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
“어떻게, 생각은 좀 해 봤습니까?”
대신관은 며칠 사이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지저분해진 사제복은 말할 것도 없었고 그간 마음고생이 심했던지 살이 쏙 빠져서 초라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럼에도 그는 눈을 꼭 감은 채 마지막 의지를 다잡았다.
‘입을 안 열겠단 거군.’
이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준비해 온 게 있다.
에이든은 오늘자 신문을 꺼내 대신관에게 던져주었다.
“읽어 보십쇼. 세상 돌아가는 건 알아야 할 거 아닙니까.”
에이든의 말에 대신관은 슬그머니 눈을 떠서 신문을 들춰보았다.
성기사의 날이 벌써 보름 전인데 신문은 신전일로 아직 시끄러웠다.
[13년 전 백작 영애 납치사건의 배후로 대신관 지목되어 파문]
짧은 문장이지만 효과는 강력했다.
대신관이 손을 덜덜 떨며 어지럽게 신문을 넘기기 시작했다.
에이든은 태연하게 오늘 전달된 정보를 풀었다.
“당신 시종을 살해하려는 시도가 있었습니다. 그건 대신관, 당신도 마찬가지고.”
“거짓말하지 말게. 그런 사악한 이간질이라면 더 이상 듣기 싫으니 어서 날 놓아주기나 하란 말이오.”
“거참. 더럽게 안 믿네. 사실을 말해 줘도 말이야. 그럼 이건 믿으실란가. 잘나신 대신관께서 파문당할 예정이란 소식이 전해졌는데.”
“파, 파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대신관직을 박탈당했다고. 윗선을 숨겨 주는 건 좋은데 당신이 충성하는 그놈들은 꼬리자르기를 시작했단 말이죠. 상황이 이렇게 되니 교황이 납치 사건을 공모한 건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드는데 그쪽 생각은 어때? 아, 아직은 대신관이니까, 어.때.요?”
“…….”
아득해지는 대신관의 얼굴에 에이든은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대신관은 혼란스러운 듯 신문을 뒤적거리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흐으으으.”
대신관이 내는 소리는 울음도 비명도 아닌 이상한 짐승소리 같았다.
쾅! 쾅! 그가 책상에 얼굴을 박기 시작했다.
에이든이 다급하게 그를 붙들자 대신관은 발버둥을 치며 악다구니를 썼다.
“내가 어떻게 이 자리에 올랐는데! 어떻게!”
소리를 지르는 대신관에게선 품위도 사제로서의 위엄도 보이지 않았다.
에이든은 그를 꽉 붙들어 의자에 묶어 자해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한참 뒤, 대신관이 한결 진정하고 나자 한숨을 삼키며 물었다.
“무슨 짓을 했길래 그깟 자리 하나 없어졌다고 그러는 거지?”
“…내가 모든 걸 밝히면… 당신은 내게 뭘 줄 수 있소?”
“웃기는 놈이네. 똥물 다 뒤집어쓰고 집 지키다 쓸모가 없어지니 버림받는 개가 될지, 주인과 함께 절벽 아래로 떨어질지 정하는 건 당신 몫이야. 당신이 말 안 하잖아? 나야 에스타리온 백작에게 넘겨서 고문받도록 하면 끝이야.”
“…좋소. 다 말하지. 다만, 내가 모든 걸 털어놓으면… 그자도 함께 감옥에 넣어주게. 이곳에서, 똑같이 말이야.”
“약속하지. 원한다면 그놈을 에스타리온 백작에게 넘겨줄 수도 있어.”
“그렇게 해 주시오.”
상호간에 합의가 이뤄지자 대신관은 진실을 털어놓았다.
누가, 어떻게, 무엇을 시켰는지부터 그자와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까지.
모든 걸 들은 에이든은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것들이 튀어나오자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진범이 성배를 숨겨 왔다고 한다.
* * *
에이든이 북부에서 돌아와 바로 황궁에 갔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걸로 확실해졌다. 에이든이 나를 피하고 있다.
“셀레나 씨. 진정해요. 일이 많아서 황궁으로 가신 걸 수도 있어요.”
“아무리 일이 많다고 해도 벌써 보름째 얼굴 한 번 못 본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워낙 바쁘시잖아요. 신전 일에 납치 사건에.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하실 거예요.”
“에이든이 오면 내가 어떻게 굴지 나도 모르겠어요.”
“공작님을 어떻게 하고 싶으신데요?”
“…멱살이라도 잡고 싶어요.”
“네?”
놀라서 눈을 휘둥그레 뜬 에바에게 다시금 설명했다.
“아무리 우리가 아무 관계가 아니라고 해도 편지 한 통 없는 건 너무하지 않아요?”
말을 하다 보니 감정이 격해져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에바가 진정하라며 찬물을 가져다줬지만 마실 때 잠깐 진정할 뿐, 분노는 더해져갔다.
“속 시끄러운 일이 많은 건 알지만 최소한의 연락은 해 주면 좋겠는데… 이쪽이 보고 싶지 않은 걸까요?”
“…….”
“보름이에요. 보름! 혹시 날 부담스러워하는 건 아니겠죠?”
에이든의 마음이 예전과 같지 않다고 생각하자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에이든에게 희망고문을 하고 있단 걸 잘 안다.
사귀는 것도 약혼한 것도, 무엇 하나 제대로 약속한 것도 없이 그저 복수가 끝나면 함께하겠노라고만 했다.
그러니 스스로도 많이 불안하고 힘들 테다.
‘출신 같은 건 상관없다니까.’
그날 황태자가 했던 말에 에이든도 속이 복잡할 거다.
가볍게 넘길 만한 사안이 아닌데다 에이든 스스로도 제 출신에 힘겨워하니까.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나를 피하는 건 너무했다.
보름이다. 보름.
우리가 재회한 뒤 이렇게 오랫동안 떨어져 있었던 적이 없는데….
에이든이 보고 싶어 속이 갑갑한데 나와 달리 에이든은 내가 보고 싶지도 않은 걸까.
“셀레나 씨…….”
에바가 나를 안아 다독거렸다. 눈을 질끈 감고 감정을 갈무리했다. 괜히 에바만 피곤하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안 좋았다.
“고마워요. 에바.”
“아니에요. 그보다 마차소리가 들려요. 공작님께서 돌아오시려나 봐요.”
“잘됐네요.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눠야겠어요.”
“꼭 이기고 오세요. 셀레나 씨.”
에바의 배웅을 받으며 복도로 나가서 에이든을 맞이했다.
그는 나를 보곤 못된 짓을 한 아이처럼 움찔거렸다. 그 모습에 눈이 가늘어졌다.
“오랜만이야.”
“아, 으응. 잘 지냈어? 어째 살이 좀 빠진 것 같네.”
“아팠거든.”
“아팠다고? 어디가?”
에이든이 한달음에 다가와 나를 살폈다.
나도 내 어깨를 붙잡고 이리저리 안색을 확인하는 그를 살폈다.
그간 일이 많긴 했던지 에이든은 몹시 피로해 보였다.
순간 오늘은 휴식을 취하도록 내버려 둬야 하나 하고 고민이 들 만큼. 하지만.
“몸살. 아주 많이 아팠어. 열이 끓고 헛소리도 꽤 많이 했을 거야.”
“말을 하지. 지금은 어때? 아직도 아파? 갑자기 그렇게 아팠던 거면 몸에 이상이 있는 건지도 모르는데 병원에 가 볼래?”
“이제 괜찮아. 네가 한 번도 집에 돌아오지 않았던 것만 빼면.”
“그건…….”
“나랑 이야기 좀 해.”
“나중에 하면 안 될까? 오늘은 조금 피곤한데.”
에이든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그의 팔을 꽉 붙들었다.
손끝이 희게 질리도록 힘을 주자 에이든이 인상을 썼다.
그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주변을 살피다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에이든이 내 손에서 팔을 빼더니 나와 손깍지를 꼈다.
“그렇게 잡으면 손만 아파. 어디 도망 안 갈 테니까 가자. 할 말이 많은 것 같네.”
“…좋아.”
에이든을 붙잡고 방으로 갔다. 그가 순순히 끌려와서 다행이었다.
나는 당연하고 저택 하인들도 힘으로는 에이든을 못 이기기 때문이다.
마주보고 자리에 앉자 에이든은 내 시선을 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속이 뒤틀렸다.
그의 불편한 얼굴과 어쩔 줄 모르는 태도를 보자 부아가 치밀었다.
“일은 잘되고 있어?”
“그럭저럭. 넌? 매일 신문에 네 이름이 오르내리더라. 진통제 덕분에 더 이상 부패한 사제들에게 매달릴 필요가 없어졌다며 다들 네 칭찬이 자자해.”
“덕분에 조만간 상장할 예정이야. 약품 생산 공장도 또 늘리기로 했어. 새 연구원도 많이 뽑았고.”
“잘됐네.”
“작은아버지가 같이 지내는 건 어떻겠냐고 제안하셨어.”
“백작에게 들었어. 어떻게 하고 싶어?”
“거절했어.”
“…왜? 작은아버지 걱정을 많이 했잖아.”
“무사히 일어나셨고 작은아버지와 함께하다 보면 자연스레 시온과 마주치게 될 텐데 그건 싫어. 은근슬쩍 화해하길 바랄 게 뻔하거든. 그리고 난 이곳이 좋아.”
“여기…가?”
“내 가족은 너야. 물론 작은아버지도 가족이긴 하지만… 내가 함께하고 싶은 건 너인걸.”
에이든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희미한 기쁨과 두려움이 교차하는 표정을 보자 숨이 거칠어졌다.
어째서 저런 모습을 하는 걸까. 그냥 기뻐하고 반가워하면 안 되는 걸까.
“있잖아… 네가 꿈꾸는 미래에 내가 있어?”
“뭐?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그거야 당연히-.”
“가끔은 내가 없는 미래만 생각하는 것 같아서 그래.”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왔다. 그간 쌓였던 스트레스 때문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항상 에이든과 함께 하는 미래를 꿈꾸는데 그는 나를 내버려 두고 훌쩍 떠날 것 같았다.
언제나 겁에 질려 있고 우리가 함께해도 괜찮을지 고민하는 게 갑갑했다.
“내가 우리 관계에 미적지근하게 군 거 알아. 그게 힘들면… 내가 노력할게. 대신 도망가지만 마. 이럴 거면 이단심문소에서 나온 날 왜 찾은 거야.”
“셀레나. 그건… 아냐. 왜 그런 말을 해.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몰라도 난…….”
“설마 내가 황태자와 함께하길 바라는 거야? 네 출신이 천해서? 내게 네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
“왜 아무 말도 안 해.”
“…….”
“에이든.”
“…….”
“에이든!”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는 에이든을 보자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는 어지럽고 가슴은 처참했다.
뚫어지게 에이든을 노려보았다. 그는 변명조차 않았다. 그 모습이 실망스러웠고 우리가 함께할 수 없다는 신호처럼 느껴졌다.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버림받았을 때만큼이나 아득했다. 숨이 턱 막혀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였다. 에이든이 툭 눈물을 터트린 건.
황급히 눈가를 정리했지만 떨어진 눈물이 주워 담아지진 않는다.
줄리아 아래에서 온갖 구박을 받으며 노예살이를 하던 때에도 울지 않던 에이든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