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
존은 어울리지 않게 욕을 퍼부었고 에이든은 인상을 찡그린 채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뭐가 쉽게 풀린다 싶었다. 그렇다한들 금고가 비었을 줄은 몰랐다.
세바스찬에게 조력자가 있었던가? 에이든이 재빨리 머리를 굴리던 때 존이 금고 안에서 쪽지 하나를 발견했다.
“약속을 지키는 날, 이 물건을 내어드리겠습니다?”
“누가 남긴 쪽지야?”
“그건 안 적혀 있군요.”
“금고를 방문한 사람을 확인해야겠네.”
에이든은 허무한 마음에 바닥에 주저앉은 존을 내버려 둔 채 은행원을 찾아갔다.
은행원은 에이든이 올라오자 아득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금고는 확인하셨나요?”
“금고 방문기록부는 어디 있지?”
“예? 방문기록부는 왜…….”
“금고가 텅 비었더군. 도난이 아니라면 다른 방문자가 가져갔던 말일 테니 확인을 해야지.”
“그건…….”
은행원이 어쩔 줄 몰라 눈만 데구루루 굴리자 에이든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혹시나 개인정보니 어쩌니 해서 거절하는 거라면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거다. 알다시피 세바스찬이 숨긴 물품은 어마어마한 범죄에 연루된 상황이라 유도리 있게 처리할 사안이 아니거든.”
“아. 자, 잠시만요!”
에이든이 단호한 어조로 상황을 설명하자 은행원은 얼른 서류를 가지고 왔다.
마침 존도 터덜터덜 사무실로 올라왔겠다, 둘은 함께 서류를 살폈다.
“마지막으로 들른 사람은 빈센트 구즈만이네. 그 전에 방문한 건 세바스찬이나 놈의 조카뿐이고. 빈센트 구즈만이 어떻게 세바스찬의 금고를 방문했던 거지?”
“그분이라면 그…….”
목을 쭉 빼고 주변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은행원이 그들에게 작게 속삭였다.
“저희 은행의 대주주세요. 그래서 어쩌다 보니 열어드리게 됐었죠.”
“개나 소나 다 열어 주고 개판이군. 빈센트 구즈만에 관한 정보가 있다면 모두 말해 보도록.”
개인정보까진 말하지 않으려던 은행원은 에이든이 보이는 무시무시한 기세에 질려서 모든 서류를 넘겼다.
십 분 뒤, 에이든과 존은 마차를 빌려 타 빈센트 구즈만의 집으로 향했다. 에이든이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존에게 물었다.
“성배를 찾았으면 그걸 신전의 소유로 만들어 공개할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개인금고에 감춘 걸까?”
“성배를 공개한들 의미가 없어서 아닐까요?”
“하긴. 성배는 성녀만이 쓸 수 있는 물건이라 세바스찬이 찾아봐야 별 의미가 없었겠네.”
“예. 성배를 찾았을 정도면 크루커스가 가짜란 것도 알았을 테니 시에나가 진정한 성녀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죠.”
“성녀가 없는데 황실은 성배를 찾아 뭘 하겠단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해할 수가.
에이든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잘 모르는 백성들조차 신성 시대가 저물고 있단 걸 안다.
이런 시대에 성배를 찾는 게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되지 않는다.
백성들에게 더 이상 성배니 신성이니 하는 것들이 의미 없다는 걸 보여 주는 용도라면 아주 적합하겠지만.
‘신전의 힘을 완전히 빼는 용도로 쓰는 건지도 모르겠네.’
신전이 부패로 인해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한 이때에 성배가 등장해서 믿음에 가치가 없다는 걸 보여 준다면 신전은 말 그대로 빈사 상태가 될 테다.
그때 존이 이야기를 꺼냈다.
“병마에 고통받는 가엾은 백성과 죄악의 종살이로 비탄에 잠긴 이들을 구하리라. 성녀 전설의 내용이죠. 저는 성녀 전설이 예전처럼 강력한 힘과 신성을 지닌 이의 등장으로 읽혀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혁신이요. 시대가 바뀐 만큼 새로운 성녀가 필요합니다. 그녀는 우리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나타날 겁니다.”
존은 그 이상은 자기도 잘 모르겠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에이든은 병마에 고통받는 이들을 구한다는 게 셀레나를 말하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하품했다.
그는 성녀니 뭐니 하는 것들엔 관심 없었다. 그저 셀레나가 보고 싶을 뿐이다.
* * *
대저택에 거주할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빈센트 구즈만의 집은 생각했던 것보다 소박했다. 에이든은 조그만 2층집 문을 두드렸다.
똑똑. 투박한 노크를 하자 안에서 하녀가 나왔다.
“누구시죠?”
“여기가 빈센트 구즈만의 집이 맞는가?”
“주인 어르신을 찾으시는군요. 무슨 일이신가요?”
“에이든 칼립소 공작이다. 빈센트 구즈만에게 긴히 볼일이 있으니 안내해 줬으면 좋겠군.”
하녀는 수도에서 온 귀족의 방문에 떨떠름한 얼굴로 안내해 주었다.
응접실도 없는 작은 집이라 에이든과 존은 거실에서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잠시만요. 주인 어르신은 마님을 달래고 계세요.”
존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그녀가 설명을 덧붙였다.
“마님께서 많이 편찮으시거든요. 어려서 아가씨를 잃어버리셨는데 그 충격으로 평생 발작을 보이세요.”
“아… 구즈만 씨가 고생이 많으시겠군요.”
“주인어른께서 이런 작은 집에 사시는 것도 어려서 잃어버린 아가씨가 집을 찾아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옛날 저택의 증축공사 때 잠시 머물던 별장에 쭉 사시는 거랍니다.”
“저런. 저도 아이가 있어서 그 마음이 이해가 가네요.”
존이 계속 하녀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자 에이든이 나섰다.
“구즈만 씨에게 세바스찬의 일로 찾아왔다고 하면 될 거다.”
하녀가 자리를 비우자 존이 안 됐다며 한숨을 삼켰다.
“아이를 잃어버렸다니 그것만큼 끔찍한 게 없는 것 같습니다.”
“에이미를 알게 된 지 1년도 안 됐는데 제법 부모가 된 것 같네.”
“그 애를 처음 보는 순간 제 세상이 뒤바뀌는 걸 느꼈죠. 자식은 그런 거더라고요.”
“그런가. 자식이 그런 거라면 에스타리온 백작은 어떻게 그런 짓까지 한 걸까.”
시에나에게 속아서 큰 오해를 하고 분노에 찼다지만, 10년이 넘도록 금이야 옥이야 키웠는데 셀레나를 이단심문소에 밀어 넣었다.
에이든은 부모에 대한 기억이 없어서 그리고 아이가 없어서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셀레나가 느꼈을 절망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그는 아직도 기억했다. 이단심문소에서 막 나온 셀레나의 눈빛을.
세상의 모든 절망을 경험한 듯 거무죽죽하게 죽은 눈이었다.
어떻게 부모가 자식을 저렇게 만들 수 있나 싶을 정도로 끔찍했더랬다.
“이런 부모도 있고 저런 부모도 있는 거니까요.”
“에스타리온 백작은 부모가 아냐. 이단심문소에 넣는 순간 부모가 되길 포기한 거니까.”
에이든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빈센트가 나타났다. 에이든과 존이 일어나 그를 맞이했다.
“저를 만나러 오셨다고요?”
“인사하지. 에이든 칼립소다. 세바스찬의 금고를 보고 찾아왔지.”
“금고요?”
“소식을 못 들었나 보군. 전대신관 세바스찬 무어는 현재 아동유괴사주 등 여러 혐의로 체포되었고 녀석의 금고는 압수되었지. 금고를 확인하니 그쪽이 남기고 간 쪽지가 발견되었고.”
품에서 꺼낸 쪽지를 보여 주자 빈센트는 아차 싶은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남긴 게 맞습니다. 헌데 아동 유괴라뇨? 혹시 피해자가… 아닙니다.”
빈센트의 기색이 심상찮아 에이든과 존은 시선을 교환했다. 무슨 사정이 있는 게 분명했다.
“혹시 세바스찬 사제와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물품은 왜 가져갔는지 알려줄 수 있나?”
“…세바스찬 사제가 저를 찾아온 건 10년 전 겨울이었습니다. 은행의 지하 금고를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지하 금고를?”
“라사르 지역 은행의 금고는 아무나 쓸 수가 없습니다. 계좌에 일정 금액이 들어 있어야만 하는데 액수가 많아서 어지간한 부자들도 감당하기 힘들어하죠. 세바스찬 사제는 제겐 그만한 돈이 없다며 대주주인 제게 따로 도움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세바스찬에게 금고를 만들어 주었군. 그 대가로 뭘 요구했지?”
“어려서 잃어버린 딸이요. 신전은 전국 각지에 고루 분포되어 있잖습니까. 그래서 어려서 잃어버린 딸을 찾는 데 도움을 달라고 청하였죠.”
순간 에이든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시선이 빈센트에게 못 박혔다.
에이든은 설명을 이어가는 빈센트의 이목구비를 하나하나 뜯어보다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센트는 에이든이 보이는 반응이 자신을 비난한다고 여겼는지 흥분해서 설명했다.
“세바스찬은 금고만 사용하고 제 딸을 찾는 건 게을리하였습니다. 대신관씩이나 되면 전국에 있는 신전을 이용해 아이의 초상화라도 돌릴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홧김에 물건을 빼돌렸다?”
“예. 그게 작년 일입니다. 세바스찬이 여태 물건을 빼돌린 걸 모를 줄은 예상치 못했지만요.”
“그랬군. 딸을 잃어버렸다니 유감이야. 그리고 세바스찬의 금고에 있던 물건은 황실 소유다. 그만 내줬으면 하는데.”
“황실 소유라고요? 대체 세바스찬 그놈은 무슨 짓을 저지르고 다닌 겁니까? 아동유괴사주도 놀랄 일인데… 물건은 저희 집 창고에 있습니다.”
창고에 있단 말에 존이 눈을 반짝거리며 나섰다.
“아. 그럼 제게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예. 메리. 이분께 창고를 안내해드려라.”
빈센트가 명령하자 하녀가 존을 데리고 창고로 갔다.
에이든은 존만큼 성배에 관심이 있는 건 아니라 빈센트와 대화를 이어나갔다.
“헌데 피해 아동은 누구입니까? 혹시 납치 사주가 16년 전은 아니었습니까?”
“자네 딸은 아닐 거야. 피해자는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딸이니까.”
“아… 그랬군요.”
빈센트가 실망일지 다행일지 모를 얼굴로 한숨을 내쉬자 에이든은 머리가 지끈거려 오는 걸 느꼈다.
괜한 소리를 해서 자식 잃은 아비 속만 시끄럽게 만드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하지만… 빈센트를 보는 순간 에바가 남장을 한 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닮았다.
의심이 안 될 수가 없었다. 거기다 에바는 고아에 예전부터 부모를 찾고 있었다.
‘이건 합리적 의심이야.’
사람에게 큰 관심을 주지 않는 편이었지만 에바는 조금 특별했다.
셀레나의 하녀이기도 하지만 셀레나와 가장 잘 지내는 친구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녀석이 셀레나에게 큰 의미인 걸 알기 때문에 고마운 마음에라도 에바에게 잘해 주고 싶었다.
빈센트 구즈만인지 구니스인지 하는 녀석과 소름 끼치도록 닮기도 했고.
“딸을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린 건지 말해 줄 수 있나? 신전을 이용하진 못해도 레이온 제약을 통해서라면 초상화를 돌릴 수 있을 것 같은데.”
근처에 레이온 제약 지부가 있을까? 셀레나 말로는 전지부에 에바의 초상화와 기본사항을 적은 서류가 배포되었다던데.
에이든은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하는 게 아니길 바라며 빈센트에게 설명을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