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내가 자신감이 없어서 그래. 용기가 없어서, 네 원망을 감당할 거란 확신이 들지 않아서.”
“그게 무슨 소리야.”
“널 못 믿어서가 아니야. 너를 정말로, 진심으로 좋아하고 있어. 그래서 겁이 나. 널 좋아하기 때문에 내 존재가 너를 힘들게 하진 않을까. 왜냐면…….”
“네가 노예 출신이라서?”
“아니. 제국의 계급사회를 잘 알아서야.”
에이든이 자신이 노예 출신이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내가 어리석고 갑갑할 거야. 나도 알아. 지금 등신처럼 굴고 있단 거. 그런데 널 좋아할수록, 너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릴수록 이건 아니다 싶어져. 너도 알 거야. 아직 우리 사회는 여성의 지위가 남자에 의해 정해진다는 걸.”
“그래서?”
“네가 평민과 결혼하면 너는 귀족이겠지만 네 아이는 평민으로 남을 거야. 그리고 영원히 그 계급 안에서 맴돌게 되겠지. 넌 네 아이가 신분의 한계 속에 힘들어하는 걸 보며 슬퍼할 테고… 나와 함께하면 넌 어느 계급에도 끼지 못하는 아웃사이더가 될 게 뻔하잖아.”
“…….”
“귀족들은 너를 기피하고 푸대접할 거야. 평민들은 평민들대로 널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너한테 그런 감정을 알게 하고 싶지 않아. 나는… 난 잘 알아. 계급이 주는 끔찍함이 어떤지. 차별받고 대접받지 못하는 거? 그따위 거에 익숙해지는 건 정말 처참한 일이야.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게 뭔지 알아?”
“…뭔데?”
“가능성이 사라진단 거야. 더 나은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뛰어나도 계급이란 한계에 턱하니 막히거든.”
“그걸 뛰어넘은 게 너잖아!”
순간 화가 치밀어 소리쳤는데 에이든은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별안간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사실 그건 웃음이 아니었다. 고단함이 잔뜩 밴 그것은 자조 섞인 조롱에 가까웠다.
“내가 인정받은 건 그들과 같은 곳에 놓일 수 있단 의미가 아니야. 쓸 만한 사냥개라는 의미지.”
복수 때문에 죽어라 일했지만 에이든과 내 관계엔 현실이 스며들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돈이니 계급이니 하는 것들이 끼어들 수 없는 별개의 영역이었고 그렇게 지내왔다.
그런데 갑자기 차디찬 현실에, 사나운 야생 속에 툭 던져진 것 같다.
내가 그런 기분을 느끼는 건 에이든의 말을 이해해서다.
다른 귀족들이 그를 어떻게 보는지 알고도 모른 척해 왔다.
에이든이 노력한다면 그리고 내가 그의 곁에 있다 보면 언젠가 그런 인식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전쟁을 이끌었고, 무식한 놈이라 욕해서 글을 배우고 공부했어. 검술 대회에 나가 우승도 했고 이번 수사도 성공적으로 이끌어가고 있어. 심문도 성공적으로 이끌었고 성배수색도 곧 끝이 날 거야. 하지만 이건 집 지키는 개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야.”
에이든은 눈을 질끈 감더니 내게 말했다.
“누군가는 타고난 것만으로 당연하다는 듯이 누리는 권리를 난 죽는 날까지 증명해야 할 거야. 나 혼자는 괜찮지만 넌 아냐. 이 굴레에 널 끌어당기기가 싫어. 네가 어떤 사람인데…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데…….”
그가 능력만으로 유례없이 노예에서 귀족이 된 것만으로 이미 증명이 끝난 건데… 에이든은 더 노력하고 증명할 필요가 없었다.
에이든은 나라를 구한 전쟁 영웅이었다. 그가 해낸 영웅적인 행동에 감사해야 했고 존경하진 않아도 존중을 표했어야 했다.
그러나 다들 그를 무시하고 멸시했다. 에이든과 함께 한단 이유만으로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내 이야기를 꺼낸 것도 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에이든은 달랐나 보다.
자신이 겪는 설움을 나도 겪게 하기 싫어서 그랬다는 게 마음 아팠다.
에이든이 어떤 세상을 살아가는지 이제야 제대로 알게 됐다는 게 미안했다.
“셀레나. 내가 비겁하고 나약해서 미안해. 더 뛰어나지 못해서, 더 용기 있고 잘난 놈이 아니라서-.”
“그만. 사과하지 마.”
두 눈에서 눈물이 펑펑 흘렀다.
에이든이 무시당하는데 발끈했지만 그가 직면해야 할 어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무지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혼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외롭고 고단했으면 저런 생각을 했을까.
걸음을 옮겨 그에게 다가갔다. 에이든은 울 듯한 얼굴로 숨을 삼켰다.
“네가 날 싫어하는 게 아닌 거면 됐어. 그런 문제면… 괜찮아.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니까 날 피하지만 마.”
“셀레나.”
“너마저 날 버릴 셈이야?”
“버린다는 게 아니라…….”
“너까지 없으면 난 혼자 남아. 가족도 친구도 없어. 증명해 보여야 한다고? 왜 증명을 해. 네가 이렇게 존재하는데. 편견이니 뒷담화니 그건 다 열등감에 차서 하는 소리니까 죄 비웃어줄 테니 얼마든 하라고 해.”
“…….”
“번드르르한 신분을 가진 남자와 만나면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런 나를 보는 넌 행복해질 수 있겠어?”
“…….”
“넌 노예 출신. 난 이단심문소 출신이야. 그뿐일까. 가족과 연도 끊었고 진통제니 마취제니 하는 것들을 만들어서 화제의 중심에 섰어. 너도 황실에서 중요한 일을 처리하느라 마찬가지잖아.”
나는 에이든이 다른 말을 할 수 없도록 얼른 말을 이어나갔다.
“나한테 필요한 건 인정받는 게 아니야. 능력 있는 사람을 출신만으로 무시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야. 그런 이들의 인정을 받아서 뭐 해. 내가 바라는 건 너야. 에이든, 너라고.”
에이든의 짙은 눈이 흔들렸다. 그의 몸이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코를 훌쩍거리며 그에게 쐐기를 박았다.
“네가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줄 알았으면 진작 우리 관계를 다시 정립했을 거야.”
언제고 그가 그랬다. 책임져라 우겨도 괜찮다고. 그래서 그에게 우기기로 했다.
“날 책임져. 널 좋아하니 책임지란 말이야.”
* * *
“공작님이 셀레나 씨를 무척 사랑하시나 봐요. 그런 생각까지 하시고.”
“에바. 난 에이든이 그런 생각을 하는 줄 꿈에도 몰랐어요. 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어요.”
방에 돌아오자마자 눈물을 쏟아내어 눈가가 따가웠다. 에바가 그런 내 등을 쓸어 주었다.
“두 분이 함께하는 미래를 상상하고 또 상상해 봤기 때문에 그런 현실적인 고민을 하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녹록찮은 삶을 사셔서 그렇기도 하겠지만요.”
“평생 귀족으로 살아서 에이든이 어떤 어려움을 겪을지 미처 몰랐어요. 집을 나온 뒤에도 운 좋게 일이 풀려서… 사실 에이든처럼 현실적인 문제로 고민하거나 힘들었던 적은 거의 없었거든요. 이런 내가 부끄러워요. 에바.”
“그래도 전 모르는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세상 풍파를 알아서 뭐 하겠어요. 마음만 힘들지.”
에바가 지은 표정은 에이든이 보였던 자조 섞인 미소와 똑같았다.
그녀가 내 눈치를 보다가 털어놓았다.
“사실 저는 셀레나 씨의 납치 사건으로 이렇게까지 세상이 시끄러울 수 있는 것도 대귀족 가문이라 그렇다고 생각해요. 평민 아이들이 실종되는 건 흔하거든요. 그게 그리 중요하지도 않으니 부모가 아닌 이상 발 벗고 나서지도 않고요.”
“…맞아요. 인정해요.”
그냥 귀족도 아니고 건국 때부터 자리를 잡아 온 대귀족 가문에서 벌어진 일이라 이렇게 이슈가 될 수 있었다.
어린아이의 목숨이 달린 일인데도 신분에 따라 다른 대우를 받는다는 게 끔찍했다.
이런 세상을 조금이라도 바꾸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가슴이 갑갑해져 와서 다른 주제로 말을 돌렸다.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가벼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에이든의 일로 너무 기운을 뺐기 때문이다.
“참. 에이든과 진지하게 만나기로 했어요. 그래서 집을 분리할 예정이에요.”
“네?”
“마침 공작저 근처에 있는 집을 하나 샀거든요. 혹시 몰라 구입했는데 잘됐지 뭐예요.”
“이제까지 잘 지내시다가 갑자기 왜요?”
“연인이 됐으니 서로에게 좋은 모습만 보이고 싶어서요. 아무래도 한집에 있으면 설렘이나 신비감이 줄어들어서…….”
“아하.”
에바는 놀릴 거리가 생겼다는 듯이 비뚜름하게 웃었고 나는 괜히 민망해서 그녀의 눈을 피했다.
“셀레나 씨 안전을 그렇게나 신경 쓰는데 공작님이 순순히 괜찮다고 하던가요?”
“한집에서 서로 못난 모습 보여서 연애 도중 헤어지길 바란다면 같이 지내자고 했더니 그러라고 하더라고요.”
현실적인 문제로 멀리하려고 하더니 또 이런 부분에선 나를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에이든도 나도 생각을 정리하고 마음을 다시 굳게 먹을 필요가 있었다.
서로를 정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와 함께하기 위해서 말이다.
“에바. 같이 가 줄 거죠? 에이든에겐 따로 사람을 구하라고 말해 뒀어요.”
“물론이죠! 애초에 난 셀레나 씨를 보고 일하러 온 거지 공작님 아래에서 일하려고 온 게 아니거든요!”
“좋아요. 에바만 믿을게요.”
집안일을 해 본 적이 없어서 뭐든 어설픈 나와 달리 에바는 못 하는 일이 없었다.
에바가 있으면 믿고 일에 집중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내 독립이 확정되었다.
* * *
시온은 납치 사건을 수사하는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는 걸 상당히 갑갑하게 여겼다.
그렇기에 에이든이 받아낸 대신관의 진술은 그에게 날개를 달아 준 것과 같았다.
그 이후의 일은 자신이 하겠다며 나서서 직접 압수수색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일기장, 수첩, 하다 못 해 속옷 한 장까지 다 뒤져라.”
그렇게 명령한 시온은 전대신관인 세바스찬의 서랍장을 탈탈 털었다.
세바스찬이 아끼던 컵과 접시는 깨트린 지 오래다.
사제복은 주머니를 뒤진 뒤 바닥에 내던져서 신발자국투성이가 되었다.
시온은 전대신관의 아버지가 무덤에 안고 간 비밀까지 캐낼 기세로 그의 집을 털고 또 털었다.
어디에서도 증거가 나오지 않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어딘가에 숨겨 둔 티끌 하나쯤은 있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여기 어딘가에 있을 거야. 어딘가에.’
엉망이 된 서재 이곳저곳을 오가며 뒤지던 시온은 순간 바닥에서 느껴지는 미세한 이질감에 걸음을 멈췄다. 그는 단박에 카펫을 들췄다.
카페트 아래는 평범한 나무 바닥이었다.
하지만 미세하게 먼지가 닦인 부분이 확인되어 그게 나무 바닥으로 위장한 문을 여는 부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찾았다.”
드디어 쥐새끼가 먹이를 보관한 장소가 드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