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13화 (114/134)

<113>

“존. 잠시 나 좀 보자.”

밤이 되어 셀레나가 위층에 잡은 제 숙소로 올라가자 에이든이 성배를 연구 중이던 존을 찾았다. 존은 예상했다는 듯이 그를 맞이했다.

“황태자에게 고용된 네 입장에선 오늘 본 사실을 전달해야 한다는 거 알지만 부탁 좀 하지.”

“이해합니다. 상황이 복잡할 뿐만 아니라 대단히 위험하니까요.”

“그래. 황태자는 신전을 완전히 짓밟아서 권력의 중심에 서려고 하는 중이지. 이 사실이 황태자의 귀에 들어가면 셀레나는 영원히 성녀로 착취당하거나 함께 축출될 거야.”

없는 이유를 만들어서 레이온 제약을 빼앗아 황실 소유로 만들 수 있다.

설립된 지 오래되지 않아 뿌리 깊은 회사가 아니라서다.

셀레나에게 닥칠지도 모를 일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섬뜩해진 에이든은 존에게 깊이 고개 숙여 부탁했다.

존은 에이든이 고개까지 숙이자 크게 당황했다.

“이러지 마세요. 칼립소 공작님,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황태자에겐 비밀로 할게요. 그러니 제발요. 네?”

에이든은 존이 몇 번이고 약속할 때까지 쭉 고개를 숙였다.

그 탓에 존은 한껏 당황해서 에이든이 고개를 든 뒤에도 식은땀을 흘렸다.

“제가 말씀드리지 않는다고 황태자 전하께서 언제까지나 모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선 안 될 겁니다. 그분은 치밀한 분입니다. 조금만 찾아보면 제가 숨긴 게 어떤 건지 알 수 있겠죠.”

“그전에 대책을 세워야지.”

“…행운을 빕니다.”

“그래. 그럼 이제 성수나 옮겨서 버리자.”

“아, 예. 좋습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커다란 호리병을 화장실로 옮겨서 성수를 쏟아버렸다.

성배 자체가 무게가 제법 나가는 데다 물이 가득 담겨서 꽤 무거웠던 탓에 작업을 마치고 나자 두 사람은 땀투성이가 되었다.

다시 성배를 방으로 옮긴 뒤, 에이든은 자기 전 몸을 씻겠다며 화장실로 갔고 존은 성배를 보관한 방의 서랍에서 물병을 꺼냈다.

물병 속엔 빛을 잃지 않은 성수가 반짝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에이든.”

존은 에이든이 자리를 비운 사이 잠시 호텔 밖으로 나와 심부름꾼을 찾았다.

그는 심부름꾼에게 편지와 함께 물병을 건네며 말했다.

“최대한 빨리 전해드려라.”

“예.”

학자로서의 욕심과 별개로 성배가 만든 성수는 쓰임이 많았다.

크루커스와 달리 공명한 이의 생명력을 뽑아 만든 것도 아니었다.

“미안합니다. 셀레나 씨…….”

존은 불편한 마음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시 방으로 돌아갔을 때 존의 얼굴엔 어둠이 거두어져 있었다.

* * *

“하…….”

결국 밤잠을 설쳤다.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서 도무지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성배가 내게 반응한 것도 기가 막힌 일인데 이 사실을 묻는 게 언제까지 가능할지도 의문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성수를 만들어 낼 수 있단 걸 공개하면 황태자에게도 시온이나 에스타리온 백작가에게 제대로 된 복수를 할 수 있는걸.’

레이온 제약만의 힘으로는 황실이나 백작가에 복수하는 게 아직 힘든 실정이다.

신전이야 황실과 백작가까지 함께 합세해서 무너트린 거지만 이젠 나 혼자 그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사실 황태자가 내게 큰 잘못을 한 건 아니야.’

감옥에 갇힌 나를 조롱하고 진실을 감춘 게 전부다.

그럼에도 내가 그에게 분노하는 건 그만큼 상처받아서였다.

진심으로 황태자를 존경했고 좋아했다.

지금에 와 보면 그건 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 ‘동경’이었지만, 뭐가 됐건 그에게 진심 어린 마음을 가진 건 사실이다.

그래서 실망하고 아파한 만큼 그 또한 아프길 바란다.

이런 마음을 확인할 때면 내가 복수귀가 되고 있는 건 아닐까 염려된다.

내가 올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의심되어서 괴롭기도 하고.

“황태자는 몰라도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벌을 받아야 해.”

내 손목과 발목에는 아직도 수갑을 찬 채 동상에 걸려 생긴 흉터가 남아 있다.

뼈까지 스며드는 추위와 나락에 버려진 두려움과 절망, 내 모든 것과 같던 가족을 잃었다는 슬픔을 똑똑히 기억한다.

무고함에도 불신과 분노로 이단심문소란 지옥에 떨어졌다.

시에나처럼 에스타리온 백작도 똑같은 지옥에 살아가야 한다.

“…성녀라는 걸 이용하면… 가능할 수도 있어.”

두 눈에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한 생명력을 담은 게 성수다.

그런 성수를 만들어 내는 존재는 시대를 불문하고 커다란 영향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

내가 에스타리온 백작가가 이단인 것 같다는 언질만 주어도 세상은 그들을 벌할 거다.

욕망이 목구멍까지 넘실거렸다. 머릿속이 마비되어 다른 것들은 멀어지고 이 기회를 통해 그들을 벌하자는 생각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그렇게 결심이 서는 찰나였다.

똑똑.

“셀레나. 아직 자? 시간 됐어.”

“아…….”

문을 두드리는 에이든의 음성에 흠칫하고 정신이 들었다.

불나방처럼 위험을 감수하고 뛰어들자던 마음이 흩어졌다.

“잠시만! 30분 뒤에 로비에서 봐!”

얼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후에 에바, 아니, 엠마뉴엘을 보러 가기로 했기 때문이다.

후닥닥 준비를 마치고 로비로 내려가자 에이든이 기다리고 있었다.

“존은 근처에 문화재 답사 간다고 우리끼리 가래.”

그렇게 우리 둘만 구즈만 씨 집으로 갔다.

현관문을 두드릴 필요도 없이 안에서 하녀가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았다.

열린 문 사이로 맛있는 냄새가 확 풍겨왔다.

“어서 오세요! 주인어른도 저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셀레나 씨!”

“에바!”

반갑게 나를 맞아 준 에바는 이제까지 본 얼굴 중 가장 밝고 생기 있었다.

구즈만 부부도 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우리를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사는 완벽했다.

구즈만 부부가 우리를 위해서 따로 유명한 식당의 쉐프를 불러서다.

“믿을 수가 없어요. 딸기를 땄다거나 제 아버지가 그네를 밀어줬던 건 선명히 기억하더군요. 왼쪽 앞머리 부분이 곱슬거리는 거라든가 복숭아뼈가 유독 튀어나온 것까지, 어린 시절과 똑같았죠. 난, 나는…….”

구즈만 부인은 말을 하다가 벅차오르는지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닦았다.

“엠마뉴엘과 함께하지 못한 세월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더더욱이 아이를 납치한 이들을 찾아야겠습니다. 아이 엄마도 그 점에 굉장히 안타까워하고 있고요.”

“맞아요. 무엇보다 세바스찬, 그자가 무척이나 의심되죠. 이미 범죄 이력이 있는 만큼 직접 수도로 내려가서 황제 폐하께 직접 말씀드릴 예정이랍니다. 엠마뉴엘이 어떻게 지냈는지 직접 확인하고 싶기도 하고요.”

“납치 당시 수사 기록이나 증언 녹취록을 가져가시면 유용할 거예요.”

“좋습니다. 꼭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사실 우리도 압니다. 너무 오래전 일이고 관련된 녀석들은 모두 도망갔을 거란 걸요. 세바스찬이 실토하거나 밀접하게 연관된 이들의 증언이 없으면 힘들겠죠. 그래도 할 겁니다.”

“꼭 범인이 잡히면 좋겠어요. 진심으로요.”

수사에 관한 일로 분위기가 심각해지자 에이든이 다른 주제를 꺼냈다.

마침 북부 사람인 구즈만 씨도 검을 드는 일이 잦았던 터라 이후 대화는 북부의 검술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졌다.

“북부에선 30년 전 노예 해방 운동이 일어난 이후 신분이야 어떻든 실력이 있으면 군에 들어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죠. 남자의 경우 검술 실력이 가장 중요하지만 활이나 다른 것들도 쓸 줄만 알면 됩니다.”

“그자가 노예라도요?”

“예. 수도 사람이 보기엔 이상할지 몰라도 어쩔 수 없습니다. 북부는 척박한 땅입니다. 생존에 필요한 건 신분이 아닌 실력 아닙니까? 북부에서 노예 해방 운동이 잘 일어나지 않는 것도 이미 그 개념이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에이든은 홀린 듯이 구즈만 씨의 말에 집중했다.

손에 쥔 포크는 장식이 된 지 오래였다.

“그러고 보니 북부 귀족들은 오래전부터 노예 해방 운동을 지지해 왔었던 걸로 알아요. 다름 아닌 북부의 대귀족들이 찬성해서 많이 놀랐던 기억이 있어요.”

“노예 제도는 쓸 만한 인재를 등용하는 데 쓸모가 없으니까요.”

예전과 달리 노예 해방 운동 이야기가 가볍게만 들리지 않았다.

내가 이러한데 에이든은 지금 어떤 기분일까.

찌푸려진 표정이 감격해서인지 울분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내가 모르는 과거의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지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에이든은 목이 잠기는지 헛기침을 하다가 물을 들이켰다.

그가 푹 잠긴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정말… 제가 북부에 살았다면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구즈만 씨가 에이든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북부에 거주하니 수도에서 일어난 일에는 눈이 어두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내가 에이든의 사정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는 노예 출신입니다. 지난 카르투시아와의 전쟁 때 공적을 세워서 작위를 받으며 노예 신분에서 해방되었죠.”

구즈만 씨가 탄성을 내질렀다. 그는 누가 봐도 감격한 얼굴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농담이 아님을 상기시켜 주었다.

“실력만으로 바닥에서 위까지 올라간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저는 노예제 폐지를 주장해 왔죠. 칼립소 공작. 만약 이 문제에 힘을 실어 줄 사람이 필요하다면 언제든 제게 말해 주십시오. 제 딸아이를 찾아 주셨는데 그 정도 도움도 못 준다면 저는 아버지 자격이 없을 겁니다.”

에이든의 눈이 커다랗게 뜨였다. 에이든이 실제로 노예 해방 운동을 추진 중인 건 아니지만 말만이라도 큰 힘이 되는지, 이제껏 보지 못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좋습니다. 그리 말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처음 칭찬받은 소년처럼 수줍고 밝은 웃음에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인지 식사 시간은 처음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은 분위기로 흘러갔다.

라사르까지 온 건 정말로 탁월한 선택이었다.

나와 에이든. 그리고 에바까지 모두에게 좋은 경험이 되었다.

하지만 황태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라사르를 떠나 수도에 도착하자마자 에이든과 존은 성배를 가지고 황궁으로 향했다.

에바는 부모님과 함께 호텔에 방을 잡았고 나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칼립소 공작을 이렇게나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그를 쫓아 라사르까지 다녀오다니 말이야.”

내 집 앞에는 황궁에 있어야 할 황태자가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에게 새로 이사한 집 주소를 알려 준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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