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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진짜인 줄 알았는데-99화 (100/134)

<99>

대신관이 워낙 바람잡이 역할을 잘해서 신전 안에도 밖에도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수많은 군중이 나만 주시했다. 내가 자리에서 일어나 단상으로 나가는 걸 지켜보았고 내가 꺼낼 말을 기다렸다.

‘후우.’

속으로 내가 거짓을 말하려는 것도 아니고 사실 그대로 진실을 밝히려는 건데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

또각. 또각.

대리석 바닥을 걸을 때마다 구둣발 소리가 났다.

탁. 단상 앞에 서자 대신관이 손짓했다. 그러자 다른 사제가 크루커스를 꺼내 왔다.

단상 테이블에 크루커스가 올려지자 신전 안팎으로 술렁이는 소리가 들렸다.

“이것이 바로 크루커스입니다. 성녀님께서 기적을 행할 수 있도록 신께서 내려주신 성물이지요. 셀레나 자매님께선 옛 성기사들의 방식 그대로 크루커스의 진위를 밝히실 겁니다. 감별의 나침반을 가지고요.”

나는 품에서 나침반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리곤 몸을 돌려 제단 뒤로 새겨진 여신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맹세했다.

“저는 이 자리에서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실만을 말할 것을 약속드리는 바입니다.”

자리에서 맹세한 뒤 몸을 일으키자 대신관이 나침반을 좌중에게 보여 주었다.

“이 나침반은 대신관님께 인준받은 성기사들의 감별 도구입니다. 그리고 이것.”

그는 품에서 나침반에 끼울 링을 꺼내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흔들었다.

“이 링은 나침반의 힘을 증폭시켜서 삿된 물건의 어둠을 시각화해 주는 물건입니다. 오늘 아침까지 신전의 성물 보관함에 있던 성물이죠.”

링은 나침반에 꼭 끼울 수 있도록 절묘한 사이즈였다.

달칵. 대신관의 손에서 링의 홈과 나침반이 단단히 맞물렸다.

대신관은 링이 끼워진 나침반을 내게 건넸다. 나는 준비한 칼로 손바닥을 그어 나침반에 흩뿌렸다.

갑작스런 행동에 헉하고 숨을 삼키거나 인상을 쓰는 게 보였다. 그중엔 에이든도 있었다.

그는 이 상황이 못마땅한 듯 굳은 얼굴로 피 흘리는 손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툭. 툭.

붉은 피가 나침반 위에 흘렀다. 지난번엔 손끝을 찔러 몇 방울 뿌리는 정도였지만 이번엔 양이 많아서 그런지 금방 반응이 왔다.

나침반의 바깥쪽에 끼워진 링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구경꾼들이 입을 쩍 벌린 채 집중했다. 나침반의 피 묻은 바늘이 빙글빙글 돌았다.

링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 조금씩 조금씩 허공으로 올라가더니 한데 뭉쳐졌다.

그 빛은 곧 나침반 바늘 모양이 되어 빙그르르 돌다가 바로 옆의 크루커스를 가리키며 멈췄다.

그러자 바늘 형상의 빛이 가로로 늘어지더니 화살의 형태를 했다. 그리고.

“헉!”

“꺅!”

군중들이 소리를 내질렀다. 나도 화들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빛의 화살이 크루커스를 향해 날아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빛의 화살이 크루커스에 부딪치는 순간, 크루커스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지더니 화살이 네 동강이 났다.

“이, 이게 무슨…….”

대신관이 사색이 되어 크루커스와 나침반을 번갈아 보았다.

화살을 동강 내 놓고도 크루커스는 멈추지 않고 검은 연기를 뿜어냈다.

그러자 피를 머금은 나침반은 빛나는 링을 통해 더 많은 빛을 뿜어냈다.

검은 연기가 생명을 지닌 것처럼 너울거렸다. 검은 연기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크루커스에서 뿜어져 나오는 사악한 기운은 자리에 있는 모두가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짙었다.

시에나의 안색은 시체처럼 창백해지다 못해 이제 푸른 빛까지 띠었다.

대신관이 상황을 수습하려고 입을 여는 순간, 내가 선수를 쳤다.

“크루커스는 삿된 물건이 확실합니다. 이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군요.”

“셀레나 자매님!”

“성녀, 시에나는 우리 가문에서 크루커스를 훔쳐 신전으로 숨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신전은 크루커스가 성물이라고 공표하였지요. 신전은 정말로 크루커스가 사악한 흑마법으로 만들어진 마법 물품임을 몰랐습니까?”

가만히 보고 있던 시온이 벌떡 일어나서 대신관에게 쏘아붙였다. 대신관은 쉽사리 대답하지 못했다.

마법 물품임을 알았다고 한다면 성녀와 함께 신자들에게 거짓말을 했으며 흑마법에 동조했다는 뜻이 된다. 몰랐다고 한다면 그것대로 신전의 무능을 증명하는 게 된다.

결국 대신관이 선택한 건 하나였다.

“셀레나 자매님. 대체 나침반에 무슨 짓을 한 겁니까? 신전을 시험하고 곤경에 빠트리기 위해 흑마법을 사용해 일을 꾸민 것 아닙니까?”

자리에 앉아 있던 에이든이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나는 그에게 작게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내가 처리해야 할 문제였다.

“이 나침반의 성능과 제 자질, 그리고 성기사의 임명까지. 모두 대신관님께서 하신 걸 잊으신 건가요? 여기, 대신관님께서 써 주신 증명서까지 있는데 어째서 제게 화살을 돌리는 건가요?”

혹시 몰라 챙겨 온 증명서를 꺼냈다. 대신관은 입을 뻐끔거릴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모두 그가 인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대신관을 비롯해 다른 사제들도 섣불리 나서지 못했다. 그 사이 시온이 대신관을 재촉했다.

“대신관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답변하셔야 할 겁니다. 답변에 따라 신전도 사기죄에 해당되어 처벌받을 수 있으니까요.”

근래에 누구보다 신전 때리기에 앞장섰던 시온인지라 유독 날카롭게 느껴졌다.

대신관은 시에나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하얗게 질려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시에나가 도와 달란 의미로 나를 보았다.

보는 눈이 많아 그녀를 보고 웃을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시선을 피하진 않았다.

시에나는 내가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 거란 걸 깨달았는지 입을 벌린 채 숨을 삼켰다. 그때였다.

“어떤 쪽이건 성녀 시에나가 사기꾼이란 건 달라지지 않는다. 신전이 이번 사태에 얼마나 연루되었는지는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지. 에스타리온 백작. 죄인을 체포하라.”

황태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시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시에나에게 가서 그녀를 체포했다.

“오, 오라버니. 왜 이러세요. 오라버니!”

“누가 네 오라버니냐. 너는 납치범의 딸인 주제에 셀레나가 옛 기억이 없는 걸 파고들어서 친딸 행세를 한 사기꾼이다. 또한 성녀 행세를 하며 나라를 어지럽혔으니 이 부분 또한 엄중한 처벌을 받을 거다.”

시에나의 죄명을 읊은 시온은 망설임 없이 그녀를 체포했다.

근처에 있던 사제들은 말리지도, 동조하지도 못한 채 대신관을 보며 명령이 떨어지길 기다렸다.

대신관은 졸도할 듯한 얼굴로 단상에서 내려와 신전을 빠져나갔다. 당황한 사제들이 대신관의 뒤를 이었다.

“성녀가 마녀였을지도 몰라.”

“신전이 사기를 쳤다!”

“대신관이 우릴 속였어!”

구경꾼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 내뱉었다. 신전 내외부로 난리가 났다. 손에 달걀이 있으면 사제들에게 내던질 기세였다.

시온에게 체포당한 시에나가 나를 불렀다.

“셀레나! 날 도와주기로 했잖아!”

“네가 납치 사건의 진범을 안다고 해서 오늘 거짓을 말해야 하나 고민했지만… 난 양심에 따라 행동하기로 했어.”

“뭐, 뭐어? 너 미쳤어?”

“시에나. 난 분명 기회를 줬어. 네 잘못을 바로잡도록 크루커스는 성물이 아니라고 언질을 주기까지 했는데 그걸 걷어찬 건 너야.”

나는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그녀만이 들을 수 있도록 속삭였다.

“그럼 이단심문소에서 만나자. 물론, 감옥에 갇힌 건 너겠지만.”

힘내란 의미로 시에나의 팔을 톡톡 두들겨 주었다. ‘

시에나는 겁에 질리다 못해 악에 차서 내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에이든이 더 빨랐다.

언제 다가왔던지 에이든이 나를 제 뒤로 끌어당겼다.

동시에 시온이 시에나의 멱살을 붙잡아 바닥에 내팽겨쳤다.

“크루커스는 진짜야! 내 생명력을 부어서 성수를 만들어 줬잖아!”

시에나가 허튼소리를 지껄여도 듣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개처럼 질질 끌려 나갔고 나는 그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내 승리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 승리.

‘네가 날 구렁텅이에 밀어넣지만 않았어도 난 너를 친자매처럼 생각했을 거야.’

거짓말만 안 했어도 이런 상황이 오진 않았다.

내가 과거를 떠올리는 데 성공하더라도 밉살맞은 행동을 했던 건 어려서 그랬던 거라 이해하며 넘어갔을 거다.

‘오늘 그 꼴을 자초한 건 너야. 시에나. 가서 내가 느낀 고통을 똑같이 느껴 봐.’

시에나의 비명이 멀어져갔다. 에이든이 멍하니 서 있는 나를 붙잡아 장소를 이동했다.

구경꾼과 기자들로 인해 신전 안이 아수라장이었기 때문이다.

“괜찮아?”

“…기분이 이상해. 마냥 통쾌할 줄 알았는데…….”

“네가 시에나 때문에 고생한 게 많아서 그래. 되돌려준다고 해도 받은 상처가 해소되는 건 아니니까.”

“그런가.”

“너랑 함께 있고 싶지만 대신관에게 가 봐야 해. 신전이 어수선해서 대신관의 심부름꾼에게 접근하기 좋거든. 혼자 있을 수 있지?”

“그럼. 다녀와.”

에이든은 나를 두고 가는 게 내키지 않는지 쉽사리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그가 손을 들어서 볼가에 어지럽게 달라붙어 있던 머리카락을 귀 뒤에 꽂아 주었다.

“그간 고생 많았어. 그리고 잘 이겨내 줘서 고마워.”

보는 사람이 벅차도록 따뜻한 미소를 지어 보인 에이든은 그 길로 복도를 빠져나가 군중들 사이로 사라졌다.

에이든이 떠나가고 나 혼자가 되자 뒤늦게 긴장이 풀렸다. 다리가 휘청거려서 벽에 몸을 기대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황태자였다.

“여기 있었군.”

“오실 줄 알았어요. 약속대로 신전을 무너트리는데 최대한 협력했어요. 그러니 전하께서도 약속을 지켜요.”

“그래. 그 여자는 죽는 날까지 이단심문소에서 썩게 될 거다.”

“그럼 우리 계약은 여기까지네요.”

대충 대화를 마무리 짓고 떠나려는데 황태자가 내 앞을 막아섰다.

“수고했다. 덕분에 신전을 무너트리는 게 쉬워졌어.”

“레이온 제약의 지지뿐만 아니라 성기사로서의 힘까지 발휘했으니 그 값으로 납치 사건에 대한 자료를 넘겨줘요.”

내 말에 황태자는 재밌단 듯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미소 짓는 그는 조금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칼립소 공작과 그 부분은 공유하지 않은 모양이군.”

“에이든은 좋지 않은 건 보여 주지 않으려고 해서요. 무엇보다 오늘 황실군이 신전을 조사하며 어떤 정보를 찾을지 모르잖아요.”

황태자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물었다.

“칼립소 공작에게 들은 건가?”

무슨 뜻이지? 나비 문신을 한 시종에 대해선 시온과 에이든, 나까지 모두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 황태자는 지금 신전과 납치 사건의 연관성에 대한 걸 에이든에게 들었냐고 물었다.

일부러 아는 척 거짓말을 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으셨던 건가요?”

“쓸데없는 짓을 했군.”

입술을 비튼 황태자가 털어놓았다.

“그래.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신전이 납치 사건의 진범이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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