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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08화 (109/134)

<108>

하룻밤 만에 20대 아가씨가 노인이 되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그 믿을 수 없는 일 때문에 황실 마법사들과 신관들이 총출동했다.

그들은 시에나를 두고 여러 검사를 시행한 끝에 모든 게 크루커스 때문이라고 상황을 정리했다.

시에나는 외모만 늙은 게 아니었다.

안의 장기와 뼈까지 나이 들어 살날이 머지않았다는 판정을 받았다.

“말도 안 돼! 내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니…….”

크루커스를 사용한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으로 나타날 줄은 몰랐다.

거기다 근래엔 크루커스와 공명하지 않아서 부작용에서 자유로워지고 있다고 믿었다.

시에나는 고통에 차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맘 편히 괴로워할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간수들이 그녀를 질질 끌고 다시 감옥으로 밀어넣은 탓이다.

봄의 끝, 여름의 시작이 되어 후덥지근해지기 시작했지만 이단심문소의 지하 감옥은 한겨울처럼 춥고 시렸다.

“나, 난 병이 든 거야! 의사를 불러 줘! 의사를 불러 달란 말이야!”

“거 조용히 좀 하쇼! 저주받은 주제에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간수는 철창을 쾅 내리쳐 경고했다.

그때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들리더니 루카스가 모습을 나타냈다.

루카스와 함께 온 이단심문소 사제가 간수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간수와 사제가 자리를 비켜 주었다.

루카스를 발견한 시에나는 입을 쩍 벌리더니 단박에 철창에 매달렸다.

“…아버지? 아버지 맞죠?”

“…….”

루카스는 대답 없이 시에나를 응시했다.

감옥 안이 어두워서 어둡게 내려앉은 눈빛이 드러나지 않았다.

“저예요, 시에나! 아버지, 저 기억하시겠어요? 시에나예요! 아버지 딸, 시에나!”

“얼굴이 많이 변했구나.”

“얼굴은… 제가 지금 몸이 아파서 이렇게 됐지만… 신관들이 뭐라하건 믿으시면 안 돼요. 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 어려서부터 제가 얼마나 아버지를 사랑했는지 기억하시죠?”

“그래. 기억하다마다. 줄리아에겐 한 치의 애정도 없었지만 너는 꽤 예뻐했었지.”

“아버지…….”

시에나는 지저분한 소매로 눈가를 슥슥 문질러 닦았다.

‘아버지’라고 부르는 그녀의 음성은 애틋하기 그지없었다.

루카스가 창살을 향해 걸어갔다. 시에나와 그의 거리가 좁혀졌다.

“아버지께서 깨어나기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에스타리온 백작가에 있을 때 종종 큰아버지 대신 제가 아버지께 성수를 드리곤 했어요. 그때마다 잠든 듯 누워 있던 아버지를 보며 얼마나 슬펐는지 몰라요.”

“아버지라… 아버지.”

“네. 아버지. 제 아버지시잖아요. 아버지께서 한 달에 한 번씩 저를 찾아오셨던 걸 기억해요. 마지막엔 그렇게 되었지만… 그 일로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했는지 아버진 모르실 거예요.”

루카스는 저보다 더 늙어 버린 딸의 얼굴을 살폈다.

셀레나와 많이 닮았다고 했는데 이렇게 돼 버린 이상 시에나의 얼굴은 영원히 볼 수 없게 되었다.

하지만 상관없다. 가족 놀이를 하려고 온 게 아니니까.

“네 어미와의 일과 너는 무관하기에 너를 아꼈다. 매달 거액의 양육비를 내어주었고 네 나이가 차면 엄청난 지참금을 쥐여주더라도 몰락 귀족과 짝을 지어 그럴듯하게 살도록 만들어 줄 생각이었지.”

시에나의 얼굴에 희망이 스쳐 지나갔다.

제 아비가 저를 구해 흉측하게 변한 외모도 원래대로 되돌려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그날 나를 공격한 게 네 어미였지만 너를 미워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네가 가문에 한 짓을 확인하니… 너를 내 딸이라 인정한 게 끔찍할 지경이었지.”

“끔찍…하다뇨?”

“네가 내 딸이라고 주장했다면 진심으로 너를 아끼고 사랑해 줬을 분이셨다! 네 큰아버지였고 내 형님인데 어떻게 그런 추악한 거짓말을 한 채 다른 사람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게냐!”

“아, 아, 아니에요!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으셨는지 몰라도-.”

“닥쳐라! 내 딸이길 거부한 건 너다. 시에나. 네가 먼저 다른 이의 딸이 되길 바랐으니 나는 네 소원대로 너와의 부녀관계를 끊고자 한다.”

“아, 안 돼요. 그러지 말아요!”

“나는 더 이상 네 아버지가 아니다. 그리고 너는 내 딸이 아니지. 그러니 네가 귀족의 핏줄을 가졌단 이유로 편안한 감옥 생활을 할 일은 없을 게다.”

“아버지, 오해하고 계신 거예요! 시온이 또 이상한 소리를 한 모양인데 다 거짓말이에요. 속으시면 안 된다고요!”

시에나의 새빨간 거짓말을 들은 루카스는 진저리가 난 얼굴로 고개를 내저었다.

철창 밖으로 시에나의 손목이 쑥 나오자 그는 더러운 것을 피하듯 뒷걸음질을 쳤다.

그 모습에 시에나는 충격에 잠겨 숨을 들이켰다. 그녀가 믿을 수 없단 듯 그를 불렀다.

“아버지… 저예요, 저 시에나라고요.”

루카스가 반응하지 않자 시에나는 별안간 창살을 붙잡고 흔들었다.

“제가 아무리 실수를 했어도 자식의 잘못을 용서해 주는 게 부모 아닌가요? 어떻게 저를 버리려고 하세요! 제대로 키우지 않았으면 지금이라도 아버지 노릇을 하셔야 할 것 아니에요!”

소리를 지르는 그녀에게선 광기마저 엿보였다.

그녀는 사람보단 짐승에 가까웠다. 두 눈은 시뻘겠고 머리는 헝클어진 채 악을 썼다.

“아버지 노릇을 하란 말예요! 제가 불쌍하지도 않아요?”

두 눈으로 보고도 끔찍해서 믿기 힘든 광경에 루카스는 입을 쩍 벌렸다.

끔찍한 짓을 저질렀다곤 하지만 사람이 이렇게 추악해질 줄은 상상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루카스는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그대로 몸을 돌렸다.

더는 보고 있기 힘들었다. 그는 미련 없이 감옥을 빠져나왔다.

“아버, 아버지! 아버지, 제발요! 이렇게 빌어요, 저 좀 도와주세요! 네?”

시에나는 악을 쓰다가 태도를 바꿔 빌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해서 루카스가 결정을 번복하진 않았다.

쾅!

루카스는 거칠게 감옥 문을 닫고 나갔다.

발걸음은 점점 멀어져갔고 시에나는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지르다가 창살에 얼굴을 기댔다.

“흑. 흐으윽.”

처음부터 루카스의 딸로 나타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죽었다고 생각해서 셀레나의 자리를 빼앗기로 했었다.

하지만 모두가, 루카스를 비롯해 셀레나까지 입을 모아 말했다.

네가 루카스 에스타리온의 딸로 나타났다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었을 거라고.

처음엔 헛소리 같았다. 가난한 대장장이의 딸과 귀족 사이에 난 딸이 어떻게 행복해진단 말인가. 귀족사회에서 자신을 끼워 줄 리가 없는데.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고 나니 그 삶도 가슴이 시리도록 행복할 거라 믿어졌다.

신분이야 어떻든 돈 걱정 없이 살 테고, 그렇게 지내다 보면 루카스가 깨어나 귀족과 짝을 지어 평생 떵떵거리며 살도록 했을 거라지 않는가.

“그러지 말걸…….”

셀레나의 몫을 탐내지 말걸.

마냥 웃고만 있기에 순진한 계집애라 생각했다. 그땐 자신이 건드린 게 사자 새끼인 줄 꿈에도 몰랐다.

최소한 크루커스라도 쓰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노인이 되어 버리다니…….

시에나는 뒤늦게 후회했다. 제 잘못에 대한 반성이나 회한 따윈 없었다.

오늘의 비참한 꼴을 자신이 만들었다는 데서 오는 비통함이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끔찍했다. 처참하다고밖에 표현하지 못할 만큼 참담했다.

젊음이 사라졌고 삶이 지워졌다. 곧 재판에 넘겨져 결과가 나오면 끔찍한 벌을 받게 될 테다.

시에나는 제 남은 시간에 끔찍한 일밖에 없으리라 확신하곤 바닥에 웅크려 흐느꼈다.

이곳은 지옥이었다. 벗어날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자신이 만든 지옥. 그리고 지옥의 가장 깊숙한 곳에 처박힌 이는 자신이었다.

* * *

“은행 금고를 열어라. 세바스찬 무어가 숨긴 황실 보물이 금고에 놓여 있단 제보를 받았다.”

셀레나에 대해 이야기할 땐 머저리가 따로 없더니 일을 할 땐 또 다른 사람이 됐다.

전쟁터에서 공적을 쌓아 귀족이 되었다더니, 보통의 사람에게선 보이기 힘든 단단한 기백과 찌를 듯한 기운이 상대를 주눅 들게 만들었다.

사람은 참 다면적이란 말이야. 존은 에이든을 보며 그렇게 평가 내렸다.

“저희 은행의 원칙 상 본인 혹은 대리인 서명을 가진 분이 아니시면 절대 열어드릴 수 없습니다.”

“원칙? 범죄인의 은닉에 가담하는 게 너희 은행의 원칙인 건가?”

“은닉에 가담한 게 아니라 그저 고객의-.”

“세바스찬 무어는 더 이상 고객이 아니다. 황실에선 그놈의 경제적 활동에 대한 모든 권리를 박탈하였고 놈이 가진 재산은 모두 국고로 환수시키기로 하였지. 이 이상 나를 막는다면 황실에 반한다고 여겨 수도의 관습대로 처리해 주마.”

그렇게 말한 에이든은 허리춤에 달린 검 손잡이에 슬쩍 손을 올렸다.

은행원은 하얗게 질려 후닥닥 금고 열쇠를 찾으러 갔다.

“수도의 관습이요?”

수도의 관습에 말을 안 들으면 사람을 베는 행위가 있을 리 만무하다.

하지만 이곳은 수도에서 떨어진 라사르였다.

수도의 문화를 알 리가 없으니 대충 둘러대도 속아 넘어가서 겁을 먹을 수밖에 없다.

“얼른 성배를 찾아서 내려가자. 이 빌어먹을 출장 좀 그만하고 싶어.”

“저도요. 토끼 같은 딸이 커가는 모습도 못 보고 내내 집 밖만 도니 죽을 맛이네요.”

“그런 놈이 처자식 냅두고 외국을 갔냐?”

“베키가 임신한 줄 알았으면 절대 떠나지 않았을 거예요. 우리 에이미가 태어날 때 곁에 있어 줬어야 했는데… 에이미에게도 아버지가 필요했을 테고…….”

성배를 찾는 내내 보이던 자신감은 어디 가고 이번엔 존이 우울한 기색을 해 보였다.

다행히 때맞춰 은행원이 돌아온 덕분에 존이 울적해하는 걸 더 보고 있지 않아도 되었다.

“안쪽으로 가시죠.”

은행원은 그들을 지하로 안내했다. 지하엔 수십 개의 문이 나 있었다.

문에는 저마다 숫자가 새겨져 있었는데 은행원은 10번 문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세바스찬 무어 씨의 금고는 10번입니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가면 금고를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그럼.”

열쇠를 건네준 은행원은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고 에이든과 존은 문 안으로 들어갔다.

지난 세월 동안 성배를 찾아온 존이 깊이 숨을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했다.

“긴장되냐?”

“그럼 안 되겠습니까?”

“얼른 찾고 돌아가자.”

“자, 잠시만요… 잠시만… 숫자 10까지만 세고요.”

“10, 9, 8, 4, 2, 1. 다 됐어. 연다.”

에이든은 숫자를 건너뛰어가며 세곤 금고에 열쇠를 꽂아 넣었다.

존이 한껏 상기된 얼굴을 문질렀다.

철컥.

금고 잠금이 풀렸다. 성배를 추적해 온 존을 배려해 에이든은 금고에서 손을 떼곤 뒤로 물러났다.

존은 손을 덜덜 떨며 금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

“이게 뭐야.”

금고가 비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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