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15화 (116/134)

<115>

수도에 돌아온 에이든은 빠르게 수사를 진행시켰다.

묵비권을 행사하던 세바스찬은 에이든이 성배를 수거하는 데 성공하자 눈에 띄게 전의를 상실했다. 그럼에도 수사에 비협조적인 태도만은 달라지지 않았다.

상황이 뒤바뀐 건 에이든의 아이디어 덕분이었다.

끝까지 묵비권을 행사하는 쪽이 모두 뒤집어쓰게 될 형국이라며 매일 신문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대신관과 전대신관의 기사를 보여 준 것이다.

그 때문에 초조해진 두 사람이 서로 상대에게 죄를 떠넘기기 위해 폭로를 시작한 것이다.

에이든과 시온은 둘의 심문을 적절하게 검증하여 누가 저지른 잘못인지 가려내었다.

[재판에 넘겨진 신전의 범죄자들.]

시온은 초조하게 입술을 뜯으며 오늘자 신문을 훑었다.

수사가 끝나자마자 이례적으로 빨리 재판일이 잡혔다.

신전의 타락에 세상이 떠들썩했고 많은 이들이 관련자들을 주목하고 있다.

그 속에는 에스타리온 백작인 시온도 속했지만 가장 중심이 된 경우는 셀레나였다.

세바스찬이 납치한 이들 중에 북부 라사르의 귀족인 구즈만 백작가의 아이가 속해 있었다는게 밝혀지며, 대중적으로 알려진 피해자인 셀레나에게 눈이 집중된 것이다.

“하아.”

셀레나는 와중에도 꿋꿋하게 레이온 제약을 운영 중인 듯했다.

오히려 제 명성을 이용해서 홍보를 하고 사업체를 공격적으로 키워나갔다. 문제는 황태자였다.

‘칼립소 공작을 무척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칼립소 공작과 함께 있을 때의 셀레나는 이제껏 보지 못한 면모를 보였다.

꺾일 듯 위태로워 보이던 예전과 달리 많이 단단해 보였고 안정감을 되찾은 게 보였다.

그뿐만이 아니다. 칼립소 공작을 볼 때 셀레나에게선 환한 빛이 나왔다.

보는 사람마저 먹먹하게 만들 정도로 밝고 행복한 기운이 가득해서 둘을 떼어놓고 싶지 않았다.

‘네가 그런 걸 모를 리도 없고 다 알면서도 선택한 거겠지.’

그와 함께할 때 그 무엇보다 행복하니까.

시온에겐 셀레나의 결정을 반대할 권리가 없었다. 그럴 수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먼발치에서 행복을 지켜보는 것만이 그에게 허락된 전부였다.

그런데 지금, 황태자가 셀레나를 강제로 제 옆에 앉히려 하고 있다. 그는 벌써 일주일째 이 문제로 고민 중이었다.

일주일 전 그날,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시온이 황태자에게 마저 보고를 하러 갔을 때다.

그때 황태자는 시온이 빼돌린 성수를 언급하며 말했다.

‘의식불명인 백작의 아버지가 얼른 깨어나면 좋겠군.’

존은 빼돌린 성수 이외엔 모두 처분했다고 했으니 남은 건 시온이 가진 것뿐이다.

만들어진 지 오래되지 않은 성수는 생명력이 가득해서 병을 치유해 낸다.

쓰러진 그의 아버지는 생명력이 사라져서 누워 있는 터라, 셀레나가 만든 성수를 마시면 깨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아버지께서 효과를 보면 셀레나가 성녀인 게 증명되는 거다. 그러면 황태자에게 삶을 저당잡히겠지.’

만약 효과가 없다고 잡아뗀 뒤 셀레나가 성배를 만질 일이 없도록 만들면, 셀레나는 지금처럼 잘 살 수 있을 테다. 대신 아버지는 깨어나지 못한다.

즉, 시온은 아버지와 셀레나를 두고 택해야만 했다.

다시 마음이 무거워진 그는 집무실을 나와 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아버지…….”

괴로움에 찬 시온은 인상을 찡그린 채 제 아비의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사실 성수로 아버지를 깨운 뒤 여전히 누워 있는 것처럼 꾸밀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건 임시방편이다.

세상엔 영원한 비밀이 없다. 오히려 황태자를 속이려 했단 이유로 죄를 물을 수도 있다.

“아버지, 제 선택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때였다.

“시온?”

“작은아버지?”

형을 보러 방문한 루카스가 괴로움에 떠는 시온을 보곤 놀라 다가왔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

“아무것도 아닙니다.”

“시온. 내가 깨어난 지 오래되지 않았다지만 네게 고민이 있단 것 정도는 알아챌 수 있다. 말하려무나. 무슨 일이냐?”

루카스가 어깨까지 붙잡으며 진지한 모습을 보이자 시온은 망설임 끝에 물었다.

“…셀레나를 만나야만 합니다.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셀레나를?”

“예. 만나서 해야 할 얘기가 있습니다.”

“마침 셀레나가 이사한 기념으로 초대했는데 잘됐구나. 함께 가자. 안으로 들여주진 않아도 문가에서 해야 할 말 한두 마디 정도는 할 수 있을 게다.”

시온은 루카스를 쫓아가는 게 셀레나의 심기를 거스르는 건 아닐지 고민했다.

그래서 작은아버지를 통해 편지라도 보낼까 했지만 셀레나를 직접 보고 싶단 욕심에 용기를 내었다.

시온은 얼른 채비를 해서 루카스와 함께 셀레나의 집으로 출발했다. 그는 가는 마차 안에서 할 말을 정리하고 또 정리했다.

“생각보다 집이 아담하구나.”

루카스는 셀레나의 집을 확인하곤 짧은 감상을 남겼다.

문을 두드리자 기척이 들렸다. 시온은 발소리만으로도 그 사람이 셀레나임을 알았다.

“작은아버지. 오셨어…….”

문을 연 셀레나는 시온을 확인하곤 인상을 찌푸리더니 매서운 얼굴로 루카스와 시온을 번갈아 확인했다. 시온이 얼른 나서서 그녀에게 해명했다.

“내가 작은아버지께 간곡히 부탁드려서 함께 온 거야. 작은아버지 잘못이 아니니 너무 그러지 마.”

“…초대되지 않은 손님을 바라는 주인은 없어요. 저는 원치 않는 사람과 동행하는 손님을 바라지도 않고요. 오늘은 이만 돌아가 주셨으면 좋겠어요.”

제 조카가 냉정하게 선을 긋자 루카스는 충격을 받아 입을 벌렸다.

그녀가 큰 상처를 받은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로 격렬하게 반응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셀레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을 닫는 순간이었다.

“황태자가 성수에 관해 알고 있어.”

닫혀가던 문이 멈추었다. 그가 더 말하려는 찰나, 셀레나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통보했다.

“길을 따라 쭉 가면 카페가 나와요. 그곳에서 봐요.”

“…그래. 모두 설명할 테니 얼른 와. 기다리고 있을게.”

시온은 쾅! 닫힌 문을 보며 생각했다.

저 때문에 황태자가 모든 걸 알게 되었으니 곧 셀레나에게 목이 졸려 죽을지도 모르겠다고.

* * *

카페엔 시온만 있었지 작은아버지는 보이지 않았다.

시온이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설명했다.

“작은아버지께서 들어봐야 좋을 게 없어서 집에 먼저 가시라고 말씀드렸어.”

“집들이는 영원히 못 하겠군요. 이제 작은아버지와도 밖에서 만나야겠어요.”

“미안… 상황이 급해서 어쩔 수 없었어.”

“전하와 백작님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안 건지 제대로 설명해야 할 거예요.”

시온이 성수를 언급하자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다.

그건 에이든, 존과 다 이야기가 끝난 일이었다.

시온은 목이 타는지 뜨거운 차를 밀어넣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오랜 설명이 끝나자 나도 시온처럼 식은 차로 입술을 적실 수밖에 없었다.

“결혼…이라고? 하!”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자 손이 달달 떨려왔다.

시온의 걱정스런 눈길에도 진정할 수가 없었다.

“내게 좋은 방법이 있어. 성수가 효능이 없다고 할 테니 넌 당분간 지방이나 해외에 가 있는 건 어때?”

찌푸려진 미간이 펴지질 않았다. 눈꺼풀 한 번 깜빡이지 않고 노려보자 시온이 조심스레 고백했다.

“성수는 버릴 생각이야. 아버지는… 당신이 살아나는 것보다 널 지키는 걸 우선으로 여길 거라고 생각해.”

혈연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걸까? 아니, 대체 가족이란 뭘까?

시에나가 나타난 초반엔 내가 친딸, 친동생이 아니어도 가족이라고 했다.

그러다 거짓말 하나에 나는 그들의 원수가 되었다. 그러다 내가 친딸임이 밝혀지자 예전과 같은 애정을 보인다.

이들에게 가족은 어떤 존재일까? 몇 가지 상황이 달라지는 것만으로 삼켰다 뱉었다 하는 관계가 어떻게 가족이 될 수 있을까.

저들의 애정에 가치가 있긴 할까. 내가 부모가 되면 저들을 이해할 수 있을까.

“칼립소 공작과 함께하고 싶다는 거 알아. 수사 때문에 자주 마주쳤는데 좋은 남자더라. 널 끔찍이 사랑하고 있고.”

“…….”

“네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가정을 꾸리고 그 안에서 행복해지면 좋겠어. 사실 너와 이렇게 된 뒤 많이 생각했어.”

“무슨 생각이요?”

“가끔은 네가 갑갑했었어. 그 사건 이전엔 그러지 않았는데 집에 돌아온 이후 넌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거든. 내성적이고 소심해졌었지. 안쓰럽다가도 가끔 화가 났는데… 이젠 알 것 같아. 기억이 없으니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가 없었던 거였어.”

“…맞아요.”

“네게 당당하지 못한 입장이 되니 조금은 알 것 같더라고. 그런 의미에서 칼립소 공작에겐 빚이 많아. 그때도 이번에도 널 구한 건 그 사람이니까.”

“…….”

나를 구하겠다고 제 아버지를 버린 시온의 선택이 부담스러웠다.

아버지였던 전대 에스타리온 백작과의 인연은 모두 끝이 났다.

그런데도 저 혼자 가족으로 여기는 게 불편했다.

“…이미 다 끝났어요.”

“응?”

내게 끝난 관계라 저들에겐 영원한 짝사랑이 될 테다.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무엇이 진짜 복수인지 알게 되었다.

사랑에 외면당하여 이단심문소에 갇혀 있는 시간은 내게 있어 가장 끔찍한 지옥이었다.

이단심문소에 들어간 뒤에도 한동안 가족들을 그리워하고 사랑했었다.

그리고 그들이 나를 버렸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 울고 또 울었다.

그런데 이제 관계가 역전되었다. 저들은 영원히 내 사랑을 갈구할 테고 나는 그때 그들이 그랬듯 매섭게 외면할 것이다.

“성수를 쓸지 말지 선택해야 한다면 제가 결정 내려 줄게요. 그 성수, 쓰는 게 좋을 거예요.”

“그랬다간 네가-.”

“레이온 제약과 에이든이 이곳에 있는 이상 저는 여기 남아 있을 거예요. 제가 있을 곳은 에이든의 옆이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황태자와 혼인을 치르는 게 아니라 회사를 확장시키는 거니까요. 그러니 그 성수는 꼭 쓰도록 해요.”

주먹 쥔 손에 저절로 힘이 꽉 들어갔다. 나는 깊은숨을 들이쉰 뒤 마지막 문장을 이었다.

“이제부터 내가 성녀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릴 거거든요.”

드디어 내 복수가 마지막 장에 들어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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