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
고백하건데, 나는 자라는 내내 작은아버지가 낯설었다.
대화를 나눈 기억도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몰라서다.
기억 속 작은아버지는 친아버지처럼 나를 사랑했다.
작은아버지가 십여 년을 누워 있었던 건 다 나를 구하려다 그렇게 된 거였다.
날 만나면 나를 원망할까. 아니면…….
‘이럴 때 에이든이 있으면 좋을 텐데.’
에이든은 납치범을 찾고 성배를 추적하느라 눈 코 뜰 새 없이 바쁜 듯했다.
“하아. 괜찮아. 잘할 수 있어.”
깊이 심호흡을 한 뒤 응접실 문고리를 붙잡았다.
똑똑. 노크를 한 뒤 문을 열자 에스타리온 백작과 비슷한 뒤통수가 보였다.
사업설명회 때도 이렇게 떨리진 않았던 것 같은데…….
“작은…아버지?”
“셀레나?”
작은아버지가 휙 몸을 돌렸다. 그러자 가장 먼저 에스타리온 백작과 똑같은 녹색 눈이 보였다.
그가 예전과 똑같은 얼굴로 미소 지었다. 지나간 세월 때문에 주름이 지긴 했지만 여전히 다정한 빛깔을 했다.
“맙소사, 셀레나.”
활기찬 음성이 작은아버지가 맞았다. 그가 벌떡 일어나 나를 맞이했다.
그는 나를 보고도 믿기지 않는 듯 몇 번이나 웃다가 눈을 비볐다.
“네가 이렇게 크다니 믿기지가 않는구나! 내가 아는 넌 꼬마아가씨였는데! 몸은 괜찮은 거니? 아프진 않고?”
“…작은아버지야말로 괜찮으세요? 그, 그때 저 때문에…….”
“물론이지. 자고 일어나니 세상이 바뀌어서 아주 즐겁게 시간여행을 하는 중이란다. 그거 아니? 라이놀 선박에 은화 하나를 투자했는데 자고 일어났더니 2만 배로 커 있었어. 하루아침에 벼락부자가 됐지.”
작은아버지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 그가 내 어깨를 붙잡고 나를 찬찬히 살폈다.
“그날 내가 그렇게 되는 바람에 다치진 않았나 걱정 많이 했단다. 집으로 무사히 돌아갔다지만 이만저만 고생한 게 아닐 텐데 이렇게 잘 커 줘서 고맙다.”
“아니에요. 저야말로…….”
지난 세월, 의식 없이 누워 있던 모습이 떠올라 가슴 아래에서부터 뜨거운 것들이 치밀었다.
나는 팔을 벌려 작은아버지를 꽉 껴안았다.
어릴 때 마냥 크게만 느껴지던 품은 기억처럼 대단치 않았지만 여전히 포근했다.
“무사히 깨어나서 감사해요. 그리고 정말 죄송해요. 저 때문에 괜히 고생만 하시고…….”
“그게 왜 너 때문이냐. 널 납치한 놈들 잘못이지.”
“하지만-.”
“하지만은 없다. 너와 난 피해자야. 왜 피해자가 마음의 짐을 가져야 하는 거냐. 셀레나, 혹시 조금이라도 내게 미안해한다면 그런 마음은 버려라.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네 탓도 내 탓도 아니지.”
나를 안는 품에서 진심이 전해졌다. 코끝이 찡해지더니 왈칵 울음이 터졌다.
어린 시절 내가 잃어버린 건 기억이 아니었다. 나를 아끼는 이들의 사랑이었다. 내가 작게 끅끅대기 시작하자 그가 웃음 지었다.
“다 커도 여전히 울보구나.”
“죄송해요. 용감해지고 싶었는데.”
“그래도 이만큼 멋지게 자랐으면 됐지. 시온에게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들었다. 건강하게 지내는 것만도 감사하구나.”
“어디까지 들으셨나요?”
“전부 다 들었다. 형님이 네게 그랬다니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이단심문소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야. 그곳이 어떤 곳인데 어떻게…….”
“이미 지나간 일이에요. 다 끝난 일이고요. 작은아버지야말로 괜찮으세요?”
내가 삼킨 말이 시에나라는 건 작은아버지도 잘 알 테다.
시에나에게 복수한 건 통쾌한 일이지만 작은아버지를 생각하면 마냥 즐겁지도 않다.
사생아라한들 시에나는 작은아버지의 딸이니까.
“부모가 자식을 선택할 수 없듯이 자식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그 아이가 그런 여자의 딸로 태어난 것도 그 애의 탓이 아니지. 하지만 얄궂은 사기꾼으로 크다니!”
납치당해 시에나와 지낼 때를 기억한다. 시에나는 가끔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를 그리워했고 많이 좋아했다.
“원치 않던 아이였다. 줄리아가 몰래 먹인 약물에 취해 태어난 아이지. 그럼에도 내 자식이라 그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 여자가 도박으로 많은 돈을 탕진하는 걸 알아도 양육비로 매달 거액의 돈을 보내 주었지. 그런데 그 결과가 이거다. 사기! 절도! 이간질이라니!”
“…….”
“그 애는 제 잘못에 대해 정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져야지. 나는 그 부분에 한 점의 유감도 없다. 지금 이단심문소에 있다고 들었다만, 그게 내가 책임질 일은 아니지.”
작은아버지는 조금의 동정도 보이지 않았다.
혈육이라 애틋할 법도 한데 시에나의 행실에 많이 실망스러운지 일말의 애정마저 지운 듯 했다.
“시에나를 이해해 달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저… 후에 후회하지 않으실까 해서요.”
“설사 후회한들 보고 싶지 않구나.”
“알겠어요. 우리 다른 이야기해요. 좋은 날 무거운 이야기만 하면 아쉽잖아요.”
냉담한 건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특징인 듯하다.
전대 에스타리온 백작은 한평생 키운 나를 이단심문소에 집어넣었고, 작은아버지는 단번에 시에나를 끊어냈다.
그리고 나도 전대 에스타리온 백작과 시온을 끊어냈다.
한 치의 용서도 없는 우리 선택이 닮아 있었지만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은 작은아버지와 회포를 푸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 * *
“거참. 입 다물고 있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당신 시종이 입을 턴 이상 수사가 마무리되는 건 시간문제거든.”
대신관을 압박하는 에이든의 음성은 셀레나와 있을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다정한 말투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선 약간은 껄렁하고 위협적인 어조였다.
하지만 그건 대신관을 죽일 듯한 눈빛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에이든은 당장에라도 대신관의 멱살을 잡아 후드려 팰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갓 발령받은 새끼 사제가 납치사건을 공모했을 리는 없고. 윗선이 누군지만 말하면 적당히 무마해 주겠다는데 뭘 이리 고집을 부리실까.”
“…….”
“다 뒤집어쓰고 싶습니까? 원하신다면 평생 감옥에서 썩게 만들어 줄 수도 있고요.”
대신관의 시종은 당시 하급사제였던 대신관의 명령에 따라 케빈과 꾸준히 접촉했다.
케빈을 도망칠 수 있게 도왔던 것도 대신관이었고 케빈을 도와 셀레나를 꽁꽁 숨길 수 있도록 한 것도 그였다.
문제는 대신관이 제 윗선을 숨기려고 한단 거다.
누가 왜 납치를 지시했는지만 알면 모든 수사가 마무리되는데 대신관은 입을 꾹 다물고 숨기려들었다.
‘서재에는 당시 일에 관한 증거가 없었지.’
신전 전체를 털었지만 납치 사건에 관한 메모 한 장 나오지 않았다.
‘성배에 관한 연구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런 것도 없었고.’
기껏 털었더니 수확할 게 제대로 없는 상황이었다.
에이든은 한숨을 삼킨 채 비뚜름하니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케빈이 받았던 편지 필체와 당신 필체가 동일하니 이대로라면 당신이 다 뒤집어쓸 텐데 정말 그러고 싶은 겁니까?”
“…나는 신을 모시는 사제요. 내가 있을 곳은 취조실이 아니라 신전이지. 더 이상의-.”
“당신을 신전에서 끌어내기 위해 신전에 불을 지른 건데 다시 돌려보낸다고? 배웠다는 양반이 어째 노예 새끼들보다 못 알아 처먹을까.”
휙휙. 에이든이 신경질적으로 목을 꺾자 목에서 두두둑하는 소리가 들렸다. 대신관이 숨을 삼켰다.
“사제라고 해서 법적 처벌을 받지 않으리라 믿는 모양인데 생각보다 더 여론이 안 좋은 걸 알아야 할 겁니다. 바깥은 아주 난리거든.”
“내 시종이 뭐라고 했는진 모르겠지만 난 무고하네. 늘 돈이 고픈 놈이었으니 백작가 아가씨를 납치해서 돈이나 뜯어낼 생각이었겠지.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잡아 둘 생각인가? 사람을 억지로 가둬 두는 거야 말로 없는 죄를 뒤집어씌우려는 협박이지!”
에이든이 쾅!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깜짝 놀란 대신관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러자 에이든은 태연한 말투로 그를 진정시켰다.
“안심하십쇼. 때리진 않을 겁니다. 주먹질이나 하라고 글을 배운 건 아니라서.”
“…….”
“하지만 대신관님. 이거 하나는 알아두십쇼. 굳이 제가 당신 심문을 맡겠다고 한 건, 에스타리온 백작이라면 갈비뼈 두어 개쯤 부수고 시작할 거기 때문입니다.”
“그랬다간 백작은 절대 무사하지 못할 거요! 나는 대신관이요!”
“납치 피해자의 가족이잖습니까? 그 일 때문에 시에나가 들어올 틈이 만들어졌다고 믿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납치 사건을 파헤치려고 들더군요.”
“난 정말로-.”
“난 노예 출신이라 얻어맞는 게 얼마나 힘든 건지 압니다. 그래서 욕은 해도 주먹은 휘두르지 않으려 노력합니다만 백작은 다르죠. 권력을 휘두르는 법을 아는 놈이고 윗물에서 태어나 아랫물이 어떤지 모르고 살아 두려워하는 게 없습니다. 솔직히 갈비뼈 정도로 끝날 것 같진 않군요.”
에이든의 시선이 대신관의 배에서 손톱으로 옮겨갔다.
손톱 다음으로는 손가락, 손가락 다음엔 이빨로. 그 시선에 대신관은 식은땀을 흘렸다.
“뭐, 손가락, 발가락 몇 개 없다고 죽진 않더군요. 뼈가 잘 못 붙는다 해도 불편할 뿐 큰 문제는 못 되었고. 아시다시피 노예 출신이라 온갖 험한 건 다 봐서.”
“…….”
“성과가 없으면 백작에게 심문권리를 넘겨주는 수밖에 없는데 벌써 열흘이나 입을 다물고 있으니 슬슬 한계인 것 같습니다. 그럼 잘 생각해 보고 연락하십쇼.”
시니컬하게 마무리한 에이든은 일어나 취조실을 나갔다.
철컥. 철문이 닫히자 촛불이 흔들리다 꺼졌다. 그러자 완전한 어둠이 찾아왔다.
대신관은 어둠이 주는 한기에 어깨를 움츠렸다.
다른 사제들의 방문을 죄 막아 둔 데다 황실 감옥엔 신문이 전해지지 않아 외부 상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철저히 고립되었다.
“안 돼. 내 명예가 더럽혀질지언정 대신관 자리는 못 내놔. 내가 왜 그랬는데… 내가 왜…….”
대신관은 때 묻은 사제복을 꽉 움켜쥔 채 두려움을 삼켜 냈다.
아직은 버틸 수 있었다. 아직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