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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12화 (113/134)

<112>

에이든의 입술이 내 입술을 머금었다. 두툼한 입술 감촉이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느껴졌다. 조심스럽지만 어딘가 거친 입맞춤이었다.

손끝이 닿는 것보다 더 짜릿했고 조금은 민망하고 부끄러웠다.

가장 놀라운 건 선명하게 전해지는 에이든의 존재였다.

온도, 체취, 맞닿은 살갗의 느낌. 그리고 얕은 숨까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존재가 이렇게 밀접하게 전해진 건 처음이었다.

내 심장박동이 이토록 빠르게 뛴 것도 처음이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 바람에 그가 전하는 감각이 지나치게 또렷했다.

평소에 내가 숨을 어떻게 쉬었더라. 손은 어디에 뒀더라.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앞에만 서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던 에이든처럼 나 또한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에이든이 혀끝으로 내 아랫입술을 쓸었다.

움찔하고 반사적으로 입술을 벌리자 그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깜짝 놀란 내가 뻣뻣하게 굳어서 어쩔 줄 모르자 에이든이 눈을 접었다.

나와 달리 퍽 여유로운 듯한 모양새라 눈웃음이 짓궂게 느껴졌다.

“…아…….”

에이든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그러곤 엄지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문질렀다.

말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입을 떼야 하는지 모르겠다.

보통 이럴 때 어떤 말로 물꼬를 틀지? 아니, 에이든은 왜 나와 달리 여유로워 보이는 거지?

심장이 세차게 뛰어서 그런지 얼굴이 터질 것처럼 뜨거워졌다.

에이든과 눈을 마주쳐야 하는데 그게 너무 어려웠다. 쑥스럽고 부끄럽고 민망하고… 결국 내가 선택한 건 하나였다.

“셀레나?”

에이든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손에 얼굴을 묻자니 손이 떨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쿵. 쿵. 쿵. 쿵. 옷자락 위로 나만큼이나 정신없는 심장박동이 전해졌다.

그제야 에이든이 여유로운 게 아니라 태연한 척하는 거란 걸 깨닫게 되었다.

그 또한 쑥스러운지 어쩔 줄 몰라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몸이 뻣뻣하게 굳은 게 닿아 있는 이마를 통해 고스란히 전해졌다.

“휘이익.”

시장 상인들이 휘파람을 불며 웃음을 터트렸다.

“좋을 때다. 좋을 때야.”

그들의 말에 에이든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말했다.

“에이든. 어서 숙소로 가자.”

이곳에 더 있다간 심장이 터지든 얼굴이 터지든, 어디 하나는 문제가 생길 것 같다.

에이든도 마찬가지인지 우리는 녹슨 구체관절인형처럼 삐그덕거리며 숙소로 갔다.

* * *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데이트라도 하고 오실 줄 알았는데.”

숙소에 가자 존이 우리를 맞았다.

대화도 없이 묵묵히 숙소까지 와서 간신히 진정되는가 했는데, 존의 무심한 한 마디에 나도 에이든도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어라. 둘 다 얼굴이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었어요?”

“무슨 일은. 성배는?”

“방에요. 셀레나 씨도 보실래요?”

“좋아요.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거든요. 크루커스와 많이 비슷한가요?”

“크기도 문양도 많이 달라요. 보시면 크루커스가 너저분한 짝퉁에 불과하단 걸 알 수 있을 거예요.”

“누가 고고학자 아니랄까 봐 존, 이 녀석 방 한 칸을 아예 성배에 내어줬어. 그래놓곤 내 방에 짐을 푸는 거 있지?”

지난 몇 달간 존과 출장 간 일이 잦더니 에이든은 그가 많이 편한 모양이었다.

에이든이 진심으로 억울해하는 표정이라 웃음이 터졌다.

“생활하다가 실수로 건드려서 깨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요. 그렇다고 거실에 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왜 못 해. 내 방에 침범하는 건 되고 거실은 안 될 이유가 뭐야?”

“글쎄요. 혼자 자는 건 좀 쓸쓸하기도 하고…….”

분명 존은 장난삼아 한 말인데 에이든은 치를 떨며 그를 지나쳐 방으로 안내했다.

에이든이 앞장서자 존이 내게 소리 없이 말했다.

‘은근히 놀려먹는 재미가 있어요.’

사회생활 할 때의 에이든은 장난을 받아주는 타입이 아닌 듯한데 생각지 못 하게 존이 그를 골리는 요령을 터득한 것 같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에이든을 쫓았다.

에이든이 방문을 열자 존이 왜 방 하나를 통째로 내어줬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성배는 상상했던 이상으로 거대한 호리병이었다.

높이는 못해도 내 쇄골까지 왔고 좁고 기다란 목이 아닌 둥근 단지 부분은 두 팔로 안는 게 불가능해 보였다.

“성배에 쓰인 유약과 제작공법, 디자인 양식을 보았을 때 건국 이전에 만들어진 게 확실합니다.”

존이 이런저런 설명을 해 주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성배에는 처음 보는 사람을 압도시키는 위용이 있었다.

단순히 크기가 커다래서 그런 게 아니다.

요즘 시대엔 보기 힘든 웅장한 디자인과 물건 자체에 흐르는 기이한 기운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흐르는 푸른색은 끝없는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짙은 빛깔이었고, 빛이 닿는 부분은 어두운 가운데 밝게 빛났다.

반질반질한 유리 같은 질감이었지만 표면에서 전해지는 무게감이 어마어마했다.

웅장한 황금빛 장식과 투박한 듯 섬세한 아름다움까지… 도무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레나? 셀레나?”

“어, 어어? 응. 왜?”

“네가 너무 넋을 잃었길래.”

“아… 으응.”

“이해합니다. 저도 처음 성배를 보았을 때 그랬으니까요. 압도되는 아름다움이 있죠. 유려한 곡선의 미 하며, 고대의 장식이 주는 시대적 무게감은 또 어떻고요,”

아니, 아니다. 성배는 분명 탄성이 절로 나오는 모양을 했다.

하지만 내가 진짜 정신을 빼앗긴 건 다른 부분이다. 그건…….

‘심장이 두근거려서 숨을 못 쉬겠어.’

조형물을 바라보는 것뿐인데 이상하리만치 가슴이 벅차올랐다.

스스로도 이해되지 않는 감정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들끓는다.

가슴이 쿵, 쿵 뛸 때마다 박동에 맞춰서 영혼이 흔들리는 것 같다.

입 안이 마르고 이해할 수 없는 무언가가 머릿속을 헤집는다.

그게 어떤 건지, 무얼 말하며 왜 그러는지는 모른다. 다만 딱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탁.

성배의 표면에 손을 얹었다.

쓰다듬는 것도, 문지르는 것도 아닌 투박하게 손바닥을 올려놓은 게 전부지만 충분하다는 직감이 들었다.

“셀레나 씨?”

“셀레나, 뭘 하는-.”

에이든의 말이 마무리 지어지기도 전에 이 거대한 호리병 안에서 표면에 흐르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에너지가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그건 말라붙은 폭포가 다시 물줄기를 쏟아내기 시작한 것과 같았다.

공기 중에 흐르는 기운이, 아니, 살갗에 선명히 전해지는 입자의 흐름이 달라졌다.

성배 안에서 쿠구궁하는 소리가 들렸다. 땅이 갈라지듯 거대한 소리지만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아득하기만 했다. 그러고 나자 호리병 입구에서 황금빛 물줄기가 샘솟았다.

“끄허업.”

경악에 찬 존이 이상한 소리를 내더니 입을 틀어막았다. 에이든이 낮게 숨을 들이켰다.

나는 강물처럼 졸졸 흐르는 황금빛 물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뒤늦게 손을 뗐다.

손을 거두었음에도 성배는 계속해서 물을 뿜어냈다. 황금빛 물이 호텔 카페트를 적셨다.

하지만 우리 셋 다, 수건을 가져와서 바닥을 닦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물줄기가 조금씩 줄어들다가 멈추는 걸 넋이 나가 지켜보기만 했다.

한참 뒤 성배가 성수를 만들어 내길 멈추자 뒤늦게나마 정신이 들었다.

성수가 넘치지 않을 뿐, 성배 안에는 빛을 뿜어내는 성수가 가득 차 있었다.

“…혹시나 해서 성배를 옮기기 전에 널 부른 거였는데 탁월한 선택이었어.”

넋이 나간 에이든이 중얼거렸다. 나도 얼이 빠져서 적잖게 당황해 대답했다.

“…나도 이렇게 반응할 줄은 몰랐어. 그냥 손을 얹어야 할 것 같아서 그런 거였는데…….”

“예상은 했는데 이렇게까지 반응할 줄은 몰랐습니다.”

“뭐? 예상했다고?”

에이든이 고개를 휙 돌려 존을 노려보았다. 존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성기사시잖아요. 그러니 반응하는 겁니다.”

“자세히 좀 말해 봐.”

“타고나길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난 이들을 두고 남자는 성기사, 여자는 성녀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둘 사이엔 하나의 차이가 있었죠.”

“뭔가요?”

“신분이요. 성기사와 달리 성녀는 높은 신분의 여성만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녀는 아주 희귀한 존재였던 겁니다.”

“그럼…….”

존은 얼떨떨한 내게 쐐기를 박았다.

“셀레나 씨. 당신은 성녀입니다.”

“크루커스와 공명한 건 저 하나가 아닌걸요. 에스타리온 백작가 사람들에겐 모두 성기사의 자질이 있어요. 그러니 저 말고도 공명할 수 있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

덜컥 겁이 났다. 제약회사를 운영하는 내가 성녀라는 건 스스로도 받아들이기 힘들거니와, 이 사실이 알려졌을 때 회사에 실이 될지 득이 될지 분별하기 힘들었다.

“성배와 달리 크루커스는 신성력을 지닌 모든 이들에게 공명하도록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성배는 그 조건이 까다롭죠. 남을 돕고자 하는 선량한 마음을 지닐 것, 날 때부터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날 것. 그냥 생각하기엔 별것 아닌 조건 같지만 잘 살펴보면 아주 까다로운 조건이란 걸 알 수 있습니다.”

존이 숨을 가다듬은 뒤이어서 설명했다.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경우가 몇 없는데, 크루커스에 제대로 공명하지 않는 성기사의 자질을 갖춘 사람은 더 드무니까요. 고대엔 여기에 높은 신분을 지닌 여성이란 조건을 더 해서 성배로 인한 혼란을 막았습니다. 그러니 셀레나 씨. 당신은 성녀입니다. 그건 분명한 진실이에요.”

“아…….”

존은 입을 다물고 내가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주었다.

에이든은 성수를 확인하곤 심각한 얼굴을 했다. 그리고 나는 내 손을 내려다보았다.

난 열심히 약을 만들어 파는 사업가에 불과한데… 애초에 신성이 저문 시대에 성녀란 게 의미가 있긴 한 걸까?

‘내가 정말 성녀라면 나를 못 알아본 사람들은 뭐야.’

수많은 사제들을 마주했음에도 그들은 단 한 명도 내가 신성력을 가졌다는 걸 알지 못 했다.

스스로 신성력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 신전의 인준을 받았더랬다.

이단심문소에 들어갔다 나온 성녀라니… 정말 웃긴 일이다.

‘정말 웃긴 일이야. 신전이 이런데 성녀가 무슨 의미가 있어.’

헛웃음을 터트리는 내게 존이 물었다.

“성녀로 활동할 생각이신가요?”

고개를 들자 나를 염려하는 에이든의 얼굴이 보였다.

성배가 내게 반응한 사실이 알려지면 상황은 또 급변한다.

신전을 친 결정적인 역할을 한 내가 신전에 힘이 실어 줄 수도 있고, 황실에서 나를 옭아매려 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난 신전과 함께 축출되기 싫어요.”

“하아.”

에이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게 제 의견을 강요하지 않으려 가타부타 다른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내심 긴장을 많이 한 듯했다.

심란해서 얼굴이 굳었지만 에이든을 안심시키려 억지로나마 입꼬리를 올렸다.

왜인지 이 일이 가볍게 끝나진 않을 것 같아서 가슴이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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