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
“그래서 셀레나 씨를 여태 피하신 겁니까?”
“틀림없이 내가 등신 같다고 생각했을 거야.”
“등신 맞죠. 그깟 신분이 뭐라고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못난 모습이나 보이다니.”
“야, 존 콕스.”
“맞잖아요. 당신이 정말 괜찮은 남자였으면 자신을 노예 출신에 못 배워먹은 머저리라 생각할 게 아니라, 능력만으로 신분을 뛰어넘고 머저리를 탈출하기 위해 노력할 줄 아는 남자로 자부심을 느꼈어야 했어요.”
존의 말에 에이든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괴로움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건 맞아. 하지만 좋아하는 여자 앞에선 누구나 머저리가 되는 법이잖아. 스스로가 초라하게 느껴지고.”
“이해해요. 저도 베키 앞에 서면 한없이 작아지거든요. 거기다 셀레나 씨가 좀 멋집니까? 역사에 기록될 발명을 한 분이잖아요. 그에 비하면 에이든, 당신은 한없이 작은 남자가 맞긴 하죠. 우리 딸이 들고 다니는 인형 같은…….”
존은 에이든의 얼굴이 점점 시무룩해지는 걸 보곤 혀를 쯧쯧 찼다.
칼립소 공작은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었다.
타고나길 영리한데다 승부사 기질이 있어서, 평민 정도만 됐어도 벌써 수도에서 크게 한 자리 차지해 자리를 잡아도 진즉 잡았을 거다.
흉터 때문에 조금 험악해 보이긴 하지만 남자가 보아도 무척 잘생겼고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아 근사하단 말이 절로 나왔다.
그러다보니 어디 가서 빠질 만한 사람은 아닌데, 셀레나 레이온에게 있어서만큼은 바보 등신이 되었다.
“그렇다고 당신이 못난 사람이란 건 아니었어요.”
“알아. 셀레나보다 나은 사람이 될 거라곤 생각 안 해. 다른 사람들이 여자보다 못난 남자라 해도 상관없어. 그냥 내가 부족한 사람이라 걔가 날 좋아하지 않을까 봐 겁이 나서 그런 거였어. 나처럼 못난 놈을 옆에 뒀단 것만으로 셀레나가 나쁜 소리를 들을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세상에. 그게 문제였냐고요.”
이마를 짚은 존은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는 머리가 아파 와서 에이든에게 다른 말을 건네는 대신 근처에 있던 나무 그늘로 갔다.
“좀 쉬었다 가죠.”
“그래.”
마침 나무 아래에 우물이 있었다.
존은 우물에서 물을 길러 입을 축였고 에이든은 지도를 꺼내 주변을 확인했다.
성배 추적은 상상이상으로 힘든 일이었다.
많은 역사학자가 찾아 헤맸지만 여태 찾지 못한 건 다 이유가 있어서인데 괜한 일을 맡아서 고생만 하는 건 아닌가 싶었다.
‘대신관은 이틀 정도 내버려 두면 제 풀에 지쳐서 털어놓을 거고.’
“존. 지형이 달라져서 못 알아보겠어.”
“건국 시대에 만들어진 지도니까요. 지형만 달라진 게 아니라 근처에 있던 성곽도 사라지고 땅 위의 모든 게 변한걸요.”
“근데 넌 대체 성배를 왜 찾는 거냐? 황태자야 황권강화 때문에 그렇다 쳐도 넌 이유가 없잖아.”
“학자로서 갖는 꿈인 거죠. 당신은 꿈 없어요?”
“나? 난…….”
꿈. 존이 말하는 꿈을 생각하면 단 한 사람밖에 안 떠올랐다.
셀레나는 언제나 그의 꿈이었다. 셀레나와 쭉 함께 있게 해 주세요. 셀레나가 살아서 집에 도착하게 해 주세요. 좀 커서는 셀레나가 나를 기억해 주면 좋겠는데… 그리고 지금은…….
“…내가 그런 꿈을 꿔도 되는 걸까? 셀레나는 더 좋은 사람을 만나야 할지도 몰라. 착하고 똑똑하고… 빛나는 사람이잖아. 안 그래?”
“그런 셀레나 씨가 당신이 좋다는데 왜 자꾸 허튼소리를 하는 거예요? 제발 그딴 생각 좀 버려요.”
“내가 걜 불행하게 만들까 봐 겁이 나서 그래. 겁이 나서.”
“대체 뭐가요? 구체적으로 어떤 상황이 겁나는 건데요?”
존이 답답한 마음에 가슴을 두드렸다.
에이든은 어울리지 않게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대답했다.
“어느 날 정신이 들어서 내가 저딴 놈을 좋아했다니 하고 후회하면? 만약 셀레나가 더 행복해질 수 있는데 내가 못나서 걔 행복을 가로막고 있는 거라면?”
“그건 당신이 고민할 몫이 아닌 것 같은데요. 셀레나 씨가 내린 선택이고 그녀가 감당할 문제예요. 그리고 그런 생각을 할 사람도 아니고. 뭣보다.”
“뭣보다?”
“당신의 그 바보 같은 생각이 셀레나 씨가 더 행복할 기회를 뺏는다고 생각 안 해요? 그냥 최선을 다해서 사랑해요! 당신도, 셀레나 씨도 그걸 바라잖아요! 그따위로 굴 거면 그냥 헤어져요! 알겠어요?”
말을 하다 보니 성질이 난 존은 꽥 소리를 내질렀다.
기가 죽은 에이든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후우. 진짜 갑갑해서 원. 지도나 줘 봐요.”
존은 에이든의 손에서 지도를 빼앗았다.
그는 한참이나 지도와 주변을 비교하다가 결론 내렸다.
“분명 이 마을 어딘가에 있어요. 성배를 가져간 건 제국을 건국한 성기사들의 스승이었던 브루노였어요. 실제로 성배를 가지고 떠났던 그가 얼마 뒤 빈손으로 돌아왔단 기록이 있고요.”
“그게 여기, 라사르로 온 거란 증거는 없잖아.”
“그는 성배를 위험한 물건이라 판단해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기기로 했죠. 라사르는 당시엔 버려진 땅이었어요. 브루노는 북쪽으로 갔다고 전해지고 당시 제국의 최북단은 이곳이었으니까요.”
“성배를 부수진 않았을까? 산산조각 내서 버렸을 수도 있고 땅에 묻었을 가능성도 커.”
“아뇨. 성배는 크루커스와 같아요. 허락된 이들만 부술 수 있죠. 그러니 당시에도 성배를 부수지 못하고 몰래 숨기기로 한 겁니다.”
황실에선 성배를 잃어버렸다고 하지만 그건 대외용 변명이었다.
성배는 초대 황제인 에스테반 마르티네슨과 윌리엄 에스타리온에 의해 숨겨진 거였다.
“초대 황제는 왜 성배를 숨긴 거지?”
“성배 때문에 크루커스가 만들어졌으니까요. 악은 교묘합니다. 빛을 가장한 어둠을 자아내는 법이죠.”
“알아들을 수 있도록 설명해 봐.”
“제국 이전의 왕국, 고모라의 왕은 영원한 젊음을 위해서 크루커스를 만들었습니다. 성녀가 개인의 이익을 위해 성배를 사용할 수 없다고 못 박고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자 왕은 성배를 본떠 크루커스를 만들었습니다.”
"크루커스가 성배를 본따서 만들어졌다고?"
“성배에 담긴 성녀의 신성력이 신과의 매개체가 되어 생명력을 만들어 내는 거라면, 크루커스는 어둠의 마법으로 교묘하게 만들어진 모조품이라 다른 사람의 생명력을 필요로 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생명력은 신성력에 반응하였죠. 즉, 당시 신관과 성기사들을 착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크루커스란 말입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사제들이라면 누구나 크루커스를 쓸 수 있었단 거야?”
“그건 아닙니다. 크루커스가 악한 마법으로 만들어진 마법 물품이기 때문에 공명하는 데 한 가지 조건이 있었죠.”
“그게 무슨…….”
존은 혼란에 빠진 에이든에게 상황을 정리해 주었다.
“시에나는 성녀가 맞았습니다. 악의 성녀란 게 문제였지만요.”
* * *
일주일이 넘도록 황궁 분위기가 심상찮았다.
황실이 신전에서 압수해 온 크루커스 때문이었다.
“크루커스를 파괴하려고 백 번이나 도전했는데 아무것도 통하지 않았대.”
“심지어 성수가 뿌려진 검으로도 부수려고 했대. 그런데도 부숴지지 않는다니 너무 끔찍하지 않아?”
궁정인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시온의 귀에도 들렸다.
요즘 황궁의 최대 화젯거리는 크루커스의 파괴였다.
매끈한 호리병으로만 보이는 크루커스는 그 무엇으로도 파괴되지 않았다.
도끼, 검, 불에 달구어진 쇠사슬, 궁정마법사들의 마법, 약물, 사제들의 신성력까지. 쓸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했지만 모두 무용지물이었다.
크루커스엔 흠집 하나 나지 않았고 이 사실은 궁정인들의 입을 통해 빠르게 퍼져 나갔다.
“존 콕스는요?
“조금 더 조사해 보고 싶다며 며칠 묵고 오기로 했어.”
“크루커스 파괴가 137번째 실패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저렇게 둘 수는 없어서 존 콕스에게 자문을 구할까 합니다.”
“나흘 뒤 전하께 보고드리러 올 테니 그때 물어봐.”
“예. 알겠습니다.”
에이든은 존과 함께 라사르 지방에 다녀온 뒤에도 황궁으로 돌아왔다.
시온은 그가 작성한 보고서를 훑었다.
“쓸 만한 건 못 건졌군요.”
“매일 허탕이지. 역사학자들은 이런 게 뭐가 재밌다고 매달리는 건지 원. 대신관은?”
“모릅니다. 직접 얼굴을 봤다간 살려 둘 자신이 없어서 내버려 뒀습니다.”
“잘했어. 오늘도 입을 안 열면 백작에게 심문을 맡기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함께 수사를 하며 서로에게 익숙해지긴 했지만 둘은 기본적으로 데면데면한 사이였다.
에이든은 셀레나를 내친 시온에게 유감이 많았고, 시온은 시온대로 셀레나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터라 셀레나와 함께하는 에이든에게 유독 조심스러웠다.
“작은아버지께서 셀레나를 많이 염려스러워하십니다. 몸이 회복되어서 본래 거주하던 곳으로 거처를 옮기려 하는데 셀레나도 그곳에서 함께 지내길 바라십니다.”
“셀레나에겐 전달이 되었고?”
“조만간 제안이 갈 겁니다.”
“그래서 그걸 나한테 말하는 이유는, 셀레나를 설득해 달라?”
“예. 부탁…드립니다.”
시온은 에이든이 귀족사회에 입성한 뒤 만난 사람 중 가장 정중한 말투로 부탁했다. 에이든의 표정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자신이 셀레나의 평판을 깎는 쓸모없는 놈이 된 것 같았다.
사실 평판까지 가지 않더라도 상식적인 선에서 생각해 보면 셀레나와 그가 함께 지내는 게 얼마나 이상한지 알 수 있다.
결혼하지 않은 미혼남녀에 대귀족의 외동딸과 노예 출신의 만남이었다.
황태자도 그러지 않았던가.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라고.
‘나는 품위가 못 되는 놈인 거지.’
제대로 된 남자라면 셀레나와 함께 거주하기보단 그녀가 살 만한 집을 알아봐 줬을 테다.
물론 거기엔 복잡한 이유가 있었지만 가끔은 그게 변명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럼에도 셀레나를 놓지 못하는 건 단 하나, 지금 그녀를 놓치면 영원히 멀어지게 될까 봐 겁이 나서다.
‘이제 정말 결정을 내릴 때야.’
용기를 가지고 셀레나 옆에 붙어 있든지, 못난 놈이 되어 그녀에게서 떨어져 나올지.
에이든은 가슴이 울렁거리는 감각에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선택은 당사자의 몫이야. 난 대신관에게 가 볼 테니 백작은 셀레나에게 가서 직접 말해. 나한테 이래 봐야 소용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