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저급한 말을 한 사람이 노예이던 에이든을 발굴한 황태자인 게 믿기지 않았다.
“방금 뭐라고 하신 건가요?”
분위기가 급격히 냉각되었다. 에이든이 괜찮다는 의미로 내 손목을 붙들었지만 소용없었다.
먼저 자극한 건 황태자면서 그는 분통을 터트리는 내 모습을 보고 눈을 가늘게 떴다.
“제아무리 에스타리온 백작가에서 독립했다지만 그대는 에스타리온 백작가 출신이다. 그와 자꾸 어울리다간 그대마저 같은 부류로 취급받게 되리란 걸 모르진 않을 텐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안다. 이 나라에서 귀족이란 제 인생마저 저울 위에 올려놓아 계산기를 두드리는 존재다.
결혼을 통해 가문간 결합을 유도하고, 그를 통해 재산과 사회적 위신을 지킨다.
그렇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사회적, 경제적 재산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 그게 우리의 의무이자 통념이다.
이것은 귀족이든, 평민이든 달라지지 않는다.
내가 평민과 결혼한다면 내 아이는 나와 달리 평민으로 살게 된다. 내 아이의 아이도, 그 아이의 아이도 영원히 아래 계급에서 나와 다른 삶을 살 것이다.
에이든이 귀족이라 하여도 그것은 명목상 신분이지 귀족 사회에선 절대 그를 귀족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을 게 분명하다.
백 년, 이백 년쯤 지나면 조금쯤 인정하겠지만 적어도 에이든의 손주대까지는 귀족이면서 평민 취급을 받고 살 테다.
황태자는 그 점을 꼬집은 거다. 적당히 어울려라, 그와 함께 있다간 고고한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영애로 자란 너마저 천한 이로 받아들여질 거다 라고.
“그건 제가 감당할 일이죠. 전하께서 왈가왈부할 문제도 아니거니와 칼립소 공작 앞에서 할 말도 아니었어요. 그러니 사과하세요.”
“에스타리온 백작가와 등을 돌린 걸 이해한다. 나를 적대하는 것도 이해하지. 그렇다고 해서 혼인도 하지 않은 채 아무나와 함께 지내는 게 용납되는 건 아니다. 무엇보다 칼립소 공작은-.”
“공작이죠. 전하께서 임명한 제국의 공작이요.”
숨이 거칠어졌다. 가슴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출신이 비천하다고 해서 앞에 두고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건 아니다.
애초에 출신이 뭐라고. 그게 뭐 그리 중요하다고.
너무 흥분해서 얼굴이 뜨거워지는 그때 에이든이 나섰다.
“이만하시고 가 보시죠. 할 일이 많습니다.”
“칼립소 공작. 자네에게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이네.”
“아닙니다. 그게 현실인 걸요.”
“그래. 똑같은 붉은 피가 흘러도 그 가치가 다른 것. 이게 현실이지.”
“잘 아는 사실인데 그리 말씀하시니 조금 속이 쓰리긴 하군요.”
황태자가 내게 시선을 주었다. 서늘한 눈이 씩씩거리는 나를 주시했다. 그는 화가 날 정도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황태자에겐 사람을 무시하는 일 따윈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는 권력의 정점에 선 자였고 단 한 번도 비천해 본 적이 없다.
군림하는 데 익숙한 사람이 군림당하는 사람의 입장을 어떻게 알까. 대체 이런 남자의 어디가 좋았던 건지 이해가지 않는다.
“전하께서 뭘 말하고 싶으셨는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셀레나와는 이미 끝난 인연이고 그건 우리가 알아서 할 문제이니 그만 관심 끄시는 게 좋을 듯하네요.”
“…….”
“참. 대신관의 시종은 깔끔하게 기절시켜서 짐마차에 던져 놨습니다. 이대로 황궁 감옥까지 끌고 가시면 될 겁니다. 그럼 후에 황궁에서 보고드리겠습니다.”
정중하게 인사한 에이든은 나를 데리고 신전을 빠져나왔다.
에이든이 황태자에게 쏘아붙이면 좋을 텐데 그는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그가 공작이 되었다한들 넘을 수 없는 신분의 벽이 있어서다.
에이든이 에스타리온 백작가 같은 유서 깊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제 할 말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그가 노예로 태어난 것도 속상하고 그 때문에 이렇게 듣지 않아도 되는 소리를 듣는 것도 화가 난다.
신분제 자체에 회의가 든다. 귀족과 노예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다고…….
에이든은 마차에 올라탄 뒤에야 내게 말을 건넸다.
“셀레나. 괜찮아.”
“말리지 말지 그랬어. 황태자에게 더한 말도 해 줄 수 있었는데 왜 말려.”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자랐기 때문에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어떤 기분일지, 어떤 일을 겪으며 살지 알지 못했다.
그런 내가 에이든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는 노예 출신이었다.
출신이란 건, 그러니까 노예였다가 귀족이 되었다는 건 동화 속에서처럼 낭만적인 일이 아니었다.
역경을 이겨 내고 새로운 삶을 쟁취해 낸 건 멋지지만 세상은 현실이었다.
거기서 또 다른 문제, 이전에 없던 어려움이 닥친단 의미다.
“내가 노예였던 건 사실이잖아. 나와 있으면 네 평판이 나빠지는 것도-.”
“그런 건 신경 안 써! 어차피 내 평판도 최악이야. 가문과 등을 졌고 누명이라곤 하지만 이단심문소에 들어갔어. 남자들도 안 하는 사업을 운영 중이고 오늘부로 공식적으로 신전과 척을 졌는데 내가 뭐가 무섭겠어!”
“노예 출신과 함께 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에이든. 제발 그런 말 하지 마. 네 출신이 뭐든 상관없어.”
노예로 살면 언제든 채찍을 맞을 수 있고 도망갈 수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다. 글을 배울 수도 없고 공부를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사람으로 살며 가지는 모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글을 배운 뒤에도 에이든은 제 출신에 대해 컴플렉스를 가졌다.
노예였던 과거를 부끄러워하진 않았지만 스스로에 대해 자신감이 없었다.
자신을 못난 놈이라 믿고 내 옆에 있기에 한없이 부족하다고 여긴다. 그래서 누구보다 노력한 걸 테다.
글을 배우고, 신문을 읽고, 검술 대회에 나가고, 권력을 가져 보려고 황태자 아래에서 일하는 거겠지.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 안다. 하지만 내가 바라는 건 에이든이 경제학자가 되고 권력을 가진 공작이 되는 게 아니다. 난 그냥…….
“난 너라서 좋은 거야. 네가 뭐든 간에 네가 너인 게 중요해.”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하지만 울진 않았다. 눈을 부릅뜨고 에이든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면 내 감정이 온전히 전해질 것 같았다.
에이든은… 뭐라고 설명하기 오묘한 표정을 했다.
턱에는 힘이 꽉 들어갔는데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직감적으로 그가 울음을 꾹 참고 있단 게 전해졌다.
어떤 단어가 그에게 확신을 줄 수 있는지 모르겠다.
사실 한 마디 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시간이었다.
에이든은 제 컴플렉스를 이겨 내야 하고, 나는 그런 그를 기다려야만 한다.
결국 나는 멍하니 창 밖 풍경을 지켜보았다.
나도 에이든도 오늘 일이 상처가 되었기에 집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 하나 먼저 말을 꺼내지 못 했다.
Chapter 8. 진실
“이제 열이 좀 내렸네요. 어제까진 자꾸 열이 올라서 걱정했는데 오늘부턴 나으려나 봐요.”
체온계를 확인한 에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녀가 준 약을 한 번에 삼켰다.
신전에서 그런 일이 있고 나서 긴장이 풀린 건지 한동안 한참 아팠다.
처음엔 몸이 욱신거리더니 며칠 만에 열이 올라서 회사도 못 나간 채 집에서 꼼짝 않고 쉬어야만 했다.
“에바. 신문 좀.”
“오늘까진 쉬면 좋겠는데…….”
에바가 건네준 신문 헤드라인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타락인가 몰락인가.]
내가 열이 올라 고생하는 동안 세상은 완전히 뒤집혔다.
성기사의 날 신전에서 있었던 일은 기자들을 통해 일파만파 퍼져 나갔다.
에스타리온 백작이 폭로한 신전의 비리와 성녀의 거짓말, 마법 물품과 성물을 구분하지 못 한 무능, 성수를 고위 귀족에게만 판매하며 병들고 아픈 이들을 외면해 온 과거까지. 그들이 쌓아 온 모든 일이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 반대급부로 신전의 무능함을 밝힌 황실은 인기가 더해졌다.
신전과의 유착을 끊고 비리를 폭로한 에스타리온 백작가는 영웅적이란 평가를 받았다. 그리고 나는…….
[전설 속 성녀는 고통에 신음하는 이들을 구원하고 죄악의 종살이를 하는 이들을 해방시킨다 하였다. 그러한 성녀가 하늘이 내린 특별한 사람이길 바라는 건 우리의 바람 아닐까?]
기사는 내가 성녀라는 뉘앙스로 설명을 이어나갔다.
[셀레나 레이온은 에스타리온 백작가 출신이지만 누명을 쓰고 이단심문소에 간 뒤 가문이 주는 모든 것을 거부한 채 스스로의 힘으로 레이온 제약을 설립하였다.
알다시피 레이온 제약이 만든 마취제와 진통제는 많은 이들을 구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열흘 전 있었던 성기사의 날에 신전이 숨기고자 한 진실을 폭로하였다.
어쩌면 그녀야말로 진짜 성녀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거짓말쟁이 시에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부끄러워서 얼른 다음 장으로 넘겼다. 뒷장에는 시에나에 관한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곳엔 시에나가 나와 닮은 얼굴을 이용해 백작가에 한 거짓말과 그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셀레나 에스타리온의 전담 하녀였던 로지는 시에나가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교묘한 거짓말로 이간질을 하는 걸 보았다고 전했다.]
로지는 시에나 때문에 맺힌 게 많았던지 백작가에서의 일을 아주 상세하게 폭로했다.
[현재 거짓말쟁이 시에나는 황실에 고소당한 데 이어 에스타리온 백작가로부터 사기죄, 횡령죄, 절도 등으로 추가 고소를 당했다.
황실은 그녀가 사악한 어둠의 마법을 사용할지도 모른다며, 황실 감옥이 아닌 이단심문소로 인계하였으며…….]
시에나는 적법한 절차에 따라 처벌받게 될 테다. 물론, 이단심문소의 철저한 조사를 거치기야 하겠지만 나도 이겨 냈는데 그녀가 못 버틸 리 없다.
신문을 덮고 일어나서 하루를 시작할 준비를 했다. 아프다고 누워만 있는 건 성미에 맞지 않았다.
“셀레나 씨. 손님이 오셨어요.”
“손님?”
“네. 루카스 에스타리온이라고…….”
아. 아파서 작은아버지를 만나 뵈는 걸 미뤄 왔다. 오늘 미뤄 온 숙제를 해결해야 할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