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100화 (101/134)

<100>

셀레나가 납치당했을 때 황태자는 고작 열 살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어리다고 해서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다.

그는 권력의 중심에 선 황궁에서 자란 소년이었고 자신이 미래에 어떤 존재가 될지 잘 알았다. 그리고 황제가 되면 무엇과 싸워야 할지도 이해했다.

“그 아이를 찾지 못하면 약혼은 다음 대로 넘어가게 될 거예요. 다음 대 에스타리온 백작가 아이와 황가의 아이가 나이가 맞지 않으면 신전을 견제하는 게 더욱 힘들어지겠죠. 무슨 일이 있어도 셀레나, 그 아이를 찾아야 합니다.”

황실에선 셀레나를 찾을 수 있도록 많은 지원을 퍼부었다.

황실과 신전의 대립은 날이 갈수록 심해져갔고 신전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포섭하는 건 결혼으로 인한 혈맹밖에 없었다.

“신전의 짓이 분명합니다. 신전에 심어 둔 세작에 의하면 대신관의 시종들이 은밀하게 움직이는 걸 목격했다고 합니다. 특히 셀레나 에스타리온이 납치당한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시종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포착되었습니다.”

“그게 사실이냐?”

“예. 황후마마.”

“폐하. 이 사실을 공론화하여 신전을 제대로 조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좋겠지만 섣불리 움직였다간 오히려 황권이 하락하는 수가 있소. 무엇보다 단순납치 사건으로 꼬투리를 잡는다며 여론이 하락하는 수가 있지.”

“어린아이가 납치당했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지내는지도 모르는데 하루빨리 범인을 찾고 아이를 데려와야 하지 않습니까.”

“황후. 나도 이 일을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우린 누구보다 신중해야 하오. 아직 신전과 전면대립할 상황이 아니란 걸 잘 알지 않소.”

당시의 신전은 지금보다 더 많은 인기를 구가했다.

오랜 시간 신전의 권력이 하락했다곤 하지만 여전히 신자들의 믿음이 강력했다.

무엇보다 황태자의 증조부는 젊은 시절 신전의 힘을 짓밟겠다 나섰다가 대신관에게 무릎을 꿇으며 굴욕을 겪었다.

그렇기에 황제는 신전을 치는 일에 조심스러워했다.

“황실과 에스타리온 백작가가 결합하면 신전에 큰 위협이 될 거라 판단해 그런 걸 거예요. 가엾은 셀레나. 아주 밝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는데…….”

“나 또한 그 아이가 납치당한 게 유감스럽지만 제대로 된 증거나 증인이 있는 게 아니라 경거망동해선 안 되오. 우린 에스타리온 백작가를 지원하는 정도에서 멈추는 게 좋겠군.”

황태자는 제 아비가 신전의 만행을 알고도 조용히 묻는 걸 지켜봐야 했다. 그것이 실망스럽고 부끄러웠다. 그리고 끔찍했다.

“황태자 전하. 폐하는 만나 뵈었습니까?”

“피터슨.”

“예. 왜 그러십니까?”

“…너무 역겨워 견딜 수가 없어.”

“예? 그게 무슨…….”

죄 없는 어린아이가 납치당했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신을 섬긴다는 자들이 권력 때문에 범죄를 저지른 게… 이 모든 상황이 역겨워서 구역질이 났다.

그리고 가장 끔찍한 건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단 거다.

현실을 바꾸고 싶지만 어리고 힘이 없어서 무력하기만 한 스스로가 싫었다.

“전하. 셀레나 님께서 납치당한 일 때문에 기분이 안 좋으신 겁니까?”

황태자는 셀레나 에스타리온과 마주친 적이 몇 번 있다.

밝고 명랑한 아이였다. 반짝이는 황금빛 눈이 아름다웠고 다정한 말씨를 가졌었다.

약혼이 어떤 무게를 지니는지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한 나이임에도 황태자는 셀레나와 평생 함께하는 게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셀레나가 납치당했다. 황태자는 그 일에 책임을 느꼈다.

황권을 견제하기 위해 벌어진 일에 무고한 이가 휘말린 것이니까.

“내 대에선 신전과의 다툼을 끝내야겠어.”

어린 날 지나칠 다짐과 같았지만 돌아온 셀레나와 마주친 날, 황태자는 제 다짐이 숙명이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 * *

납치 전의 기억을 잃은 셀레나는 더 이상 밝고 명랑하지 않았다.

셀레나는 나이에 맞지 않게 침울하도록 차분한 아이가 되어 있었다.

그 변화에 황태자는 깊은 짜증을 느꼈다. 아니, 순간 느낀 감정은 짜증이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신경을 갉아먹고 끊임없이 속을 짓누르는 무언가였다. 그건 죄책감이오, 책임감이었다.

셀레나에게 미소를 빼앗은 것이 황실이기에, 그리고 자신과의 약혼이기에 황태자는 셀레나의 얼굴에 보이는 그늘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셀레나가 싫었다.

그녀가 좀 더 강한 사람이었다면 저렇게 기억을 잃고 다른 사람이 되어 살지 않을 텐데. 그녀가 조금 더 단단했다면 기억을 되찾고 저토록 고통스러워하지 않을 건데.

“전하께서는 에스타리온의 여식을 만나고 나면 늘 기분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황태자는 제 시종의 말을 들은 척도 않았다.

기분이 안 좋은 게 아니라 마음이 불편한 거였다. 그녀가 약하다고 증오하는 것도 실은 자기혐오 때문이니까.

그는 굴절된 분노를 가진 스스로가 비열하다 여겨져 끔찍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하. 셀레나 에스타리온이 이단심문소에 갇혔다고 합니다.”

그는 피터슨을 통해서 상황을 파악했다.

시에나라는 여자의 등장과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혼란. 그리고 셀레나의 파문까지.

하루를 꼬박 밤새우며 고민했다. 체스판의 흐름을 어떤 식으로 이끌어갈까 하고.

‘셀레나를 빼돌린 뒤 가짜를 미끼로 신전을 축출해 내면 되겠어.’

그녀를 이단심문소에서 빼내 다른 곳으로 옮기고 시에나라는 여자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어리석은 에스타리온 백작과 달리 그는 셀레나가 에스타리온 백작가의 진짜 딸이란 걸 잘 알았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를 시에나에게 납치에 관한 거짓 기억을 진술하도록 해 사건 관련자들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도록 만들려고 했다.

그렇게 납치 사건의 전말이 밝혀지고 나면 시에나는 제거하고 셀레나를 본래 자리로 돌려보낼 계획을 세웠다.

이단심문소에 방문한 건 셀레나에게 얼마간 시골 별장에서 안정을 취하도록 만들겠노라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계획이 어긋난 건 이단심문소로 가던 길, 우연히 대신관이 제 시종들에게 하는 소리를 들어서다.

“레이디 셀레나 대신 들어온 여인이 당시 그 아이라고?”

달이 기운 새벽이었고 심문소를 지키던 간수에게 돈을 먹여 출입하는 터라 신전의 뒷문을 이용했기에 들을 수 있었다.

황태자는 숨소리마저 죽인 채 대신관의 음성에 집중했다.

“케빈과 함께 있던 아이라면 너를 알 것 아니냐. 이것 참 큰일이로군. 혹여 납치 사건에 대해 입에 올리려 하면… 바로 제거해 버려라.”

계획은 수정되어야 했다. 대신관이 상황을 주시하였기에 그가 시에나에게 접근해 봐야 의심만 살 뿐이다.

하지만 고초를 겪는 셀레나의 상황을 확인해야 했기에 황태자는 늦은 시간 셀레나가 있던 감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너절한 꼴이 된 셀레나를 확인하였다.

손톱은 부서지고 머리는 헝클어진데다 안색은 초췌했다.

그럼에도 눈빛은 달라지지 않았다. 피로에 찌들지언정 특유의 말간 빛깔은.

“여전하군.”

어떤 꼴을 했든 셀레나에겐 범접할 수 없는 우아함이 있었다.

고고함, 꼿꼿함. 그리고 고귀함. 셀레나는 늘 그러했다. 고통에 무너질지언정 꺾이지 않았다.

“다행이야.”

당신이 꺾이지 않아서. 그녀가 꺾여지면 그는 자신이 느낄 감정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계획을 수정해야 했기에 오늘은 셀레나에게 다른 곳으로 옮겨 주겠다 하는 등의 말은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모든 걸 그녀가 이런 춥고 더러운 곳에서 빠져나가길 바랐다.

“이제까지의 시간이 있으니 몇 가지 부탁 정도는 생각해 볼 수 있다.”

조금만 기다려라, 다른 곳으로 인도해 주겠다고 말하지 않은 건 그가 비겁하기 때문이다.

그는 셀레나를 위해 아무 이유 없이 나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이단으로 의심되는 상황이라 자칫 잘못하면 황실과 신전 측에 문제의 불씨를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녀가 도와 달라 한마디만 하면 그것을 핑계 삼아서 무엇이든 할 용기가 날 것 같았다.

그러니 딱 한 마디만하면, 한 마디 부탁이면 모든 계획을 엎고 처음부터 다시 쌓을 것이다.

“힘들지 않은가?”

일부러 셀레나를 자극했다. 부탁이라곤 할 줄 모르는 뻣뻣한 여인이지만 고통 앞에선 어쩔 수 없는지, 그녀가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도와…주셔요.”

그 순간, 황태자는 셀레나를 자극한 걸 후회했다.

대신관과 대화하던 시종이 감옥 너머 복도 끝에서 그를 발견하곤 몸을 숨기는 걸 확인해서다.

모습을 들킨 이상 함부로 행동할 수 없었다. 그가 호의적으로 굴었다가 셀레나의 처우를 이용해서 그를 뒤흔들려고 할 수 있어서다.

최악의 경우 이단이 아닌데도 이단이란 오명을 뒤집어써서 한껏 고생할 가능성이 높다.

그럴 바엔 깔끔하게 조사를 받고 이단심문소에서 나오는 게 나을 테다.

그래서 황태자는 셀레나를 조롱하였다.

“거절하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시린 음성으로 비웃었다.

“그대가 이리 무너지는 날이 오는군. 그럼, 행운을 비네.”

이만큼 했으면 적어도 저 때문에 셀레나가 더 힘들어지진 않겠지.

황태자는 간수에게 따로 돈을 뿌려 다른 날 다시 와야겠다 생각하며 감옥을 빠져나왔다.

흐릿한 달빛마저 자극적으로 느껴질 만큼 어두운 새벽이었지만 어둠은 그가 가진 비겁함을 가려주지 못하였다.

제게 용기가 있었다면 상황이 어떻게 되든 우선 셀레나를 이단심문소에서 꺼내지 않았을까.

변명이야 오랜 시간 약혼 관계를 유지하며 키워 온 마음이 있다고 둘러대도 되었다.

그에겐 이단이란 예민한 문제로 신전과 부딪칠 용기가 없었다.

‘오늘의 비루먹은 꼴은 영원히 나를 따라다닐지 모르겠다.’

그런 직감이 들었다. 평생 순간의 그늘에서 살 거라 확신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그는 그날의 제 선택을 후회했다.

이단심문소에서 나온 셀레나를 에이든 칼립소, 노예 출신의 건방진 사내가 데려갔기 때문이다.

* * *

다시 만난 그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눈빛도 단단해졌고 말투부터 사용하는 단어까지 모든 면이 변화했다.

복수를 다짐했고 기억을 감당해 냈으며 전에 없던 면모를 보였다.

그 변화가 달가웠다. 조금은 죄책감에서 해방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가끔, 아주 가끔 신경이 거슬렸다.

어느 때냐면 셀레나의 변화가 에이든 칼립소 때문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거나 그녀가 놈과 함께 있을 때였다.

셀레나 때문에 가슴이 무겁던 것과는 또 다른 느낌의 불쾌감이었다.

에이든 칼립소가 뭐라고. 셀레나 에스타리온의 변화가 뭐라고 가슴이 갑갑해지고 불편한 감정이 드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성적으로 생각해서 부채감 때문에 에이든 칼립소까지 경계할 필요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제 감정의 정체도 모른 채 갑갑한 나날을 이어갔다. 그러다 검술 대회 결승전이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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