸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아주 복잡할 거거든.”

노예제 폐지는 나올 때마다 수도 정치권을 들쑤시는 화젯거리였다.

지난 몇백 년간 여론도 사회적인 필요도 아주 조금씩 노예제 폐지에 우호적으로 변해 왔다.

그러다 전쟁이 끝난 뒤부터 급격히 새로운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노예가 아니라 세금을 내고 나라에 충성할 자유민이 아닌가 하는.

‘황태자가 에이든에게 귀족 작위를 준 것도 여론을 누르려고 그런 거였지.’

노예제를 폐지할 수는 없어도 그들을 기용하는 기회를 만들어 들끓는 여론을 해소하기 위함 아니던가.

여론을 잠재워야 할 에이든이 오히려 불을 지핀 건 아주 영리한 한 수였다.

“복수를 끝낼 거야. 다 마무리하고 내 인생을 찾아야지. 그러기 위해서 성배와 크루커스를 파괴할 거야.”

“어떻게?”

“세상에 알려야지. 내가 성녀인걸.”

에이든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잡혔다. 그로선 내가 지금 뭘 하려는지 이해 가지 않아 의아할 테다.

이번엔 내가 그의 입에 케이크 조각을 밀어넣었다. 단 걸 싫어하는 에이든이 몸서리를 쳤다.

“성녀가 나 하나만 있는 건 아냐. 세상엔 많은 성인 성녀가 있어.”

“그 말은…….”

“그래. 성배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면 황태자는 성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 난 많고 많은 성녀 중 하나가 될 뿐이야. 그럼 결국 성배를 포기할 수밖에 없겠지. 성인 성녀 때문에 나라가 시끄러워지면 역사가 반복될지도 모르니까.”

놀라서 숨을 삼킨 에이든에게 차를 밀어주었다. 오후의 햇살이 우릴 부드럽게 감쌌다.

* * *

“전하. 어찌하면 좋습니까.”

시종 피터슨은 발을 동동 구르며 황태자의 눈치를 살폈다.

황궁 앞에 몰려든 사람들의 목소리가 황태자가 거주하는 궁까지 들려왔다.

피터슨이 얼마나 초조한지 아는지 모르는지 황태자는 앉아서 느긋하게 신문만 읽고 있었다.

‘빌어먹을 신문!’

백성들 수백 명이 황궁 앞에 몰려든 건 모두 저 신문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해 신문에 실린 인터뷰 때문이다. 셀레나 레이온이 한 아주 사소하고도 충격적인 인터뷰.

‘성배는 실제해요. 건국 신화는 사실이었죠.’

셀레나는 예전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아가씨일 때와 전혀 다른 파급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신전을 무너트린 성기사였고, 민중을 고통에서 구한 레이온 제약의 대표였다.

그런 그녀가 성배를 직접 확인하였으며 제게 반응해 성수를 만들어 냈다고 고백하자마자, 사람들은 황궁 앞으로 몰려왔다.

성배와 공명하는 셀레나에게 찾아간 사람들도 꽤 되었지만 셀레나가 몰려든 인파로 일을 할 수 없다며 레이온 제약을 일주일간 문을 닫자 수도에서 진통제와 마취제 공급이 사라져 문제가 되었다.

그러자 환자의 가족들이 레이온 제약 본사에 찾아간 이들을 찾아가 따지면서 죄 황실로 몰려들게 된 것이다.

“참 영리한 여자야. 그렇지 않은가.”

“예? 예에. 영리하죠. 그보다 저 사람들은 어찌한답니까. 근위대장이 나서서 막고 있지만 한계가 있을 텐데.”

셀레나의 선택은 정확했다.

성배를 되찾았다는 사실이 공표되어도 역사적 유물에 불과하다는 사람들에게, 성배가 성수를 만들어 낸다는 성배전설이 맞다는 확인 사살을 했다.

성배가 공명하는 성녀라는 걸 밝힌 건 위험한 일이었지만 그녀는 또 다른 단서를 붙였다.

‘성배는 성기사에게도 반응해야 정상이에요. 그리고 우리 주변엔 많은 성기사분들이 존재하죠.’

신성 시대가 저물며 성기사의 수가 눈에 띄게 줄어들자 신전은 성기사 모집을 종료하곤 역사의 뒤안길로 넘겨버렸다.

그렇다 한들 성기사가 될 자들이 태어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 성력을 타고난 이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리고 그들 중 일부는 신전에 귀의해 약자를 보살피며 살아갔다. 셀레나는 그 예로 사제 마누엘 모레노를 들었다.

‘신전은 대외적인 이미지 때문에 성녀의 조건을 높은 신분으로 제한했습니다. 그 때문에 성녀가 아주 귀한 존재로 인지되었죠. 하지만 성녀는 우리 주변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라졌다 알려진 성기사도 마찬가지죠.’

요지는 하나였다. 신분에 가려졌을 뿐, 성인 성녀는 어디에나 있다.

그러니 백성들은 성배만 있으면 사제 마누엘 모레노에게 찾아서 성수를 만들어 내 달라 할 수도 있고 그게 안 되면 숨겨진 성인 성녀를 찾아내면 될 일이다.

셀레나는 기자와의 인터뷰만으로 황실이 레이온 제약을 건드릴 수 없게 만들었고, 자신을 축출할 의미가 없도록 조성했다.

“이 일을 어찌한답니까. 전하. 사람을 시켜 해산시켜도 매일 더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이러다 큰일이 나도 단단히 날 것 같아 걱정입니다.”

“며칠 뒤가 폐하의 즉위 30주년 기념 행사다. 그 행사에서 성배를 공개할 예정이라고 공표해라. 황실의 위엄을 드높이고 저들의 요구도 들어줄 수 있는 기회가 되겠지.”

“예? 예! 아주 좋은 생각이십니다!”

“그리고 마누엘 모레노 사제와 셀레나를 데리고 와라.”

“두 사람을요?”

“그래. 칼립소 공작이 방해하거든 공격해도 좋다.”

“저, 전하…….”

유혈사태가 일어나도 괜찮으니 두 사람을 데려오라는 뜻이다. 그것이 지닌 무게를 알기에 피터슨은 놀라서 헙하고 입을 다물었다.

성배와 노예제도 폐지. 거기에 노쇠한 황제까지. 조만간 수도에 커다란 바람이 불지도 모르겠다.

“얼른 가서 내가 시킨 대로 해라. 나는 귀족회의에 가야겠다.”

“예, 예에…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전하께서도 잘 다녀오십시오.”

황태자에게 꾸벅 인사를 한 피터슨은 제발 제 자리는 무사히 지킬 수 있길 바라며 얼른 황태자의 방을 빠져나갔다.

홀로 남은 황태자는 신문에 인쇄된 셀레나란 이름을 응시하곤 일어나 회의실로 향했다.

노예제도 폐지 법안이 통과되는 걸 막기 위해 12인의 귀족들을 만날 차례였다.

* * *

12인의 귀족들은 제국의 각 지역을 통치하는 가문의 수장들로 구성되었다.

통치가문 출신이다 보니 가문의 역사도 길었고 영향력 또한 어마어마했다.

그러다 보니 12인의 귀족들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해 새로운 물결이 생겨나듯 그들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었다.

“새로운 시대에 발맞춰 변화해야만 합니다. 몇 년 전 터졌던 전쟁을 겪으신 분들이라면 잘 아실 것 아닙니까. 나라로부터 보호받지도 못하니 전쟁이 터지거나 위기 상황이 왔을 때 언제든 변절할 수밖에 없죠.”

가장 앞장서서 변화를 설파하는 건 에스타리온 백작이 된 시온이었다. 시온 다음으로 열의 넘치는 건 구즈만 백작이었다.

“세금을 내지 않으니 우리들에게도 마냥 좋기만 한 건 아닙니다. 인재를 등용하는 것에도 문제가 많은데다 여론도 확연히 달라졌죠. 그 어느 때보다 신중한 결정을 내려야만 할 겁니다.”

“노예를 해방시키면 그간 노역을 시키던 것들에 다 돈이 듭니다. 그로 인한 경제적 비용은 누가 책임진답니까? 사회적 혼란은 또 어떻고요!”

“맞습니다. 당장 여론만으로 결정을 내릴 수는 없는 문제입니다. 만약 노예제를 폐지했다가 다른 귀족들의 반대에 부딪히면요? 그 원망은 또 어찌한답니까.”

찬성과 반대가 팽팽하게 오가며 분위기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황태자가 나선 건 귀족들이 얼굴을 붉히기 시작할 즈음이었다.

“노예가 해방되면 나라가 시끄러워지니 또다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고, 해방되지 않는다면 그것대로 문제가 될 게 당연할 터. 그러니 우리에겐 제국민들을 하나로 묶는 수단이 필요하다.”

“생각해 두신 일이 있습니까?”

“나는 제국에 충성하는 이들에게 성수를 나눠줄까 하는데, 그대들 생각은 어떠한가?”

시온을 비롯한 귀족들의 얼굴이 오묘해졌다. 회의실에 내려앉은 공기가 기묘했다.

황태자가 그들을 보며 알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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