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레이온 제약으로 출근한 셀레나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다른 기자들이 회사 앞까지 찾아와서 그녀에게 어제 재판에 대한 소감을 물어서다.
물론 그건 머리를 어지럽게 만드는 거였고, 셀레나가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건 전날 에이든이 의회에 밀어넣었다는 법안이었다.
‘노예제도 철폐를 위한 기본법 수정’이 에이든이 발의한 법안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행동할 줄 몰랐는데… 심경의 변화가 있는 걸까?’
에이든이 의회에서 정식으로 법안을 발의할 수 있었던 건 그가 칼립소 공작이라서다.
무턱대고 작위를 내렸다간 나라의 절반이 작위를 가진 사람이 될 수도 있는 노릇이라 황실에서 내릴 수 있는 작위는 그 수가 정해져 있다.
자세히 살펴보면 상속이 가능한 작위도 있고 작위를 받은 당사자만이 가질 수 있는 경우도 있다.
중요한 건 에이든이 받은 칼립소 공작이라는 작위가 칼립소 지방을 사사받는 것과 동시에 여러 권리를 부여받는 위치란 거다.
에이든이 받은 칼립소 공작위에는 상원의원 자리가 약속되어 있다.
해서 에이든은 상원의원을 겸직한 상황인데, 그는 칼립소 공작이 된 이후에도 의회에 관심을 보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칼립소 공작이 발의한 법안이 통과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정말 노예제도가 폐지되는 걸까요?”
점심 식사 후 휴식을 즐기던 직원들도 아침 신문을 보고 이야기를 꺼냈다.
창립 멤버나 다름없는 알버트가 직원들에게 설명해 주었다.
“그 법안이 통과되려면 12인의 귀족 대표 중 8인 이상에게 동의를 받아야 해요. 여태 논의가 많았지만 통과되지 못한 것도 귀족 대표들의 동의를 받지 못해서고요.”
“12인이나 됐어요? 전 9인쯤 되는 줄 알았는데. 그런데 귀족 대표의 기준이 뭔가요?”
“통치자 가문이냐는 거죠. 황실에게 충성하되 각자의 영지를 통치하는 통치자 가문들 대표가 12인이에요. 12개의 가문이 묶인 만큼 그들이 동의하면 황실도 마냥 반대할 수는 없겠죠.”
“그들이 찬성을 할까요? 알버트 씨가 생각하기엔 어때요?”
“글쎄요. 몇몇은 찬성하겠지만… 찬성 비율이 높아 봐야 반 아닐까요? 영지에서 세금을 거두는 사람들이 자유민을 바라진 않을 거니까요.”
알버트의 말이 맞다. 일반 시민들이면 모를까 대귀족들은 노예가 있으면 이익을 얻는 게 많았다.
에이든이 낸 법안이 통과되지 못 하고 폐기되면 귀족사회와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다.
나 때문에 귀족사회에 녹아들길 바랐으면서 갑자기 눈 밖에 나도 상관없다는 듯 구는 게 이해 가지 않았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는 것 같은데….
“저, 사장님.”
다른 직원이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불렀다. 그가 놀란 내게 속삭였다.
“황태자 전하께서 찾아오셨어요.”
“지금 어디 계셔?”
“회사 앞 카페요.”
황태자에게 답을 주기로 한 지 며칠 남은 걸로 안다. 일찍 차이고 싶어서 찾아온 걸까. 카페에 가자 황태자가 나를 맞았다.
다른 사람들은 황태자의 표정을 보아도 평소처럼 아무런 감정도 드러나 있지 않다고 할 테지만 그를 잘 아는 내 눈에는 지금 반가워하고 있단 게 보였다.
“어쩐 일이신가요?”
“지나가다 그대가 생각나서 들렀다.”
“전하께서 그런 말을 하시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많이 바뀌셨네요.”
“그대가 바뀌었듯 나 또한 바뀐 거겠지.”
황태자가 짓는 매끄러운 미소가 낯설었다. 나를 향한 다정한 눈빛과 그가 보이는 태도까지.
속이 울렁거렸다. 좋은 의미가 아니라… 기분이 이상해서 토할 것 같았다.
“재판 때문에 심란할 것 같아서 왔는데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군.”
“전하께서 제게 그런 협박만 하지 않으셨다면 더 좋았을 거예요.”
“내게 마음이 없는 상대를 붙잡으려면 나만이 줄 수 있는 것을 찾아야 하는데 그대에겐 필요한 게 없으니 지키고 싶은 것을 휘두를 수밖에.”
“그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할 선택은 아니지 않나요?”
어깨를 으쓱거린 황태자가 내 찻잔을 확인했다. 나는 아직 내 찻잔에 손도 대지 않았다.
“평생 그대에게 죄책감을 느껴 왔지만 그 일에 관해서는 조금도 미안하지 않아. 그런 수단을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뿐, 함께하고픈 마음은 진심이니까.”
“…….”
“책임감과 죄책감에 짓눌려 살았기에 한 번은 욕심을 내보고 싶다. 권리와 의무, 책임. 황태자로 태어나 가져온 그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이번 한 번만. …오직 하나면 되지.”
“전하…….”
“나를 선택해. 셀레나.”
셀레나. 황태자가 내 이름을 부른 게 처음이 아닌데도 처음 듣는 것 같았다.
내 이름이 이토록 뜨겁게 들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저 음성이, 나를 부르는 저 목소리가 저렇게 농밀할 수도 있을 줄은 몰랐다.
“저는…….”
목소리가 떨렸다. 답은 정해져 있는데 입 밖으로 내는 게 쉽지 않았다.
마음이 무거웠다. 황태자가 내게 준 상처와는 별개로 그가 아주 오랜 시간 나 때문에 홀로 마음 앓이를 했다는 걸 알게 되어서다.
황태자를 향한 감정과는 별개로 혈육도 아닌 사람이 그간 나를 위해 애써 왔다는 게 감사했다.
그가 느꼈다는 책임감과 죄책감의 무게가 상상 가지 않았다. 그래서 더 미안해서 마음이 무거웠다.
하지만 그런 이유만으로 마음을 받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그건 서로에게 못 할 짓이다.
“저와 혼인을 추진하려 하신다고 들었어요.”
꾹 다물린 입과 살짝 힘이 들어간 턱이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직감하는 듯했다.
시에나가 나타난 뒤 황태자에겐 부정적인 말만 하는 것 같다.
오해가 풀린 지금은 그를 무조건 적대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지만 그에게 마냥 곱게 굴 수가 없었다. 제 마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나를 협박했으니까.
그렇다고 공격적으로 굴면 황태자가 더 거칠게 나올지도 모른다. 그래서 부드럽게 말했다.
“또다시 전하께 적대적인 감정을 갖긴 싫어요. 우리가 좋은 친구로 지낼 수도 있잖아요.”
“친구? 그대는 단 한 번도 내 친구였던 적이 없다. 태어나기 전부터 내 약혼녀였지. 내가 책임지고 지켜야 할, 내 사람.”
“더는 그런 감정을 느끼실 필요 없어요. 이제 다 끝났잖아요. 다 끝난 일이니 과거로 흘려보내 주세요.”
“끝난 일? 나는 이제 시작인데 끝난 일이라니 참 잔인하군.”
“…….”
황태자의 말투가 뾰족해졌다. 그가 노골적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게 낯설었다.
많은 감상이 들었고 여러 단어가 머릿속을 떠다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정해져 있었다.
“죄송해요.”
“…후회, 없겠는가?”
스스로 황태자를 택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이번에도 거절한다면 황태자는 본격적으로 수를 쓰기 시작하겠지.
에이든에게 해가 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 레이온 제약이 사라질 수도 있다.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된다면 후회하겠죠. 하지만 이대로 승낙하면 말을 내뱉은 순간부터 쭉 후회하고 스스로를 미워하게 될 것 같아요.”
무섭게 굳은 얼굴과 분노가 어린 눈빛, 답지 않게 거칠어진 호흡.
황태자가 보이는 감정적인 반응에 긴장으로 인해 저절로 어깨가 굳었다.
그렇다고 번복하고 싶다거나 후회하진 않는다. 내가 원하는 미래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기에.
“그래. 그대의 대답은 잘 들었다. 조만간 황궁에서 사람이 갈 테니 열심히 준비해 보도록.”
황태자가 벌떡 몸을 일으키곤 나를 지나 카페를 나갔다. 달칵. 카페 문이 닫히고 유리창 너머로 멀어져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한때 황태자와 나란히 있는 미래를 꿈꾸었다. 에이든처럼 사랑하지 않았지만 그를 존경하였기에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젠 다르다. 존경과 사랑은 달라서, 내가 꿈꾸는 미래엔 그가 아닌 에이든이 있다.
“죄송해요. 저도 어쩔 수 없어요.”
황태자가 제 마음을 위해 나를 협박한 것처럼 나도 내 꿈을 위해 그를 곤혹스레 만들어야겠다. 우리가 함께하지 못하도록.
* * *
전대 에스타리온 백작이었던 알바로는 제 앞에서 정신없이 떠드는 루카스를 여전히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의식을 회복하셔서 다행입니다. 영영 못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얼마나 슬펐는지 아십니까?”
“난 네가 이렇게 말을 하고 있는 게 믿기지 않는구나.”
“형님께서 평생 제게 생명력을 나눠주신 덕분이죠.”
셀레나를 만났던 게 마지막 기억인데 눈을 뜨고 나니 많은 게 달라져 있었다.
아들인 시온은 에스타리온 백작위를 계승했고, 의식이 없던 동생은 깨어나서 예전에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갈 정도로 건강을 회복했다고 한다. 그리고 셀레나는…….
“셀레나가… 나를 구했다고?”
“예. 그 애가 준 성수를 마시고 깨어난 겁니다.”
알바로가 미처 삼키지 못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슴이 갑갑하다 못해 목구멍까지 숨이 턱턱 막혔다.
제 딸아이가 성녀로 태어난 줄도 모르고 이단심문소에나 밀어 넣는 어리석은 아비가 이곳에 있다.
영영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 것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를 오해해서 몹쓸 경험을 겪게 한 것도 모두 후회가 되어 죽을 지경이었다.
전날 시온을 불러서 셀레나의 근황을 물었다. 그때 시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분명하게 말했다.
‘아버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셀레나를 그리워하는 일뿐입니다.’
더 이상 관계를 개선해나갈 여지가 없단 뜻이었다.
가슴이 무겁다 못 해 반으로 쪼개질 듯 아파왔다.
그는 셀레나에게 몹쓸 말을 했던 과거의 자신이 증오스러워 제 목이라도 조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비가 되어서 자식을 알아보지도 못 하다니…….’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렇게나 순하고 착한 아이가 독기가 바짝 오른 눈을 한 건 그의 탓이다.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걸.”
“형님, 왜 또 그러세요.”
“자식 잃은 아비로 사는 건 사는 게 아니야. 그래서 난 네가 밉다. 시에나의 아비인 네가.”
“형님…….”
“미안하다. 그게 네 잘못도 아닌데.”
그저 남 탓을 하고 싶었다. 자기 자신만 원망하며 지내는 게 너무 버거워서.
눈을 뜬 지 일 년이 된 것도, 한 달이 된 것도 아닌데 벌써 괴로움에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는 그게 두려웠다. 자신을 저주하며 살아갈 앞날이. 그리고 잃어버린 딸을 그리워할 제 마음이…….
“너도 셀레나를 만났으면 알 것 아니냐. 나를 얼마나 경멸하는지. 하긴, 어떻게 기회를 바랄까. 자식도 못 알아본 못난 아비인데 내가 감히 어떻게…….”
알바로의 잇새로 다시 한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눈물이나 신음이 섞이지 않은 날숨에 불과함에도 고통이 진득하게 배어 있어서 듣는 사람마저 가슴이 무거워지게 만들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한숨이야말로 알바로가 죽는 날까지 짊어져야 할 굴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